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서 트몰루스 산 북쪽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 사데에 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클레멘트가 이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고, 2세기경 감독은 멜리톤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데 교회에 대해,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 죽어 있고”, “너의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넬슨 다비는 (Bible Truth Publishers)에서 이 사데 교회가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훗날 개신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빛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죽어 있는 상태”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지를 알고자 그분을 앙망했습니다. 이 영적 사망의 문제는 꼭 사데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믿는이들 모두가 현재 매 순간 직면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마16:18).
사데에 있는 교회의 전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다(계 3:1).
이 ‘죽음’(사망)을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묵상해 볼 때, 한국어는 다 같은 죽음이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다른 유형의 죽음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이 사망의 문제에 대해서 온전히 빛 비춤 받게 하옵소서!
1) 불신자와 죽음: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하자, 주님은 그에게, “죽은 사람이 자기네의 죽은 사람을 장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통상적인 죽음의 의미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가 영적으로는 물론 육적으로도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지상 사역 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불신자는 주님 보시기에 죽은 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전파는 단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만이 아니라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내용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 되심까지 포함해야 합니다(롬 5:10).
2) 믿는이와 소극적인 의미의 죽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부름받은 성도가 된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낸 로마서에서 이미 성도가 되었어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즉 그는 로마서 8장에서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6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도 그들의 혼의 일부인 생각을 육체의 일들에 둘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여전히 영적으로 사망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데 교회가 처한 죽음은 이와 같은 상태의 죽음에 해당합니다.
3) 믿는이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죽음 : 아래 성경 말씀은 믿는 이들이 이미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은 위 사례와 달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매우 적극적인 죽음이고 이미 성취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초보적인 교훈에서 떠났다.”(골 2:20),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그 가운데 살 수 있겠습니까?”(롬 6:2),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4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도 믿습니다”(8절),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 여기십시오”(11절),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 3:3).
4) 믿는이가 자신을 능동적으로 죽음에 넘김: 성경은 또한 우리가 위에서처럼 주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믿고, 그러한 영적 사실을 삶 속에 능동적으로 적용하라고 아래와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여러분의 육체의 각 부분을 죽음에 넘기십시오. 곧 음행과 부정과 나쁜 정욕과 악한 욕정, 그리고 탐욕입니다”(골 3:5).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위와 같은 죽음 관련 성경 본문들을 묵상해 볼 때, 사데 교회가 죽어 있다는 말씀은 1) 번 즉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죽음(영적, 육적)과는 무관하지만, 그들이 3) 번과 4) 번의 죽음의 실재를 놓친 결과, 2) 번에 해당하는 영적인 죽음 안에 빠져 있다는 점이 말씀을 통해 명쾌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이러한 영적 사망(죽음)을 이길 수 있을 것인지를 주님께 간절히 구할 때 다음 두 가지가 마음 안에 깊이 남게 되었습니다.
첫째,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옛 존재 안에는 없습니다. 오직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는 … 살아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그분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자신과 깊이 연합할 때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 해석과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지만,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요 5:39-40)는 주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영적으로 사는 가장 쉬운 길은 그분 자신을 말씀으로 ‘먹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각종 떡으로 계시하신 후에,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57절).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이 구절의 ‘먹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이 유기적으로 우리 몸 안에 흡수되도록,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