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9. 01:35

지방교회에 대하여 

이 글은 '지방교회'라는 것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나누고 싶어 쓴 글입니다. 저는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회에 한번도 가본 일이 없고 그들을 만난 적도 없으나, 책을 통해서 알게된 저의 지식과 생각을 자유롭게 써 보았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지방교회는 어떤 분파나 교단이 아닙니다. 지방교회는 말 그대로 각 지방의 교회를 대표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이들 역시 어떤 교파나 분파가 아닌 지방적 합일의 위치에 서 있는 형제들일 뿐입니다. 최소한 워치만 니가 처음 의도한 바는 그랬습니다.

지방교회를 잘 이해하려면 교회의 분열과 성직계급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히 피상적이고 빈약한 교회사 지식과 성경지식을 가지고 쓴 글이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오늘날 교회의 분열과 성직계급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본 분열과 성직계급 3. 합일을 위한 노력들, 지방교회 4. 지방교회에 대한 요약된 이해 및 개인적 의견 5. 지방교회에 대한 몇가지 의문점

1. 오늘날 교회의 분열과 성직계급

현대의 기독교를 볼 때 우리는 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분열 문제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등의 말, 즉 교회 내에서의 분열을 인정하는 말을 철저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볼 때, 바울은 교회 내의 분열에 대해 몹시 근심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런 것(말)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나는 장로교회에 속했다.', '나는 감리교회에 속했다.', '나는 오순절교회에 속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분열은 주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장로교회를 세우신 적도 없고, 감리교회를 세우신 적도 없으며, 오순절교회를 세우신 적도 없습니다. 그분은 다만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을 뿐입니다.

물론 사도시대에도 여러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 사도시대의 교회들은 명백히 지방적 합일의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열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지방적 경계 외에는 아무 것도 그들을 나누는 기준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에베소교회는 있지만, 바울교회, 게바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는 없는 이유입니다. '할례당'은 있지만 할례교회는 없는 이유입니다. 아주 분명히도, 성경에는 지방교회 이외의 교회는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된 것 - 교회가 여러 교파로 분열된 것 - 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열 즉 당짓는 일이 죄이며 육에 속한 일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는 엄밀히 따져서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돌을 오늘부터 밥이라고 부르자고 밥이 되지 않는 것처럼, 간판만 세우고 '교회'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초신자가 '교회를 선택'할 때도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자, '그'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어떤 교회를 가야 할까요? 기독교 월간지를 보면 '교회'의 선전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제단, 말씀의 제단, XX동에 우뚝 솟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제단 등등... 마치 상품 광고처럼 교회를 선전합니다. 도대체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할까요? 그를 전도한 사람은 이미 '가까운 교회를 찾으십시오'라는 조언만 남기고 먼 곳에 있는 자기의 '교회'로 떠나버렸습니다. 수많은 교파와 수많은 '개교회'가 진열장 위의 상품들처럼 널려있습니다. 방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방언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오순절교회를 만들었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의 사실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침례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구미에 맞춰서 선택하라고 해야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의 또다른 문제는 성직계급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중세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교리적으로는 만민이 제사장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학교라는 곳을 나와 정규 코스를 밟은 한 사람'(담임목사)을 중심으로 모든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역과 간증에 있어서 많은 제한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영적 계급이 엄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다릅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그러한 계급이 없으며, 다만 모든 형제들이 받은 은사대로 섬겨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본 분열과 성직계급

성경에 기록된 교회 최초의 분열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분열인 것 같습니다(물론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논외로 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책망(고전 1:11-16, 3:3-5 고후 12:20) 했습니다.

사도시대 직후부터 A.D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할 때까지 교회는 엄청난 박해를 당했습니다. 서머나교회(계시록에 나오는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이 시대에 순교한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불에 타 순교했으며, 순교하기 전에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가 불에 타는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교회사 책을 보면 그의 순교 이야기가 나오는데,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간증하는 것이 큰 감동을 줍니다. 그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처참한 방법으로 순교하면서도 믿음의 정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놀라움 중의 하나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핍박 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을 교회가 다시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그리스도교가 국교화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세상과 영적 간음을 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없는 성직 계급이 언제부터 교회에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직자들은 국가에서 연금을 받기 시작했고, 세례를 받으면 흰옷 두벌과 몇냥 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이게 되었습니다. 또 교회에는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한과 유산을 상속할 권한도 부여되었습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해서, 중세의 기독교(오늘날의 카톨릭)는 거의 이교집단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일부 성직 계급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고,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거나 번역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고등학교 때 '바비도'라는 소설을 배우셨지요?) 성직자들의 타락은 극에 달했으며 교회의 중요한 진리들도 대부분 가리워져 루터가 95개조항을 발표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의 초보적 진리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믿음으로 구원받음'의 진리를 발견한 이후 교회가 강하게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분열은 이 때부터 시작됩니다. 당시의 카톨릭 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루터가 카톨릭교 안에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고, 재침례파 등 수많은 분파들이 이 때부터 생겨나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부흥과 회복의 역사를 계속 행하셨습니다. 많은 진리들이 회복되었고, 곳곳에서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웨슬리 형제, 존 낙스, 진젠돌프 백작과 모라비안 형제들, 찰스 피니, 조나단 에드워드, 다비와 형제운동, 케스윅 총회, 펜 루이스, 이반 로버츠와 웨일즈의 대부흥, LA 아주사가의 한 흑인의 체험에서부터 시작된 오순절 운동,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과 부흥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말하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역사적 순서가 좀 틀려도 양해 바랍니다.)

3. 합일을 위한 노력들, 지방교회

이 중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달리 분열되어 있음을 보고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고자 한 최초의 시도는 167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듯 합니다. 이들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교파를 떠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고 각처에서 그들의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진젠돌프가 자신의 모라비안 교회에 이런 운동을 수용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19세기 초, 성직계급과 종파조직이 성경에 없는 것임을 발견한 형제들이 아일랜드와 더블린에서 자신의 교파를 떠나 집회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조직과 사람이 아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J. N. 다비, 윌리엄 캘리, 맥킨토쉬(모세오경의 저자), 뉴톤, 벨렛, 죠지 뮬러, 죠지 커팅, 찰스 스탠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졌습니다. 이들은 한동안 주님께 크게 쓰임 받았고 막대한 영적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십년 후, 놀랍게도 이들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각 모임의 일치된 행동을 주장하고, 어떤 형제들은 각 모임마다 독립적인 행정을 주장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워치만 니라는 젊은이가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강력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15여년간의 그의 사역을 통해 적어도 7만여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중국과 동남아 각지에 600여개의 지방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생명의 말씀사와 한국복음서원에서 번역된 수많은 책들로 인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 한 지방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하나의 예배당이 아닌 하나의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성경대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형제운동의 중요한 과오가 바로 지방의 범위를 명백히 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각 모임의 일치된 행동을 주장한 형제들은 지방의 범위를 넘어서 연합회적인 과오에 빠졌고, 각 모임의 독립을 주장한 형제들은 지방의 범위에 이르지 못하여 한 지방에 여러개의 교회를 만드는 과오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대로 한 지방(시, 읍, 면 등 사람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사는 곳)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 하나의 행정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어떤 교파나 혹은 국가에 속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교회 안에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계급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점에 있어서는 형제운동과 견해를 같이했습니다. 그는 문화 혁명 때 투옥되었으며,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교회의 길』, 『교회의 정통』(한국복음서원) 등의 책을 읽어보면 교회에 대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 지방교회에 대한 요약된 이해 및 개인적 의견

글의 첫 부분에서 밝힌대로 지방교회는 어떤 교파나 분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뉠 수 없고, 지방 외에는 어떤 것도 교회를 세우는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에 대한 '그들'의 주장입니다. 바울조차도 지방교회 이외의 교회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교회를 세우는 입장이 되기에는 불충분했습니다. 오늘날은 창시자가 루터냐 웨슬레냐, 침례를 받느냐 약세를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느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느냐 등의 수많은 이유로 교파가 갈리워지지만, 성경은 지방 이외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어떤 입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방교회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가르침도 아니고, 특별한 가르침도 아닙니다. 더구나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개교회' - 성경에 없는 말이지만 - 의 유일한 유형(The one and only type of each church 영어가 맞는지 모르겠군요?)일 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어볼 때, 사람의 전통과 권위 - 교황과 카톨릭 - 를 떠나 성경으로 돌아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단'이라는 것이 우리의 교황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은 영적인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다고 해도 반대해야 합니다. 종파는 참 편리합니다. 열광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순절교회로 가면 되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싫은 사람이라면 구세군이나 퀘이커 같은 교단을 찾아가면 됩니다. 자기 구미에 맞춰서 선택할 수 있고, 만나고 싶은 형제들끼리 모이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이야기한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교회가 '몸은 하나'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심하게 찢어져 있음을 겸손히 자인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해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5. 지방 교회에 대한 몇가지 의문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분명히 옳으며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역시 몇가지 의문점은 남습니다.

첫째로 '합일을 한답시고 또다른 분열을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성경은 한자도 빼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방을 교회의 경계로 정하셨으면 인간이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방의 경계가 분열을 막는 성경의 방법이라면, 성경대로 해야지요. 성경대로 하는 사람이 적을지라도 말입니다.

둘째로 '기존 교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천히 교파간의 영적 교제 등으로 하나가 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말입니다. 교파가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겠지만, 잘못된 것이면 헐어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현대의 성직계급인 목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워치만 니는 이런 '영적 합일'을 '담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있어서 미지근하면서, 미지근하지 않은 축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째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교파 안이냐 밖이냐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견해입니다. 사실 워치만 니도 하나님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침례, 방언, 성결, 종파를 떠나는 것 등을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런 부수적인 진리들도 다 합당한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 점에 대해 전혀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다 중요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성령의 권위가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사실 '지방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실제가 있고 없고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그들 -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이들 - 의 의견이 아무리 옳고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성령의 권위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 자신들을 하나의 또다른 종파로 만들어버렸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함과 풍성함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어떤 영적으로 뛰어난 개인 -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 의 견해를 성경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들은 이미 또다른 하나의 종파로 자신들을 변질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저는 그들의 집회에 참석해 본 적도 없고 그들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이만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지방교회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지방적 합일의 입장에서 모이고 있는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 그런 분이 계시면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의 교회가 나아갈 길을 밝히 제시할 수 있는 선지자적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 눈의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출처 : 한국 인터넷 신학대학

* 참고가 될까 해서 아래 글을 발췌해 올려 드립니다.

('교회의 표현은 모든 지방에서 하나임' 중에서...)

우리는 교회가 이 땅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지방에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교회의 각각의 표현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하나여야 한다. 우리는 나뉘어질 이유가 없다.

만일 우리가 런던에 간다면 거기에 한 교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만난다. 우리는 거기서 그들에게 어떤 류의 교회가 있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류의 달이 있는지 물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달은 다만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다만 하나의 교회가 있다. 내가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나는 그곳에 있는 교회와 만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뉴욕, 샌프란시스코, 도쿄, 홍콩에 갔을 때, 나는 그곳에 있는 교회와 만났다.

우리가 나누어질 이유가 없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들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는 단순하게 교회와 만난다. 이것이 주님이 정하신 합당한 길이다.

하나님은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교회가 표현되어지도록 정하셨다. 한 지방에서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 중 몇은 주님의 구원에 의해 분별될 것이다. 그리고 이 분별된 사람들은 그 지역 사회, 그 지방에서 교회의 표현으로서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 땅 위에 지방들에서 표현된다. 교회의 표현이 있는 곳에, 그 표현은 하나이어야 한다. 단순해지자. 기독교 안에 있는 혼돈으로 복잡해지지 말라. 사람들에게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고 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라면,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나는 교회에 속하고 당신도 교회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교회에 속한다.

삼십 이년 전, 우리가 상해에 있을 때였다. 서너명의 형제들이 그들의 손에 성경을 든 채 집회에 가기 위해서 시내버스를 탔다. 그 차에서 승객들에게 팜플렛을 뿌리고 있던 또다른 믿는이가 그들에게 왔는데 그는 그들이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형제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어느 교회에 속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서너명의 형제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될 지 의아해 했다. 그런 다음 그들 중 가장 연장한 형제 하나가 『우리는 당신과 바울과 베드로와 마르틴 루터와 모든 성도들이 속한 교회에 속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팜플렛을 가진 그 형제는 이것을 생각해 본 다음 『그것 참 굉장하군요.』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그것은 굉장하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교회에 속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영광스럽지 않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한 교회의 일반적인 지체들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위트니스 리 [교회 생활의 실행을 위한 기본 원칙, p. 34-35,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