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30. 00:00


진리의 변호와 확증(7)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2.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이것은 분명한 성경 말씀이다. 


3.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미국 표준역)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이 누구인가?

예수이다.

생명 주는 영은 누구인가?

성령이다.

성령 외에는 생명을 주는 다른 영이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가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주 예수님이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계시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주 예수는 아버지요 아들이요 영이며, 참 하나님이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4. 주(아들)는 영이시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主)는 누구인가?

의심할 바 없이 예수이다.

영은 누구인가?

물론 성령이다.

여기의 주는 예수이고, 영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를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것이다!

앤드류 머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영’ 2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는 생명 안으로 높여지셨을 때 <주 성령>이 되셨다... 제자들은 예수를 안 지 오래 되었지만, 그를 주 성령으로 알지는 못했다... 주님을 주 성령으로 전파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으로만 전하는 열성적인 복음 전파가 많은 듯하다... 그리스도를 주 성령으로 알고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믿는이들을 그의 형상 안으로 변화시키고 교회 안에 살게 할 때, 믿는이들 가운데 있는 그러한 사역은 생명과 능력의 사역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사역이야말고 참으로 그 영의 사역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지 세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어떤이들은 심지어 분명하게 그렇게 말한다.

또 다른이들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잠재의식 속에서는 이러한 관념을 붙들고 있다.

아마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이들도 과거에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죄받는 것이 두려워서 말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시며 주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설교자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몇 분의 하나님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세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했다.

그와 같은 말을 절대로 이단적이다.

성경의 계시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이러한 통제하는 원칙이 없이 수세기 전에 사람들은 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격의 세 인격에 대한 말로 ‘위격들(person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세 위격들은 지나치게 강조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전통적인 용어들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말하며, 또한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삼이일(三而一)이심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별개의 세 ‘인격들’로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에 어긋나는 것이다.

로마서 강해로 유명한 그리피스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위격>이라는 용어 또한 종종 논박을 받는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이 용어도 부적절하다는, 심지어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본질>이나 <위격> 같은 용어들을 사용해야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사람의 본질이나 인격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와 체험은 신학적인 용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신학의 원칙)에서


진리의 변호와 확증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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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23. 00:00

무엇이 한국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일까?-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위격문제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성경 기록에는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1:14 에서 보듯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왜소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의 처녀탄생(마1:18-21) 역시 과학이나 인간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일 누구든지 어떤 연유에서건 이러한 성경적인 사실을 부인하면 그는 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나 믿음으로 받아야 할 진리 중에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 하심(신비한 연합)>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거듭남)과 연속(생명의 성숙)에 관련되고, 특히 구원론과 관련된 <핵심 진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진리를 성경본문과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을 우리는 비 성경적임 또는 이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개혁 신학계에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는 두 신학자가 이 주제에 대해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과연 한국 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즉 현 성경신학 대학원 원장인 차영배 박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만 사람 안에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권성수 박사는 요14:23 을 인용하며 <사람 안에는 성령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도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안에 성령님만 계시는지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계시는지에 대해서 두 신학자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두 분 다 현재 장로교단 소속 유력한 신학교에서 장차 목회자가 될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비중 있는 신학자들이다. 

따라서 한국 개혁신학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들은 이 두 분 중 과연 누구의 주장이 자신들의 신학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입장 정리가 시급히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권성수 박사의 주장 -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님은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학 및 성경 해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총신대 목회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그의 저서 중 도서출판 횃불이 발간한 <로마서 강해(로마서 1-8장)> (1996년)

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그리고 10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것을 하나님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4: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를 말하는 것이고 성부와 성자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쓰는 문맥은 14: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희는 너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하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405쪽). "10-11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부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자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거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신비적인 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406쪽)
(인용 끝).
 

위 내용에서 권성수 교수는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 또는 '내가 아버지께' 등 삼위의 1격과 2격을 지칭하는 요14:23, 요14:16 본문을 인용함으로, 1격인 성부와 2격인 성자가 3격인 성령과 함께 사람 안에 거하심을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는 위 인용문 바로 직전에서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거하심은 <그냥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고 아주 사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필요할 때만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인 거듭난 성도들 안에 현재 살고 계신다.

2. 차영배 박사 주장 - <성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차영배 박사님은 고려신학교, 화란 Kampen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총신대학 학장을 거쳐 현재 성경신학 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월간 교회와 신앙(발행인: 최삼경) 2001년 10월 호에 실린 창간 8주년 기념 삼위일체특집에 기고한 차영배 박사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 되신 분이다" 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주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內住하시는 분은 주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주 예수는 우리 안에서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받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122쪽). "

2-7. 성부와 성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심:... 영(靈)은 우리 안에 내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모두 같은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은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임재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17~22)."(124쪽). "

<<성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124쪽)(인용끝).  

위 내용에서 차영배 박사는 출애굽기 19장을 근거로 성부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사람은 죽어버린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성부는 사람 안에 구조적으로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자도 우리 안에 오실 필요도 없고, 올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의 피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출애굽기 19장의 바로 그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말씀(11절), 고린도 후서 5:19의 '하나님(성부)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God was in Christ)라는 말씀, 골1:27의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 갈2:20의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들과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위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위의 1격과 2격을 3격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면이 있고, 사람의 생명되신 아들 하나님(요일5:12)을 <사람 밖에 묶어두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이제 국내의 두 분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 간의 이러한 두 가지 대조적인 주장들에 대해 한국개혁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 개혁신학계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처럼 성부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가 아니면 권성수 박사의 주장처럼 요14:23등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그분의 성전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믿는가?   

2. 만일 권성수 교수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삼위 중 1, 2격을 3격과 분리시키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신론 이단 사상이 아닌가?  

3.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1)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내주를 말씀하고 있는 골1:27, 롬8:10, 고후13:5, 갈2:20, 4:19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대로 성령이 내주한 것이 그리스도가 내주한 것이라면 성경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즉 제 3격인 성령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통상적인 이해처럼 제 2격 아들 하나님 만이 그리스도인가? 

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요일5:12에 근거하여 사람 안에 아들은 없고 성령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명 없는 자들>로 판단해도 좋은가? 아니면 성령이 곧 아들 하나님이라고 할 것인가? 

3)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고후 13:5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안 계시고 성령만 계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버리운 자들>(아도키모스, 96b- 시험에 합격치 못한, 거절된(사람들))로 간주해도 좋은가? 

4) 만일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사람 밖의 저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임으로 이를 근거로 성령뿐 아니라 성부 성자가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사람 밖의 성부, 성자>와 <사람 안의 성부 성자>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우리는 두 종류의 성부, 성자를 믿는가? 

5) 차영배 박사의 아버지의 영은 아들의 영과 성령과는 다른 영이라는 주장은 삼위가 각기 다른 세 영들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신약과 개혁신학계의 정설인가 아니면 이설인가? 

6) 삼위중 1격과 2격을 사람 밖에 두고 3격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다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요14:11의 삼위간의 상호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는 요1:12에서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며, 영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영접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한국 개혁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책임 있는 답변은 한국 교계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을 한 차원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아울러 한국 장로교단의 공식 삼위일체관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 3자들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믿는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9. 05:00

신성한 삼일성 (또는 삼위 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계시는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 (인격) 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a living soul)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그 영 (the Spirit)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여기에서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그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성경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하고,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으므로 이제 영이시라고 불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임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해석들이 그 모든 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의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monarchia) 곧 유일성(unity)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영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그 영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2 나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1] 10-11쪽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되는데, 그 구절은 아버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한다. 또한 아들도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해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도 그분을 두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욱이 그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한다. 따라서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하시다… 요약하면,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7-38, 42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 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성경이 어떻게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 (相互內在) 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절, 23절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이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은 아버지의 운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삼일성 안에는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 상호 왕래 (inter­communion) 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 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장로훈련3권-이상을 실행하는 길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는 아들께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 (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우리는 삼일성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 확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신성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알기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 바랍니다.


[1]  본 고에서 인용된 LSM자료들의 대부분은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역자 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 05:00

삼위일체 토론은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

삼위일체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똑 부러지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를 조금 자세히 열거하자면, 첫째, 하나님 자신이 숨어 계십니다(사45:15). 둘째, 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골2:2). 셋째, 사도신경 등에서 보듯이 성령님 (the Holy Spirit)에 대한 교리나 신조 상의 언급은 극히 짧고, 그에 대한 신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의는 아직도 미 완성 단계라는 점을 들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종 교리집이나 이단 전문가들의 주장이나 이런 인터넷 상의 토론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도 꼭 토론이 필요하다면, 최소한 성경본문을 토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자기 한계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계시를 주사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가 요구됩니다(엡1:17, 마11:27). 

 이제 아래에서 스가랴 4장 10절과 계시록 5장 6절을 근거로 두 종류의 잘못된 삼위일체관을 바로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 본문들 

슥4:10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눈이라(the eyes of the Jehovah(AsV), the eyes of the LORD (KJV), the eyes of Jehovah(Darby)). 

 계5:6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2. 여호와의 증인들의 오류 

여호와의 증인들의 오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대신에 성령님을 하나의 능력으로 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은 아들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 요8:24 (예수님이 출3:14의 여호와 즉 ‘That I Am’(에고 에이미)이심). 2) 계1:8과 22:13-16의 비교(알파와 오메가=전능하신 하나님=예수). 3) 슥 4:10(여호와의 일곱 눈)과 계5:6 (어린양의 일곱 눈)의 비교를 통하여 충분히 예수님이 여호와이심이 입증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도 열심히 여호와를 증거합니다. 그러나 거짓되게 증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 삼신론의 오류

삼신론은 간단히 말해서 삼위(아버지, 아들, 성령님)를 ‘분리’시키는 이단 사상입니다. 양태론은 이와 반대로 삼위의 ‘구별’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위를 구별함에서 더 지나쳐 분리 독립시켜 생각하는 사실상의 삼신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종성, 삼위일체

그러나 칼빈이 존경하는 교부인 어거스틴은 그런 삼위 분리 사상과 달리 “(세) 위격이 상호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 269쪽) 또는 “하나님과 아들이 분할 할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분” 이라고 했습니다(위 책, 267쪽). 

 이런 삼위의 분리불가 원칙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삼신론적 표현들 중 하나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 하실 때 성부 하나님은 (저 하늘에만 계시고) 아들 안에 안 계셨다>는 주장입니다. 문제는 애석하게도 한국 교계에서 정통과 이단을 상담하는 책임을 맡은 현 한기총 이단 상담소장 자신조차도 이런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지상 사역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고 말씀하심으로 그런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합니다. 

  4. 성경적 삼위일체론-구별되나 분리는 안 되는 세 위격께서 한 신격과 한 본성을 공유함 

 삼위 하나님(Trinity 또는 Triune God)에 대한 성경기록은 양면적입니다.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삼위의 존재 자체를, 후자는 그 기능의 방면을 가리킵니다.  

존재론적(내재적)삼위일체(Immanent Trinity)는 영원 전에 하나님만 계실 때 어떤 존재 형태로 계셨는지를 정의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한 신격(one Godhead)과 한 본성 (one Nature)을 공유한 세 위격들(three Persons)이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지는 않으신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경륜적(경세적)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그러한 존재론적인 삼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사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로 만드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엡1:5), 그것을 성취 하시고, 또한 마침내 사람인 우리에게 그것을 적용 하시는 각 방면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두 방면을 함께 말함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까지도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깊게 안 만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래 인용 본문들은 성경적인 삼위일체를 균형있게 이해하는데 작은 힌트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요14:11). 

  -경륜적 삼위일체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 :16) 

(만일 위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침례 받기 전에는 성령님은 예수님 안에 안 계셨다 라고 주장한다면 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포함한 삼위 각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존재론적으로 서로 안에 상호 내재하십니다(요14:11). 이러한 양면성이 사람의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성경본문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경륜적/ 존재론적 삼위일체 –“나를 보내신 이가(경륜적 방면) 나와 함께 하시도다 (존재론적 방면).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6). 

  5. 결론 

성경적인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비결 중 하나는 성경이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을 언급할 때, 그 위격만 분리하여 생각하지 말고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하시는 다른 두 위격들을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8장 6절의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좋은 예입니다. 

 즉 아들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시, 아버지는 저 하늘에 남아 계시고 아들 안에는 안 계셨다 고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이 땅 위의 아들 안에 상호 내재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들께서 승천하신 후 성부와 성자는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위 계시록 5장 6절은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동일한 로마서 8장에서,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심을, 34절에서는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심을 말함으로 이런 관점이 성경적임을 재차 확증해 줍니다. 

그러나 한국 교계의 주류에 해당되는 개혁신학은 아들 자신이 아닌, '아들을 대리한 성령님'만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주장함으로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을 담기에는 그 그릇이 작음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개혁신학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골1:26), 또는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아들 하나님 자신'(요일 5:12, 골3:4)을 인정 할수 없는 '신학적 구조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성도들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혼란스러워 하는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각주1) 위 '하나님의 일곱영'(계5:6) 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면 글이 더 복잡해짐으로, 주님이 허락하시면 또 다른 기회를 빌려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