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20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1)


1. 저는 여러 체험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비밀들을 사도들에게는 열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만졌습니다(고전2:7-10). '맏아들이신 주님'을 아는 것은 이렇듯 신랑 되신 그분의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제한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신약의 결론 - 그리스도

(골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설명할 때 '측량할 수 없는''(the unsearchable riches)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엡3:8). 그는 또 '그리스도와 교회'가 큰 비밀(a great mystery)이라고 말합니다(엡5:32). 신실한 성경 교사들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710쪽 분량)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400개 이상의 명칭을 신구약에서 찾아내어 각각에 대해 풍성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이 출판한 찬송가 집에는 단 한 장(388장)의 가사에서 주, 생명, 능력, 지혜, 공의, 성결, 구속, 평안, 기쁨, 소망, 안식, 빛과 길 등 그리스도에 대한 70 가지 이상의 방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에 있어 위대한 비밀임으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데 온 일생을 쏟아 부었습니다(엡3:18-19, 빌3:7-14).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안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구주 예수의 사랑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외에도 성경이 보여주는 비밀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방면들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고 사도들도 힘써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어떤 방면들을 말하면,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들의 '교리집 내용'에 없다며 받아들이려 하질 않습니다. 이런 태도들은 '작은 신발에 큰 발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려면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가 배운 교리,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을 성경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높이는 분들은 비밀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춘 분(벧전5:5),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분(고전2:9),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마음 눈이 밝아지길 간구 하는 분(엡1:17-18), 영 안에 있는 분(계1:0)이라야 풍성한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각 방면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비 된 분들에겐 이런 주제에 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큰 진보를 체험케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3)  교파와 주의회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교파에 계시다가 회복된 교회생활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전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밖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방면이 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쉽게 풀리고 "체험되는" 교회생활은 많은 지체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전에는 경험치 못했던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을 가져오는 주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the first-born)(롬8:29), 또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the last Adam became the life-giving Spirit)'(고전15:45) 라는 말씀에 대한 빛과 체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면, '보좌 앞의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이 땅 위의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한 머리요 몸이신 그리스도(행9:4, 엡1:22-23, 골1:18), 믿는 이 안과 보좌 위에 동시에 계시는 그리스도(롬8:10, 34),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인자(요1:51, 창28:12), 이 땅에 보내심 받았으나 여전히 하늘 아버지 품속에 계신 아들(요1:18),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 아들(요3:13절 KJV원문),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요7:39) 등의 난해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런 말씀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는 더 이상 난해구절들이 아니며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체험하는 친근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닮아 갈 원형이신 '맏아들'(롬8:29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빗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매 순간 주의 영을 바라봄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간(고후3:18)에 저 하늘 어디 천당 갈 꿈만 꾸며 헛된 일에 시간낭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라는 시험문제를 받아 놓고도 토끼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수험생은 시험종료 벨이 울리기 전에 빨리 바른 상황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진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 모두를 '맏아들' 또는 '생명 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16 1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5) - 생명을 영접해요?


-보통은 처음에 기독교인이 된 것을 말할 때 '예수님을 믿었다' 거나 '교회 나가기 시작했다'라고 하는데, 지방 교회측 분들은 '생명을 영접했다' 라고 말하기도 하나요?  


생명을 영접했다는 말은 저희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보통은 '구원받았다' 또는 '거듭났다' 라는 말을 쓰지요. 어떤 경우는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믿음 생활의 시작임을 잘 알고 있지요. 

  - 왜 요 3장 16절에도 예수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영생'은 멸망의 반대말이고, 죽지 않고 천국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영생'(eternal life)을 죽지 않고 오래사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데 어떤 분은 그런 개념이라면 심지어 지옥간 사람도 거기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더군요. 물론 고통이지요. 예수 믿으면 물론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위 문맥에서 <영생>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영원한 생명이신 분, 즉 주 예수님 자신을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는 믿는 우리 안에 실제로 들어 오신다는 것인가요? 

 예.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은 (생명이신)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고 하고, 또한 34절은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둘 다 사실이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보혜사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목사님들이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무튼, 주 예수님이 직접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조금은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지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교리는 주로 장로교단 쪽 분들이 하시는 주장인데, 그 근거로 요일 3:24를 제시하더군요. 사실 이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조금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분들이 성경 본문을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아래 출처에 가셔서 정리된 글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http://blog.chch.kr/7777/32684.html )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 자체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고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골3:4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했고, 고후13:5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했고, 골1:27은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5:11-12도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를 생명이다 라고 소개한 곳도 있지요(요11:25, 14:6).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한 곳에 모아서 이야기를 해 주시니까 또 다른 느낌이 있군요. 그런데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면 어디로 오신다는 말씀인지요? 

 평범하면서도 예리한 질문이십니다. 사실 개혁신학을 하신 분들은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조금은 주저하는 편입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Finitum non sapax infinit)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문제는 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 이미 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유한한 참 사람으로서 무한한 참 하나님을 그 안에 '담으신' 분이라고 할수 있으니까요(요1:14). 그것은 그렇고, 대개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라고 하지요.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생명이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계십니다(요3:6, 고전6:17). 그후 우리의 마음으로까지 점차적으로 그분의 거처를 확대해 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엡3:17). 

  -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면 나중에 공중 재림하신다는 말씀은 안 믿으시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장차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 아멘입니다. 현재 우리 안에 생명으로 계신 것과 나중에 재림하시는 것을 그리피스 토마스(W.H. Griffith Thomas)라는 저명한 신학자는 자신의 <성령론>에서 미래에 있을 재림 즉 '파루시아'와 구분하여 오늘날 주님의 내주하심을 '현재의 파루시아'로 표현했더군요 

  -'생명'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보니 앞으로 시간을 내어 제대로 한번 이 주제에 대해서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끝으로 지방 교회 측은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낳으신 것이 아니고 양자로 삼아 주신 것이다' 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런 오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간격을 너무 강조하고, 또 '양자의 영'(롬8:15)에서 보듯이 개역 성경이 번역시 '양자'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자로 번역된 '휘오데시아'(5206)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양자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직접 낳지 않고 법적으로 입양한 자녀를 양자라고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법적인 상속을 받을 만큼 장성한 자녀를 가리킵니다(엡1:5, 갈4:5 참조). '장성한' 이란 말을 잘 새겨야 합니다. 히2:11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함으로 거룩케 하시는 주 예수님과 거룩케 함을 받고 있는 그분의 많은 형제들(롬8:29)이 다 한 근원인 아버지에게서 난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오늘은 너무 많은 것들을 다룬 것같아서 이 주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네요.

  -긴 시간 제 질문에 대해 성의있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대화가 서로 간에 알게 모르게 쌓였던 오해를 해소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저도 이런 진지한 대화가 매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계속 교제를 이어 갔으면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15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4)-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시라구요?

-지방 교회들 서적들을 보거나 거기 사람들을 만나 보면 '생명주는 영'이라는 말을 많이 하던데, 성경에 있는 말인가요? 


, 당연히 성경에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에 보면,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요? 개역성경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가만 있자, 고전 15장이라고 했지요? 45절이고..."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되어 있는데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은 영어로 'living soul' 이니까 '산 혼' 이 맞구요, '살려주는 영'도 'life- giving Spirit ' 이니까 '생명 주는 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회복 역 말고 권위 있는 영어 성경 중에 'life-giving Spirit'이라고 번역한 것이 있는지요?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그대로 직역한 핸드릭슨사의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Jay P. Green 번역)도 'a life-giving Spirit' 이라고 되어 있구요(932쪽), 참고로 NIV 도 'life-giving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주는 영'은 한 마디로 누구입니까? 성령님이신가요? 

 생명주는 영은 한 마디로 '부활 후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후 예수님을 성령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삼위는 본체적으로 영원토록 구별되심으로 부활했다고 해서 2격이 3격이 될 수는 없겠지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바울은 '부활 전 예수님'이 '부활 후 예수님'이 되셨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의하시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방면에서는 부활 전 이건 후이건 전혀 차이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부활 전 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주로 그분의 사람 방면에서 그렇습니다. 즉 그분의 인성은 부활 후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으로 변형되신 것입니다(고전 15:44, 빌3:21). 
 더 쉽게 말한다면, 부활 후 그분의 인성은 보이다가 갑자기 안 보이는 분(눅24:31), 문이 다 닫혀 있었는데도 불쑥 들어오실 수 있는 분(요20:26)이 되신 것입니다. 

  -그거야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요? 구태여 강조하여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한 분이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 즉 생명주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고전 6:17은 '주님과 연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영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한 주님은 바로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와 연합되신 <부활하신 예수님> 즉 '생명주는 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성령이 내 안에 사신다고 하지 않고)라고 말할 수 있었지요. 

  -성령님이 주 예수님을 '대리'해서 우리 안에 계시니까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배웠는데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 하늘에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 사람 안에는 성령만 계시게 하는 신학구조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저 하늘에서 중보 기도하실 뿐 아니라(롬8:34) 동시에 생명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심(롬8:10, 골3:4, 1:27, 갈2:20)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양면 모두를 믿는 것이 더 균형잡힌 믿음이겠지요. 

  -'그영'과 '생명주는 영'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우선 요7:39은 그 당시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 여기서의 '그영'은 '영원 전부터 계시는 성령님'과는 구별된 개념입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말하는 '그영'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신 시기인 부활을 깃점으로 그후에 존재하셨다는 점에서 고전 15장 45절의 '생명주는 영'과 동의어로 볼수 있습니다. 

  -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안 계신 것이라기 보다는 믿는 이들 안에 (저희에게)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닌가요? 

언뜻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의 '저희에게' (영어성경의 givin)는 원문에는 없고 후대에 임의로 써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이탤릭체로 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헬라어 원문 그대로 읽으면 'the Spirit was not yet, 이고 그 이유는 'because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입니다. 즉 그영 자체가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시기인 부활 전까지는 안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생명주는 영 즉 아들하나님과 그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아버지와 성령님 그리고 아들이 성육신 때 입으셨던 인성까지 영화되어 포함된 그영이 예수님 부활 이후에 비로소 계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고전 15:45 말고 그런 그영을 말하는 구절이 또 있나요? 한 곳만 말해 줄수 있나요? 

계시록 22장 17절입니다. 개역성경은 '성령과 신부'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the Spirit and the bride'입니다. 
우선 여기서 언급된 영은 'the Holy Spirit' 즉 성령이 아니라 the Sprit 즉'그영'입니다. 전후 문맥을 보더라도 그렇고 신부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아도 여기서의 '그영'은 신랑이신 어린양 즉 부활하신 주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영은 다만 주 예수님 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님이 존재론적으로 상호내주 하시는 아들 하나님 그러니까 삼일 하나님 전체이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는 어느 한 위격을 말할 때는 다른 두 위격이 늘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세 위격은 구별되나 분리되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지방)교회 측에서는 주님을 성령님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할 때는 우리도 똑같이 성경을 따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후 3:17은 '주는 영이시니' 라고 말합니다. 명망있는 신학자인 헨리 알포드는 앞의 '주'는 그리스도를, 뒤의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the Lord,' as here spoken of, 'Christ', 'is the Spirit' is identical with the Holy Sprit: not personally nor essentially)(Alford's Greek Testament, 648쪽)

그런데 이것은 본체론적으로 주님이 성령이라는 말이 아니지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본 기능에 있어서 주님은 성령과 동일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국내에서는 양태론으로 오해를 했지만, 합동 신학원의 박형용 박사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개핀 교수는 경륜적인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 위 본문은 주님= 성령을 말한다고 제대로 가르칩니다(차영배,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49쪽). 


  -대화를 할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 그렇지요.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바로 아는 비결은 어떤 신학체계 안에 본문 말씀을 담으려 하지 말고, 그냥 성경 말씀 그대로를 다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전15:45, 요7:39, 고전6:17, 골1:27, 3:4, 요일 5:11-12, 고후3:17 그리고 골 2:9, 요14:10-11, 롬8:34, 10 같은 말씀들이 그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위 본문들을 차분히 묵상하면서 주님께 빛 비춰 주시기를 간구하면 주님이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깊은 진리는 머리로 알기 이전에 주님이 우리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튼 질문들에 대해서 성의있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더 교제하기로 하지요.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14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3) - 성령보다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한다면서요?

- 지방교회 측이 믿는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누구십니까? 


 지방교회측 성도들이 믿는 그리스도라 음...한 마디로 말자면,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사람' 즉 하나님-사람 (God-man)이십니다. 

  -그쪽에서 나온 책에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근거가 있나요? 꼭 이런 식으로 복잡한 표현들을 써야 하는지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The All Inclusive Christ)라는 말은 사실은 책 제목입니다. 신명기 8장의 단 몇 구절 내용을 가지고 책 한 권을 쓴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그리스도로 보고, 그 땅의 젖과 꿀을 포함한 다양한 소산물들은 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본 것입니다. 신약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라고 한 골로새서 3장 11절, 그리고...골로새서2장 16-17절의 '먹는 것, 마시는 것, ....안식일 등은 다 그림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도 근거 구절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그리스도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체이시다' 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귀측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론이 있나요? (지방)교회 측은 체계적인 신학이 없다고 많이들 알고 있던데... 

저희도 '그리스도'(위트니스 리, 한국 복음서원)라는 단행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언급한 거의 모든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아 내어 그 본문의 의미들을 해설한 것이지요. 약 700 여 쪽 되는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목차를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역사'(work)를 두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라 함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주시다 뭐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구주'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이 그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골2:2).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도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계4:5). '교회의 머리'(골1:18), '처음과 마지막'(계2:8)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친히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계22:13), 또는(나는...이다' (I Am, ego imi)라고 소개한 적도 있으십니다(요8:24). 이런 모든 명칭들의 성경근거와 의미를 '그리스도'라는 위 책이 설명하고 있지요. 

  -아, 그래요. (지방)교회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것을 믿으시나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이런 구속의 역사는 물론 예수님의 성육신, 인생을 사심, 죽음, 부활, 승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 혼을 변화시킴, 몸을 변형되게 하심 등도 그분의 일하심의 내용이요 결과라고 믿습니다. 

  -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좀 물어보겠습니다. 보통 기성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많이 이야기 하고 성령 충만 받는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방교회 책으로 보거나 그쪽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성령보다는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하는 것 같던데요. 

 매우 관찰력이 뛰어나신 것같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같은 (지방)교회 주축 성경교사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 사역의 성취를 강조하다보니 그런 면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되심,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거처를 정하심, 그리스도의 충만인 교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우리의 낮은 몸도 변형됨.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됨 등의 신약의 핵심진리는 다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성령님의 역사를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개역성경이 '성령'이라고 번역한 구절들의 상당부분이 꼭 제 3격 성령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거나 또는 영이신 하나님 자신 또는 심지어 사람의 영(또는 연합된 영)을 가리키는 곳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주는 영'과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인가요? 이 점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것같던데요. 

예. 안 그래도 이 주제는 별도로 다루려고 생각합니다만 우선 생명주는 영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에 근거한 말이고요. 그 의미는 '마지막 아담'은 부활 전 예수님을,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부활 전 예수님, 부활 후 예수님이라구요? 예수님은 부활 전이든 후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아닌가요?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던가요? 

예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사람이시다 라고 서두에 말했던 것 생각나세요? 그분이 하나님이신 방면에서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이신 방면에서는 부활 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부활 후에는 문을 닫고 있어도 들어 가실 수 있고, 사람의 눈에 보이셨다가 갑자기 안 보이실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차이가 바로 마지막 아담과 생명주는 영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잠시 후 다시 뵙지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13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2)- 왜 하필 삼일 하나님이라고 하나요?

-지방교회 측 성도들과 달리 일반적으로는 삼위일체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잘 안 쓰고 '삼일 하나님' 또는 '삼일성'이라고 하는지요?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보통 영어권에서도 '삼위일체'(Trinity)와 '삼일하나님'(Triune God)이라는 말을 함께 쓰고 있어요. 즉 '삼일 하나님'이란 말을 (지방)교회들만 쓰는 표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혹시 미심쩍으시면 구글 검색 같은 곳에 'Triune God'을 한번 쳐넣어 보시면 바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제가 검색을 한 결과를 보여 드릴께요. 보세요. 우리 외에도 루터교단도 그런 표현을 쓰고 있고 그외에도 다양한 사람과 단체들이 그렇게 혼용해서 쓰고 있답니다.
http://www.google.co.kr/search?complete=1&hl=ko&q=triune+God&lr=&aq=f 

  -만일 삼위일체와 삼일 하나님 둘다 사용할 수 있다면, 왜 거기는 '삼일 하나님'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지요? 제게는 (지방)교회분들이 삼위일체라는 말보다는 삼일 하나님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잘 보셨습니다. 사실 둘 다 사용해도 큰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삼일( 라틴어로 셋-하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성경의 계시에 더 접근된 표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권위있는 신학자로 평가되는 이종성 박사는 삼위일체론(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답니다.
"한국교회와 일본교회는 Trinity를 삼위일체로 부른다. 그렇게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수 없으나 매우 모호하고 부적당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위'의 개념이나 '체'의 개념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학적 연구가 요청된다."(300쪽)

- 거기는 삼위일체를 '세 인격, 한 본질' (three persons, one nature)
로 요약해 온 정통 삼위일체의 정의에 동의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상 이단들과의 싸움을 통해 정립된 정통 삼위일체 교리들을 다 동일하게 믿고 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계 내에서 (지방)교회측의 삼위일체론이 자꾸 문제가 되는지요? 

 자꾸 문제가 된다기 보다는 어떤 한 목사님이 (지방)교회 삼위일체론에 대해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연구를 해서 발표하신 것이 인터넷 같은데서 반복해서 인용 소개되다 보니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큰 문제 없고요(풀러측 조직신학 교수님들이 3년간 연구한 결론), 오히려 삼위일체론에 대해 좀 더 깊이와 균형을 갖춘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지방)교회측이.... 

  - 죄송하지만 그런 말이 제겐 조금 도전적으로 들리는데요, 어떤 점이 (지방)교회측이 깊이 있고 균형있게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지요? 근거를 제시하실 수 있나요? 

그럼요. 근거없이 말하면 거짓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삼위일체론은 신학 대학원을 나온 분들도 설명이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핵심만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 삼위일체론 (또는 삼일 하나님)을 깊이 있고 균형있게 이해하려면 다음 요점들을 다 포함해야 합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인격들, 한 동일 본질을 가지신다. 2) 삼위는 각각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시고, 동시에 존재하신다. 3) 삼위는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시지는 않는다. 4) 삼위는 상호내재하신다(이것을 전문 신학용어로는 '페리코레시스' 라고도 함) 5) 삼위일체는 본질적인 삼위일체 방면과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

-그 쪽에서는 기성교회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삼신론' 또는 '삼신론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고 들었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요? 

 아, 예. 그것은 앞서 말한 그 목사님이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안 계신다' '하나님은 하나의 영이 아니라 세 영들이다.' 라는 주장하시는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잘못 말하면 꼬투리 잡히기 쉬워서 단정적인 표현은 가급적이면 조심하고 성경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부분만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은 성경 본문에 의해 반박 될 여지가 많은 주장이예요. 예를 들면,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요14:11) 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위 주장은 이런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을 '세 영들'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장로교 신학자분들도 다수 공감하시는 것같습니다. 한 마디로 삼신론은 '세 하나님들을 믿는다'는 의심을 받게 하는 주장들입니다. 마치 <사람이라는 동일본질을 가진 갑, 을, 병처럼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식>이지요. 이것도 <세 인격, 한 본질>이라는 조건은 충족시키거든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삼위가 구별은 되나 분리는 안 된다>는 조건을 어긴 이해입니다. 한국 교계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하는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위책, 269쪽).


-글쎄요. 저는 신학을 안해서 어떤 신학자가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오늘 귀한 교제 감사합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서로 복잡해 지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예. 그러지요. 사실 저도 이렇게 말은 해도 삼위일체 (삼일 하나님)는 늘 어려운 주제입니다. 특히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언급한 대목들 (마28:19, 고후13:13)은 대부분 우리의 체험과 관련이 깊은데 그런 분을 온전히 체험하여 아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설명드리는 과정에서 특정인이나 특정 대상을 비난하는 것처럼 혹시 비쳐졌기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저 사실에 근거한 설명을 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언급하게 된 것 뿐입니다. 다시 한번 이점 양해를 구합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12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에 소속된 분들은 일반 성도들이 잘 못들어 본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경륜'이란 말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뭡니까?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인데, 한국복음서원에서 펴낸 '하나님의 경륜'(위트니스 리)이란 책을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예, 기회가 되면 한번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거기서 오래 생활하셨으니, 나름대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한번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이해한 하나님의 경륜을 조금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경륜은 위트니스 리나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성경 용어입니다. 디모데 전서 1장 4절을 보면 나옵니다. 거기서 앞 뒤 다 빼고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란 말만 마음에 담아 두셨으면 합니다. 

  -제가 '경륜'이란 단어를 검색에 쳐 보았더니 일곱명이 하는 자전거 경주 이야기가 나오던데,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거구요. 아, 저 사람은 얼굴에서 경륜(연륜)이 느껴져 라는 식으로 일이나 조직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예, 저도 호기심으로 경륜이라는 단어를 검색에 쳐 본적이 있는데, 진짜 '창원경륜공단' '한국 경륜선수위원회' 이런 단어들이 뜨더라구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두 방면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 단어 원문의 의미를 푸는 방식이구요, 또 하나는 그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쓰인 내용들을 몇 단어로 압축해서 요악하는 식입니다. 우선 '경륜'이란 말은 위 디모데 전서 1장 4절 말고도 엡1:10, 3:2, 9, 골1:25, 고전9:17 등에서도 쓰였어요. 헬라어 원문은 '오이코 노미아'입니다. 이것은 '집'의 의미인 '오이코스'와 '관리'의 의미인 '노모스'의 합성어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집 관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따라 말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주님자신', '분배' '표현' 이 세 단어로 압축해서 정의할 수 있어요. 

  -주님 자신을 분배해요? 아무리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으려고 해도 '분배'라는 말은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실 겁니다. 사실은 저도 처음에 그랬거든요. 그래서 나름대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할 성경 구절들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위 고전 9:17을 보시면 개역성경으로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오이코노미아'인데, 이것을 KJV은 'dispensation' 이라고 번역했어요. 그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찾아보시면 첫 의미가 바로 '분배' 또는 '나누어 줌' 입니다. 

 즉 바울이 위 구절에서 '직'을 맡았다고 했는데, 무슨 직분인가 하면 쉽게 말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생명으로 나누어주는(소개하는) 직분입니다. 그런 직분을 통해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믿고 영접하게 되는 소위 복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조금 인위적으로 느껴지시면 좀더 설득력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요한복음 10장 10절 후반절이예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양들인 우리 편에서는 생명을 얻고 또 얻는 것이지만, 생명을 주시는 그분 편에서 보면 생명을 주고 또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명을 분배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분배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지요. 그런데 생명이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에 근거해 보면 주님자신이 생명입니다. 

 이처럼 '주님자신' '분배'가 이뤄질 때 나타난 결과가 바로 '표현'입니다. 사람 안에 생명이 처음 분배된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계속 분배되는 생명을 그 거듭난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라서 성숙하게 합니다. 이런 거듭난 사람들, 생명이 성숙한 사람들은 불신자와는 다른 어떤 예수 믿는 냄새가 납니다. 얼굴에서 그들의 말에서 생각하는 관점에서...그것이 표현입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주님자신이 우리를 통해 안으로부터 충만히 표현되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엡1:23)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계21:11). 

 질문은 짧은데 어찌하다보니 제 답이 너무 길어것 같아 죄송하네요. 

  -예, 나름대로 성경을 토대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계시구나 하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내용들이 다 이해가 된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번 찬찬히 검토해 보고 추가 질문이 있으면 나중에 또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참고로 시간이 나시면 엡1:4-5, 3:2-6, 골1:24-29 등도 함께 연구해 보시면 제가 오늘 설명드린 내용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좋은 시간 가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럼 나중에 또 뵙지요. 안녕히 가세요.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03 13:35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 6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저기요. 제 친구 한명이 지방교회를 다닙니다. 한번은 그 친구와 함께 지방교회 나가는 분들과 식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한 사람만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하더라구요. 좀 생소했지만, 그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안 붙이는 것은 왜 그래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안 한다니요? 성경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나요? 
아 예, 기계적으로 하지 않고 융통성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안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만 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영의 인도를 따라서 융통성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 성경구절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전후문맥을 잘 보면 기도할 때 항상 그런 말을 끝에 붙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통교단에 속한 곳은 거의 다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지 않나요? 가능하면 이질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같은데요.
 맞습니다. 저희도 핵심진리에 반하거나 죄 짓는 실행만 아니라면 덕이 되는 쪽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성경 문맥의 의도와 다르게 실행할 경우, 적극 동조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더군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이는 것이 해당 성경 문맥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는 취지의 말씀은 요한복음14:13-14, 15:16, 16:23-24 에 있습니다. 이 본문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요, 우선 기도시 맨 끝에 그런 ‘후렴구’를 꼭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글에 검색을 해 보니 의견이 나뉘더군요. 어떤 분은 그렇게 안하면 기도에 효력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 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꼭 기도할 때마다 그 ‘후렴구’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융통성을 두는 쪽도 있었습니다.

-정통교회 나가는 분들 중에 꼭 안 붙여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예, 두 가지 예를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한 분은 고신대 대학원 교수로 계신 변종길 교수님입니다. 이 분이 <크리스챤 Q&A >라는 곳에서 답변하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칼빈의 기도에 보면 이런 문장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http://www.christianqna.org/bbs/board.php?bo_table=z3_3&wr_id=829
다음은 이광호 목사님 답변 중 일부인용 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그런 후렴구로 마무리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후렴구를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거나 도용하는 것이 되며,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http://www.siloam-church.org/lecture/sesin/sesin195.htm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도 끝에 그런 후렴구를 붙이는 것만 듣고 자라와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줄 알았지 솔직히 이 문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정통 교회 신학자가 심지어 칼빈 기도문에도 그런 후렴구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렇게 안 하면 이단 뭐 이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사실 성경에 쓰여진 기도문들에도 그런 후렴구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주기도문도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마6장). 그리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심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는 심지어 ‘아멘’도 없습니다(24-30절). 또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에베소서에서 두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장의 기도(17-19절)나 3장의 기도(14-21절)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없이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

- 그런데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라고 하는 목사님도 있더라구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라면 위에서 소개드린 성경본문들도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할 때, 누구를 생각하나요? 삼위의 1격만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레인 뵈트너라고요 개혁신학을 공부한 분들은 다 아는 정통 신학자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성부만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성자, 성령이 포함된 <삼일 하나님>(Triune God) 전체를 가리킨다 고 말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니까 이 분이 한 말의 영어원문을 직접 소개해 보겠습니다.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07쪽)
사실은 이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셋으로 구별되시지만 결코 분리된 분이 아니니까요. 한국교계 내에는 무의식중에 세 하나님들을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뭐 삼위일체도 나오고 좀 복잡하게 되돌아가는 것같아 좀 그렇긴한데…좀 정리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를 꼭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이 의미하는 내용이 기도에 담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뭐 이런 것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면 ‘내 이름 안에서’라는 문맥이 뭘 의미하나요?
 우선 요14:13절만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또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내 이름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한데, 이 말은 ‘주님의 인격(이름)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18:20의 ‘두세사람이 네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위 ‘이름 안에(안으로)’에 대한 회복역 성경 각주 취지는 집회에 올 때는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문제들과 일들에서” (나와서) “그분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상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해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생각은 다른 것에 빠져있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모임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위 요14:13만 봐도 나의 필요, 나의 선호와 갈망을 이것 저것 구한 후 끝에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째 “다 이뤄 지지도 않고”, 둘째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지도 않음”으로 위 본문에 따른 기도가 아닙니다. 대신에 주님의 뜻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의 인격과 연합되어 마치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직접 기도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도 되고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기도를 하려면 쉽지는 않겠네요. 예수님과 하나되는 상태라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맞춰 기도하라는 말씀이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저희의 기도생활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늘 배우고 있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네요. 나중에 위에서 소개해 주신 본문들을 좀 차분히 살펴볼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사실 후렴구를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진리 자체는 깊은 연합을 전제한 것이라 신약의 핵심진리에 해당될 수 있지요. 사실 요한복음 14-16장은 그런 연합사상을 담고 있어서 겉보기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도 사실 이런 교제가 쉽지 않은데, 무익한 변론으로 빠지지 않고 좋은 대화로 마무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