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0.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3편 교리를 성경보다 중시하는 삼신론자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곳 토론 장도 우리 모두는 옛사람의 행위를 떠나 다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분께 받은 부담과 빛을 믿음으로 말해내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 토론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공통 대적인 사탄과 그로부터 나온 비 진리들은 폭로, 분별, 공개적으로 거절되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바로 알기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에 대한 투명한 이해가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본질적인 토론 내용과 무관한 오해들로 인해 이 토론이 방해받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본 토론은, 이인규님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성경본문 가르침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심과 동시에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안에도 구별됨을 상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심을 믿는 지방교회 입장과, 독립된 인격으로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것은 믿지만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계시지 않으며 만일 그렇게 주장하면 양태론이다 라는 최삼경 목사, 이00 감리교 권사와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어느 것이 이단적인 주장인지를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인규 님이 위트니스 리 책에서 잘못된 내용이라며 퍼다 올리고 임의로 판단한 이런 저런 내용들도 이 근본적인 한가지 차이점에 대해 어느 쪽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주장하는지를 분별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들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이나 토론 당사자들은 본 토론의 쟁점을 흩트릴 수 있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일들로 인해 혼잡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다만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말하기만을 간절히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또 한가지는 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위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들에 대해 이미 행해졌던 각종 토론 내용들을 제가 쓰는 글에 계속 참고할 것이며 또 때로는 그 자료들을 제 본인의 주장으로 가져다가 사용할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둡니다. 물론 그 자료들 안에는 월간 교회와 신앙의 지난 게시판, 지방교회 관찰 방에 올려진 내용들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박00님은 제 오랜 동역자임을 밝힙니다. 이 점에서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론적인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와 이인규님은 서로 판단기준이 다릅니다. 한 쪽이 제대로 된 30센티 자를 가지고 30센티 간격마다 표시해 놓은 것을 '잘못된 눈금을 가진 30센티'자를 가진 다른 사람이 재어 보더니 표시된 눈금들이 틀린다며 목소리 높여 외치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이 위트니스 리 책에서 가져온 본문들을 일일이 반박하는 일도 독자들을 위하여 필요하겠지만 사실은 "누구 자(기준)가 과연 표준인지"를 따져보는 일이 이 신론 토론의 근본핵심이며 시급한 과제입니다. 저는 앞으로 남은 토론에서 쌍방이 이 일에 집중하기를 참으로 원합니다. 

 이인규님은 1)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지극히 균형 있고 성경적인 말을 가져와서는 지방교회측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양자론을 주장하며, 네스토리안니즘을 주장한다고 그럴듯하게 말할 줄 아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이 분은 순진한 독자들이 정말 그렇게 믿도록 자신 스스로 내린 결론을 기정사실화하고 반복하여 말하는 순발력도 보여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상상이고 오해요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또한 제가 역사상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우그스티누스의 '상호내재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면 왜 보편적인 신학자가 아니고 특수한 사람의 이론을 내 세우느냐고 하시고, 한국교계에서 정통신학자의 범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박사학위 논문 포함)을 인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책은 없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인규님이 말하는 소위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가 매우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님의 정통교회 기준대로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라고 해야 한다'는 소위 정통교회 교단 소속인 장신대 김명용 교수는 이단입니다. 이00 님은 '니케아 신조= 정통교회 삼위일체론'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바로 그 점이 자신의 어려움인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이인규님의 삼위일체관은 니케아 신조의 장점인 '삼위의 독립된 구별'을 취하되 '독립된 삼위가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나'를 밝히지는 못한 니케아 신조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인규님의 삼위일체관은 '삼위의 독립된 위격'을 지나치게 붙잡음으로 '상호내재' 개념이 비 성경적이며 이단적인 사상이 된 경우입니다. 위 두 가지를 다 취해야 정통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간혹 위트니스 리 책에 언뜻 보면 삼위의 독립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이 보이는 것은 성경본문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이 성경 그대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삼위의 독립을 인정치 않는 양태론 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결국 요14:10-11을 말씀한 예수님 자신도 양태론 자로 정죄한 최삼경 목사처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학과 교리를 성경본문보다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들인 것입니다. 

 3) 게다가 니케아 신조와 관련해서 '인격이라는 단어는 성경용어가 아니고 신학자들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가지고도 지방교회는 니케아 신조 자체를 부인한다느니 지방교회측이 이중성이 있느니 없느니 라는 인신 공격적인 말까지 함부로 하고 계십니다. 니케아 신조는 이단들에 대항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실체'이심을 명문화하고 '또 우리는 성령을 믿사옵나이다' 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한 아버지, 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존재를 선포한 의의가 있습니다. 물론 지방교회측도 이것을 믿습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지방교회측을 교회역사에 무식한 양태론자들' 이라는 자신의 거짓되고 부당한 착각의 틀에 밀어 넣기 위해 계속 무리를 하고 계시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단지 인격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니케아 신조 내용이 맞고 우리도 인정하지만 그 한 신조가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모든 방면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며 니케아 신조는 진지한 삼위일체 논쟁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뿐이고 사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립된 삼위가 분리되지 않으신 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상호내재 개념(페리코레시스)은 니케아 신조 이후에 캅바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비로소 정립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대화조차 공감할 수 없는 토론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저는 다음 세 가지 항목들에 있어서 저와 이00 님 의 입장을 독자들의 입회 하에 집중 검증해 보기를 제안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항목들에 대한 양쪽의 입장을 들어보면 누가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말하며 누가 자신의 교리에 빠져서 결국 성경과 정통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단사상을 가진 자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신론 토론은 조기에 종결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삼위일체 진리에 있어서 다른 부분들은 쌍방이 서로 일치하나 다음 세 가지에 있어서 이견이 있습니다. 

  1. 경륜적인 방면에 있어서 삼위의 상호내재에 대한 관점의 차이  

반복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성경본문 가르침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심과 동시에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안에도 구별됨을 상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신다고 토론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00님은 존재에 있어서는 상호내재를 인정하지만 '상호관계적인 표현으로 볼 때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금방 간파했지만 독자들은 이인규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쌍방의 입장을 들어보고 비교해 보면 누가 성경대로 말하고 누가 이단사상을 고집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관찰방의 질문을 제 것으로 옮겨와서 이인규님께 재차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인규 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분은", 

1) '성부하나님만'이시다(성부고난설 이단사상) 

2)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은 채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시다. 이 때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심과 동시에 하늘보좌에도 계신다(저와 지방교회측의 주장). 

3) 아버지는 하늘에만 계시고 아들 안에는 안 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제외된 '아들 하나님만' 이시다(이인규님 주장)

라는 1) 2) 3) 중 님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만일 님의 주장이 위 셋과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지금 자신의 잘못된 잣대를 가지고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성부고난설'을 믿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고,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등 삼신론적인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위 2)항이 지방교회측 주장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신격의 삼일성이 분리된 세 위격들로 나뉘어 질 수 있다는 관념을 붙잡지 말라. 이것은 누룩이다. ...그 셋(아버지, 아들, 성령)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 한다. 한 분이 이곳(지상)에 있을 때 셋 모두가 이곳(지상)에 있다. 한 분이 하늘에 계실 때 모두가 하늘에 계신다. 그 셋은 항상 하나이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288쪽).

님은 오직은혜님이 이 문제에 대해 관찰 방에서 질문 하자 '지방교회측의 아버지가 예수 안에 계시는 것은 맞지만,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라고 슬쩍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지방교회측이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까? 또한 님의 이단사상인 '인격 안에 인격은 없다'는 말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이 두가지 점들을 위 질문에 대한 님의 답변에서 상세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볼 때 님의 이러한 이단적인 관점은 성육신, 인생, 부활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분이 누구신가 에 대하여 님이 가지고 계신 총체적인 혼동의 한 단면 즉 빙산의 일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정통 신학자들과 성경말씀 자체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인규 님의 주장이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폭로시켜 주고 있습니다.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삼위의 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가 다 들어 있다. 각 위격 상호간에 또 위격과 실체간에 '공동내재성' 또는 상호상통성이 있다.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수많은 이단들을 모두 다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이 이론의 성경적인 근거는 요한 복음 14:10의 말씀이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박사학위 논문), 29쪽). 

요한 복음 1:18은 이 땅 위에 내려오신 독생하신 아들이 동시에 여전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속에 계시다(현재시제)고 하고, 요3:13 (영어 킹제임스 본문)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사실임과 동시에 여전히 하늘에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님의 '상호관계적인 표현으로 볼 때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주장은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치명적인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의 극심한 피해는 추후 구원론 토론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될 것입니다. 

  2. 성경본문 자체가 소위 정통 삼위일체교리와 충돌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저는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며 신구약 66권이 다 무오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외견상 불합리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자기 생각을 따라 함부로 불신하거나 무리하게 체계화 하려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을 포함한 지방교회 모든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교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성경본문 자체가 '아버지=아들', '아들=성령'이라고 말함으로 외견상 삼위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본문 자체를 불신하거나 함부로 왜곡시켜 해석합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이제 이인규님께 질문 드립니다.  

1) 이사야 9:6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은 누구이며 '영존 하시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2) 고전15:45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살려주는 영)이 되셨나니' 에서 마지막 아담은 누구(몇 격)이며, 생명 주는 영은 누구(몇 격)입니까? 그리고 '되었나니'는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3) 고후3:17의 '주는 영이시니'에서 앞의 '주'는 누구이며 뒤의 '영이시니'는 누구입니까?  

4) 계5:6 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어린양이 섰는데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누구이며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일곱 영은 누구입니까? 

위 질문들 각각에 대해 이인규님의 해석관점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 성경본문 내용들은 그 자체가 '삼위의 독립된 인격'이라는 교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눈엔 양태론 이단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 그대로 믿고 말함으로 이인규님 같은 교리지상주의자들에게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든지 아니면 그러한 비난을 피하도록 성경본문을 왜곡되게 해석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이인규님의 두 번째 부딪치는 부분입니다. 소위 님의 요14장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보혜사 성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여기에 해당 되는 문제들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인규 님처럼 소위 정통교리에 따른다면 이단이 되기 싫어서 성경 본문을 엉뚱하게 왜곡시켜 해석해 버리면 그 구절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져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날 많은 참된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과연 누구 신지-성령인지, 예수님인지, 둘 다인지, 아버지는 아닌지....-에 대해 혼란이 있는 것은 이처럼 성경본문을 성경대로 해석하기를 꺼려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위 말씀들을 문맥대로 깊이 연구한 정통 신학자들이 예를 들어 고후3:17의 본문대로 '예수 그리스도=성령'이라고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아래 내용들은 풀러신학교 교수인 루이스 스미디즈가 쓰고 현재 월간 교회와 신앙에 고정 글을 쓰고 있는 현 장신신학원 교수인 오광만 님이 번역하여 국내 기독교계에 소개하신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여수룬, 1991년)의 내용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바울)의 말은 극적이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고린도후서3:17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은 삼위일체의 삼위이시다. 바울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이라고 표현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64-65쪽).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은 지상에서 그의 구속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2.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체험되는 그리스도이시다.
  3. 성령은 지금 여기 존재하시는, 그러나 장차 완전히 실현될 새로운 창조를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그의 세상적인 기능들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4. 성령은 새로운 창조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을 위한 객관적인, 그러나 역동적인 규범이시다.
  5. 따라서, 새 언약 안에서의 삶에 관한 한, 성령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다(위 책87-88쪽)'.

저자는 계속해서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교리적인 강설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령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움직임'-이것이 바로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경륜적인 방면의 삼위일체라는 것임-필자 주-배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아래 글은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 동근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인 http://new-jerusalem.org/mean.htm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 어거스틴은 '영(성령)을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는 위배이다. 신학이 삼위일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 전혀 훼손하지 않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또는 '예수는 영이시고(고후3:17) 예수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해도 삼위일체를 훼손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와 '예수님의 영은 성령이다'(또는 '주의 영은 성령이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해석상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똑같은 말이다.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 라는 성서적 표현만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함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안에 성부는 성령이시며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하늘나라인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함께 한 작용으로 역사 되고 있다.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까지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성령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첫째, 성경의 위배이며 두 번째, 어거스틴의 20여 년 간의 노작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파괴 행위인 것이다.  

신학을 향한 충고:'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지극히 성경적인 해석은 이외에도 앤드류 머레이, 존 넬슨 다아비, 헨리 알포드, MR 빈센트, 제이 오스왈드 샌더스 같은 신실한 정통 신학자들도 주장하는 것입니다(신약의 결론-하나님 331-332쪽). 성경을 섣불리 알고 자신의 교리만을 중시하는 일부 사람들이 함부로 '양태론'이라고 경솔한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성경대로 믿는 것이 곧 삼위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어떤 비평가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요(사9:6), 그 영(고후3:17)이라고 가르칠 때, 그는 신격의 세 위격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부인하고 삼위양식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비평가들이 ...마 3:16-17을 믿는지를 물어 본다면, 나는 마 3:16-17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계된 모든 구절들(계1:4-5, 고후13:13, 엡3:14-17)을 다 믿는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양태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한다.'(윗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305-306쪽). 

3.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완결된 영)에 대한 이해 부족 

이인규 님은 지난 글에서 '첫 번째 영은 생명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친 하나님 자신이다. 이 영은 최종 완성된 삼일 하나님이다'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내재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 중 하나로 님이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인규님이 분리된 셋을 주장하는 증거입니다.  

이인규 님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한 고전15:45에서 '생명주는 영'이 아래 넷 중 무엇이라고 해석하십니까? 생명주는 영은,  

1) 예수님의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2) 1격과 2격은 제외된 3격 성령하나님(보혜사 성령)이시다. 

3) 1격과 2격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 내재하시는 3격 성령님 이시되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은 인성은 절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4) 생명주는 영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고 상호 내재하시는 아들하나님(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다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 + 예수님의 영화롭게 된 인성(육신) 즉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복합적인 영이시다. 

물론 4)이 저와 지방교회 측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성경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진리입니다. 앤드류 머레이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님도 위 본문 말씀에 대해 저처럼 빛비춤을 위트니스 리 책자를 보는 눈의 비늘이 한 꺼풀 벗겨지는 체험을 하시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요한 복음 7:39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님은 2)번 또는 3)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저와 이인규님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차이가 위트니스 리의 가장 균형 잡히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련 언급들이 님의 눈엔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핵심원인인 것입니다. 이제 이 구절에 대한 님의 해석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주실 차례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기준들에 대한 쌍방의 이견들이 풀리면 이인규님이 지난 글에서 이것저것 문제점이라고 갖다가 제시한 내용들은 다 풀려나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4. 그 외에 몇 가지 추가적인 문제들  

 1) 소위 10가지 질문들에 대하여 

위의 님의 질문들은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와 인격적으로 구별된 삼위가 각기 다른 삼위라는 전제가 정당해야 답변의 가치가 있는 질문들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시는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각기 다른 분이라는 님의 삼신론 이단사상이 맞다고 볼 때 성립되는 질문입니다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저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가 다른 분이라고 보는 님의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셨고(요8:16, 29), 부활 승천 후 하늘 보좌 우편에 게신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지금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십니다(롬8:10, 34). 그리고 이 분은 각기 다른 두 분이 아니고 동일한 한 분이십니다. 이 점이 해결되면 모든 의문이 해결되실 것입니다. 

 2) 분리와 독립의 차이 

 이인규님은 분리와 독립을 왜 상호내재와 연관 짓느냐고 항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 인격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이 곡 상호내재의 부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님은 지금 계속해서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되심을 잃지 않은 상태로 상호 내재하신다는 지방교회측 주장을 양태론 이라고 정죄하고 계시고, 삼위의 관계 안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고 고집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님이 삼위의 구별에서 지나쳐 분리를 주장하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님이 이단적인 신관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할 사항이지 누가 사과할 문제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3)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에 대하여 

님은 엉뚱하게 로마서 1:4의 아들 하나님이 부활 후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을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님의 억지 정죄와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님은 이런 말을 하실 때 잘 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님의 말과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성을 분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통상 '예수님이 하나님 사람이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을 님처럼 예수님의 양성을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이다 라고 꼬아서 들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골1:15-18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우리도 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추후 더 상세히 말할 필요가 있다면 그 때 하기로 하겠습니다. 

진리의변호와확증

님의 이런 엉뚱한 정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방교회의 다양한 이단성'이기는커녕 이미 그 모든 항목들에 대한 반박자료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케케묵은 거짓 정죄들일 뿐입니다. 그 한가지 증거만 제시한다면 님의 피조물 운운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한 반박의 글은 지금부터 20년 전에 이미 쓰여졌고 '진리변호와 확증'(한국복음서원) 122-128쪽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님은 자기 생각만이 항상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일을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신학교리는 성경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소위 정통교리라고 알려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본문을 왜곡시키거나 부인케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본문을 기준으로 그 교리를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성경은 다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진리에 교리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다만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를 주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교리나 혹은 성경을 남을 부당하게 정죄 하는 도구로 가볍게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를 보존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9. 05:00

토론글 1 - 이인규님의 주장은 변형된 삼신론

지방교회 들의 반박 - 지방교회는 변형된 양태론을 믿는다는 거짓주장에 대하여

아래 내용은 예전에 (지방)교회측 한 지체와 이0규님이 교회와신앙 홈 페이지에서 토론했던 것입니다. 이0규님과 지체사랑 님의 토론은 이러한 토론의 연장임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이곳에 소개드립니다. 이0규님의 주장은 변형된 삼신론. 

먼저 이러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귀한 공간을 마련해 주신 월간 교회와 신앙 측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방)교회측의 진리-신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며 공개토론에 강한 의욕을 보이신 이0규님에게 좋은 토론의 본을 세울 것을 제안 드립니다. 한 가지 미리 양해를 구할 것은 제가 토론 전개과정에서 진리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이인규님 개인의 인격을 손상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둘은 다른 것이며, 우리가 서로 대립되는 위치에서 토론을 한다고 해서 주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토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이인규님이 주장하거나 질문하신 내용들을 큰 항목들로 묶어서 답변, 반론 그리고 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Ⅰ. 님의 소위 『정통교회 삼위일체론 개념은 너무 모호』합니다.

님은 첫째로 「지방교회 삼위일체는 정통교회 삼위일체와 다르다」는 점을 토론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초두부터 『이인규님은 무엇을 정통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인가』그리고 『정통 삼위일체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더 전진하기 전에 다음 글에서 보다 명확하게 정의해 주실 것을 우선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님이 글에서 서술하신 것에 따르면 이인규님의 관점에서 본 정통교회 삼위일체란 삼위를 독립된 세 인격으로 믿는 것이고, 1) 하나님은 삼위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믿는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물론 님이 제시하신 세가지 요점은 정확하게 맞습니다. 저 역시 정확하게 그 사실에 동의합니다. 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분명히 삼위의 독립된 위격을 믿습니다. 이것은 후반부에 설명할 것입니다. 아마도 진짜 이단이 아닌 바에야 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쟁점이 내포된, 많은 설명이 필요한 판단기준으로 너무 모호합니다. 이인규님.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 토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그렇게 간단한 몇 마디의 말로 정의나 내리는 수준이 아님을 아십시오. 매우 깊이있는 부분까지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A. 우선은 위의 기준으로 볼 때 이전의 글에서 님이 옹호하셨던 예장 통합측 장신대학 김명용 교수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이단이 됩니다. 

김명용 교수는 월간 목회와 신학에 발표한 그분의 논문에서 세 번째 기준에 어긋나는『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은 세분이시다』 라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님의 정통교회 삼위일체론 기준에 의거해 제가 김명용 교수와 그가 가르치는 장로회 신학교, 그리고 그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소속된 예장 통합 측을 이단 또는 정통교회가 아닌 사람들이라고 단정해도 되겠습니까? 님은 이에 대해 다른 게시판 글에서 (지방)교회측이 『세분 하나님을 부정하면 틀린다』는 김명용 교수의 말을 이상하게 곡해하여 모함한다며 저희들을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여기 본문 중 일부를 옮겨오겠습니다. 직접 확인하고 다음 글에서 님의 입장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이해할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삼위라는 말의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 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성경은 세 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출처: 월간 목회와 신학, 장신대토론게시판 게시물 번호: 206 (2001/02/10,17:11:25)) 

김명용 교수는 성경이 세분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인규님도 김명용 교수의 글과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표현이 단지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 또한 위 네 가지 명제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 빠졌습니다. 이 점이 삼신론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것은『1) 하나님은 삼위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이신 하나님이 어떤 안전장치로 인해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이 부분을 성경적으로 믿으며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채 님처럼 오히려 삼위를 분리시키는 쪽으로 착각을 하면 삼신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님은 (지방)교회측이 최 삼경 목사가 『삼위의 독립된 인격』을 주장한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해하시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심(요14:10-11, 20)으로 삼위가 한 분이심을 표현하는 길인 『세 위격 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삼신론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님이 인용하신 신학자들은 균형잡힌 관점에서 썼을지 모르나, 님의 여러 글들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의 글을 받아들인 님은 잘못이해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인규님은 말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상호내재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면에 삼신론 사상을, 그것도 자신의 말이 이단사상인지도 모르면서 반복해서 주장하고 계십니다. 다음이 그 증거입니다. 다음 글들은 지금은 링크가 되어있지 않지만 지난 게시판에서 님이 다른 분들과 토론시 하신 주장들입니다. 

-이인규님의 주장-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입니다....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 

 사도, 교부시대 때부터 이어온 정통신학은 님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님의 주장은 세 인격의 독립성의 정체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고... 같은 반 아이들 10명이 다른 반으로 분리되지 않은 채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로 서로 교통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님은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하셨지만 이것이 님이 말하는 『세 인격의 독립성이고 상호내재의 의미』라면 저는 위 내용만으로 이인규님을 최삼경 목사와 똑같은 삼신론이단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계시니 (지방)교회의 삼위일체가 님의 삼위일체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님의 글 2) 지방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와 3)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관해 엉뚱하게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며 4) 지방교회에 드리는 네 가지 질문도 역시 이런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발생되는 의문에 불과 합니다. 님의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의 삼위 인격체의 독립 사상』이 왜 성경과 다른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삼신론 사상인지 간략하게 증명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요한복음 14장 11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님의 주장에 따르면 아들이 성육신 이후엔 아버지와 분리되어 하늘에는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셔야 할 것 같지만, 성경은 성육신 이후에도 여전히 아들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요1:18). 

둘째로 신학자들의 주장과 다릅니다. 

The Works of St. Augustine “On the Trinity”

1) 상호내재(coinherence)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So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The Works of St. Augustine “On the Trinity”, Book VI, p.103).  

2) 아우그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적 관계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 위격(페르소나)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2) 세 위격이 각기 완전할 뿐 아니라,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3) 신성 안에는 일체의 분리가 없다. (4)그 셋은 함께 서로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258-260쪽, Augustinus, De Trin.,VII.1, 2)』  

3) 심지어 노골적으로 세분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는 김명용 교수도 같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 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4) George Bull 주교도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이라고 했습니다. 

5) 아우구스트스 스트롱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Systematic Theology(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성경의 기본계시

6) 저희들 역시 동일한 입장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윗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따라서 성경말씀으로 보나 정통신학자들의 관점으로 보나 님의 「1-1반 아이들식」의 삼위 인격체들의 독립사상은 「한 부부」 또는 「한 가족」 사상과 함께 무서운 삼신론 사상입니다. 이것은 정통교회 삼위일체론도 아니고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님의 신론에 대한 사상을 반드시 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Ⅱ. (지방)교회측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님은 님의 글에서 웨인그루뎀의 주장을 인용하여 아래 항목들이 해당되어야 양태론이라고 정의하셨는데 이것들이 (지방)교회에 해당된다는 증거를 제시해 보십시오. 

 1) 어디에서 우리가 삼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하며 단지 그것들을 환상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했나요? 

2) 어디에서 우리가 아들의 침례시 성부가 말씀하고 성령이 강림한 것을 부인했습니까? 

3) 어디에서 우리가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한 것을 환상, 제스추어라고 했나요? 

4) 어디에서 우리가 속죄의 핵심을 잃는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까? 

5) 어디서 우리가 구별된 세 인격을 부인했나요?  

또한 님은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마치 우리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있다라고 은연중에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뿐더러 성경말씀 그대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믿고 있습니다. 님이 한 번이라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래 내용은 교회와 신앙에서 있었던 내용입니다. 

『(지방)교회측은 세 위격의 영원성과 동시 존재하심을 믿는다고 성경과 윗트니스 리의 저서를 근거로 여러 번 변증했었다(96년 10월호 p.164, 97년 7월호 p.160). 세 위격 모두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양태론자가 될 수 있는가! 

 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세 위격 간의 '구별된 고유성'을 믿는다. 

 만일 윗트니스 리가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고 선택하셨다거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등 세 위격의 고유성을 혼돈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최 목사는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그렇게 못했다. 왜냐하면 윗트니스 리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윗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가장 성경적인 말을 하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위하여 아버지는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 뿐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엡 1:4)...그 다음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셨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정하셨다(5절)"(신약의 결론-하나님, 352쪽).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위 인용들을 통해 독자들은 윗트니스 리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결코 혼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참된 믿는 이들에겐 상식에 속한 진리가 아닌가! 최 목사가 비판하기 전에 우리측이 변증의 근거로 삼는 윗트니스 리의 책, '하나님'(한국복음서원, 1991년)을 한 번만 차분히 읽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최 목사는 97년 11월호 글에서 마치 윗트니스 리가 세 위격의 구별을 무시하기나 한 것처럼 장황한 말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가 부실했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킬 뿐이다.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아들은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을 성취하셨다(엡 1:7-9)"(같은 책 354-355쪽). "그 영의 분배하심은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여 그분의 영광의 찬미에 이르도록 하시는 그분의 인치심이다(엡1 :13-14). 성령의 인치심은 살아있는 것이며..."(같은 책, 357쪽). 

따라서 윗트니스 리가 '한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함으로 양태론자라는 최 목사의 말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거짓임이 폭로되었다. 오히려 윗트니스 리의 정통적인 삼위일체관을 억지로 비판하다가 최 목사는 '한 인격'에 대한 자신의 이단적인 관점만을 드러냈다. 이 점은 다시 언급하겠다 -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이인규님의 글에서 3.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해서라는 제목아래「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 사람의 합당한 삶」이란 책 내용을 인용하셨는데 무엇이 어떻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말씀인지 님의 주장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님이 문제점을 선명히 제시하시면 저도 다음 글에서 상세하게 해명 또는 반박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참고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란 말은 요 7장 39절(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의 본문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도 부족하고 이미 최삼경목사님과 토론시 다뤄진 부분이니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지방)교회측 반박 내용을 잘 읽어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익명의 지체가 선물로 보내드린 것 같은데 신약의 결론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Ⅲ. 님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그러한 질문들은 (지방)교회측이 지상사역시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만 인정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인할 경우인 즉 진짜 양태론이라고 볼때에나 나올 수 질문들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다시 짚어두지만 우리는 성경 그대로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심(마 6:9)과 동시에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심 (요14:10-11, 20, 17:21)을 믿습니다. 

그 중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은 두 번째 질문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나요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네 번째 질문인 다윗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인격적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을까요라는 질문 역시 동일하게 님께서는 우리가 삼위의 인격적인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시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몇 가지 질의하겠습니다. 

위에 있었던 질문들과 더불어 답변하여 주십시오.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이인규님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이인규님에게 거는 한 가닥 희망은 그래도 님이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하셨습니다. 님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어떠한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님이 보유하고 계신 저희의 책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님의 질문의 뒤에는 예수 안에는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님의 삼신론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건대, 님의 삼신론 사상과는 달리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버지는 보내신 자로서 하늘 보좌에 계심과 동시에 보내심 받은 예수그리스도 안에도 구별된 채 상호내재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6:9, 요 14:10-11, 20, 8:16). 이 두 방면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이인규님처럼 신론 이해에 있어서 심각한 혼동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9절의 본문의 의미를 잘 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토론의 서막에 불과하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점점 걷혀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위엄이 가득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있도록 그분의 진리를 위해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며. 광주에서 김00. 추신. 

독자들을 위한 변 . 신학과 믿는이의 체험과의 관계 - 신학, 아니 진리를 알아야 할 필요성, 어쩌면 그분의 구원을 누리고 있는 지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어렵기 때문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대부분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물론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우리의 한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계를 말한 것이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이해로 그 안의 감추어진 보화를 캐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넘어서는 것은 도를 지나친 것이나, 연구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토론등을 통해 더 드러나겠지만 하나님이 왜 삼일이셔야 했는가를 이해한다면 다만 머리 아픈 지식에서 떠나 주님께 경배와 찬송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으로 우리 안에 분배하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어떠한 영광이며 축복인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누림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토론이 진행될수록 어려운 신학적 용어와 정의가 대두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사변적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고 많은 기도가운데 그분의 계획안에서 어떻게 삼일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되어지는지를 조금씩 알게되어진다면 더 큰 유익이 되리라 믿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6.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2) –세대주의 이단 논쟁

 이 글은 먼저 세대주의 혹은 언약 신학을 지지하는 것이 정통 혹은 이단이 되는 문제는 아님을 말하고자 합니다. 또한 형제회와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세대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해명하겠습니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세대주의가 중요시하는 몇 가지 핵심 항목들에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이들이 생명과 생명의 체험,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자신들의 사역의 초점으로 삼는 점도 세대주의와 차별화 된 부분입니다.

-세대주의 관련 이단 논쟁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1]는 한국의 개혁신학 쪽 분들에게 주로 종말론과 관련해서 이단성 시비가 있어 왔습니다.[2]  그런데 이것은 무천년설만이 유일한 정통 종말론이라는 전제에 기초한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무천년설은 같은 장로교 진영에서도 이견과 비판이 있는 터라, 그와 다르면 곧 이단이 되는 절대 진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3]. 한편 언약 신학 쪽에서는 종말론 외에, 세대주의 구원론[4]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한 예로 존 걸스트너 (John H. Gerstner)는 ‘거듭나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인데,  세대주의자들은 ‘믿어야 거듭난다’고 정 반대로 말하니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요20:31)고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라고 반박합니다 .[5] 이외에도 계시록의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문자주의 해석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다른 견해, 시대 구분 등이 세대주의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6].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대주의 안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어 이들을 어떤 고정틀로 다 싸잡아 비판하기 어렵게 되어 있고[7], 언약 신학 안에도 수정노선이 등장하는가 하면[8], 언약의 정의와 그 성경근거 제시에도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9] 따라서 균형잡힌 신학자들은 언약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정통과 이단의 차원이 아니라  보수 신학계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틀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세대주의 신학과 언약 신학의 관계 설정

이 연구를 위해 다양한 자료수집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약교회 김성주 목사님이 쓰신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과 장두만 박사님이 쓰신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라는 글이 가장 눈에 띄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로 인식하며 이를 신앙과 삶의 절대가치와 최고의 규범으로 삼아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며 두 교리체계이다. 그러므로 이 두 신학의 성경 해석적 관점의 차이는 정통과 이단의 관계로 규정해 비판하기보다는 정통신학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의 차이로 분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모름지기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관점을 집대성한 학문적 논리체계로서 인간의 주관적인 사상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지 않다. 그러므로 특정 신학을 절대화시키거나 신봉하기보다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부단히 연구 정진함으로 신학의 체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선의적인 작업이 부단히 요청된다고 하겠다.”[10]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언급해야 될 것은 세대주의와 언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 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11] 위 두 분은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신학체계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에 강하게 반대하고, 둘은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장 박사님은 위 논문 서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고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 이라고 함부로 정죄한다면서 “필자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양식 있는 학자라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라고 점잖게 충고합니다. 그는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해 왔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부 세대주의적 견해에 동조하는) 챨스 스윈돌(Charles Swindoll),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 (W.A. Criswell) 등이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지적합니다. 위 지적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부 같은 것을 말해도 즉각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이단시 하는 경향이 있는 개혁신학 전공자 분들과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한번 쯤 귀를 열고 경청해 볼 만 합니다.

 -세대주의와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워치만 니는 폐쇄파 형제회와 일정기간 교류가 있다가 성만찬 문제로 교제 단절을 당한 바 있습니다. 또한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 만나기 전 7년 반 동안 형제회 모임에 몸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경 해석 안에서 소위 ‘세대주의의 특징들’이 일부 발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세대주의 핵심 특징들에 있어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크게 달리합니다.

-이스라엘, 교회, 왕국

: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면서, 교회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연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하와로 예표된 교회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목표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신약 교회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의 실재가 바로 왕국이라고 가르침으로 소위 ‘왕국 연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12]

-대환란 전 휴거

: 알려진 대로 세대주의는 <대환란 전 휴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극소수 이기는 자들 외에, 대다수 거듭난 성도들은 <대환란 후 휴거>될 것을 가르칩니다.[13]

-7년 대환란

: 세대주의의 <7년 대환란 교리> 는 그 내용과 개념이 두 성경교사와 다릅니다[14].

-알레고리 해석

: 비판자들은 워치만 니 특히 위트니스 리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한다고 정죄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문자적 해석이 특징인 세대주의자일 수는 없어야 합니다.[15] 

-산상수훈 해석 등

: 어떤 세대주의자는 마태 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은 유대인들에 해당되어 신약 교회와 무관하며, 대환란 때 이방인들에게 전해 질 ‘천국 복음’(마24:14)을 지금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6]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마태 복음5-7장은 왕국 백성인 우리에게 헌법에 해당되고, 천국 복음은 대환란 전에 온 땅에 확산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시대의 구분

: 두 성경 교사는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처럼은 아니지만, 시대를 구분합니다.[17] 그러나 대표적인 언약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와 루이스 벌콥 역시 시대를 구분합니다[18] 따라서 시대를 구분한 자체가 곧 세대주의자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결론

 찰스 C. 라이리는 언약 신학이 체계화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로 극히 최근의 일이고, 초기 교회의 공인된 교리가 아님을 지적합니다.[19] 장두만 박사님은 언약 신학의 행위 언약, 은혜 언약의 석의적(釋義的, exegetic) 근거가 불충분하고, 언약 체결 시기와 언약 당사자에 관해 신학자마다 혼란이 있는 것은 성경 근거가 희박함을 말해준다 고 주장합니다.[20] 심지어 믿음이 없는 유아들을  세례주는 근거로 언약 신학이 고안되었다는 혹평도 있습니다.[21]  만일 이런 지적들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언약 신학과 다른 것은 이견일뿐 이단일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양 쪽 지지자들 모두가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 광풍처럼 몰아쳤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웠던 무기였던 <근본주의 5대 강령>[22]  을 다시 함께 고백함으써, W.C.C. 번영신학 등 신종 자유주의가 한국 교계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함께 영적 싸움을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23] 이런 영적 전쟁에서 자유주의가 적군이라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우군입니다.[24]

 
[1] http://blog.daum.net/hopeyard/8157 (목창균 박사님, 세대주의 논쟁)
세대주의 논쟁_목창균_서울신대_교수.pdf (클릭 다운로드)
[2]한국교계 내에서는 ‘시한부 종말론’ 비판( ftp://203.230.114.4/DLIIMG/009/009/T0211401.PDF )또는 선교 단체인 인터콥의 종말론 비판(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02 )과 관련하여 세대주의가 자주 거론된다.
[3]그런데 무천년설만이 정통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 또한 만만치 않다. 1) 차영배 박사님은 그의 <성령론> (도서출판 엠마오, 1997)에서 “대부분의 교부들은 역사적 전천년설자들” 이었는데, “이젠.. 무천년설이 득세 하여 한국교계의 전천년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탄식하고 있다 (12쪽).  2) 미국의 Faith 신학교를 졸업한 이광복 목사님도 종말론 토론에서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의 알레고리 해석법에 기원하며”, “무천년설 에 의존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은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라고 비판한다 ( <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 (생명의 말씀사, 1996, 201, 203쪽). 3) 특히 덴버 신학교 정성욱 교수님은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56267 )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성경적인 종말론임을 역설한다.
 [4] <세대주의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이다.
 [6]  이단감별사인 이인규 님(감리교 권사)은 <세대주의 비판>이라는 인터넷 상의 글에서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으로 “1) 배타적 폐쇄적이며, 2) 오직 자신들 교리만 진리라고 주장하며, 3)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1)과  2)는 언약신학 쪽도 자유롭지 못하고, 3) 의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라는 주장이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이인규님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7]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36&wr_id=16 이 자료는 세대주의를 “고전적 세대주의, 수정 세대주의, 점진적 세대주의, 대중적 계시주의” 로 분류한다. 이외에도 찰스 C.라이리는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전도출판사) 에서 블링거로 대표되는 ‘극단적 세대주의’를 말하며, 이를 다시 ‘극단적인 유형’과 ‘온건한 유형’으로 분류한다(218쪽).
 [8] 포이쓰레스는 <세대주의 이해>(총신대 출판부, 1992)에서 언약 신학의 수정노선과 관련하여, “성경신학”의 등장, 안토니 후크마 종말론의 “지상적”인 영원상태, 그리고 Willem Van Gemeren의 로마서 11장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 등을 지적한다( 54-55쪽을 보라).
 [9]  각주 11이 소개한 논문은 언약 신학자들이 제시한 성경 근거들이 왜 무리한 인용인지를 밝히고 있다.
 [10] http://blog.daum.net/7gnak/15718380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특강 자료 중 일부이다)
 [11] http://blog.daum.net/hosanna7000/15577285  (장두만,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이 논문은 <목회와 신학> 1995년 2월호에도 게재되었다.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_장두만박사.pdf (클릭 다운로드)
 [12] 위트니스 리는 <신약의 결론-왕국>(한국복음서원, 1992)에서, “어떤 성경교사들은 왕국이 연기 되었다고 잘못 가르쳤다…로마서 14장에 따르면, 왕국은 오늘날의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의실재가왕국이다.” 라고 말한다(21-22쪽).
 [13] 위트니스 리는 계14:4의 ‘첫열매’ 관련 각주에서, 대부분의 믿는이들의 대환란 끝 휴거를 주장한다.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해당 구절 각주 2를 보라.  계14장4절 각주2.pdf
 [14] 위트니스 리는 계11:2 ‘마흔 두 달’에 대한 각주에서, 다니엘 9장 27절의 “후반부 삼년 반이 대환란의 기간일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7년 대환란>이라는 용어 자체를 부인한다.
 [15]  이인규 권사는 위트니스 리의 ‘알레고리 성경 해석’이 문제라고 자주 주장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읽되, 필요시  상징적인 의미를 따져 보는 것을 원칙삼으라 고 가르친다( 한국복음서원이 발간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을 참조).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일 뿐, 세대주의자와 무관하다. 성경에는 ‘문자주의’(사7:14)와 ‘알레고리’(갈4:24)가 혼재한다.
[16]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43&wr_id=25 이송오 목사님은 이 자료에서, “무천년 주의자들은….유대인의 왕국 복음을 이 시대의 구원 계획으로 붙들고 있다” 라고 주장한다.
 [17]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5:14 주석에서,  ‘아담부터 모세까지’(롬5:14),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요1:17), ‘그리스도 초림부터 만물의 회복까지’(행3:20-21), ‘그리스도 재림부터 천년왕국 끝까지’ (계11:15, 20:4, 6)로 시대를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경 자체의 구분일 뿐 세대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워치만 니에게서도 시대 구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II, 한국 복음서원, 2002, 88쪽 참조).
 [18] 찰스 핫지도 ‘different Dispensations’이라는 소제목 아래 ‘아담에서 아브라함’, ‘아브라함에서 모세’, ‘모세에서 그리스도’, ‘그리스도에서 마지막’으로 시대들을 구분한다 (Systematic Theology II,  pp. 373-377). 핫지와 벌콥의 시대구분은 찰스 라이리의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 (전도출판사) 48-49, 54쪽도 보라.
 [19] 언약 신학의 상세한 역사는  위 라이리 박사 책  200-205쪽을 참조하라. 혹자는 어거스틴의 "구약은 숨겨진 신약이다. 신약은 드러난 구약이다." 라는 말을 빌려 언약 신학 기원을 초대 교회까지 소급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대주의 쪽도 역시 어거스틴의“시대를 구분하여라. 그러면 성경은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세대주의 기본원칙 중 하나로 인용한다(위 각주 16의 제공자료 참조).
 [20]  [11] 참조
 [21] 박만수 형제님은 “칼빈은 유아들이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섭리에 의해 그들이 이미 은혜 계약 안에 있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세례를 줄 수 있다 고 주장했고, 그것이 소위 언약 신학의 출발점이었다”라고 주장한다( http://blog.naver.com/hjxch/80036289026 ).
 [22] 근본주의 5대 강령은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적인 죽음, 육신입은 부활, 기적의 인정(또는 재림 신앙)’이다.
 [23] http://blog.koreadaily.com/korea3927/695125 김명도 박사님은 이 글에서 “개혁주의와  신근본주의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믿음을 지키려는 교단들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24] 중국 난징소재 ‘진링(金陵)연합신학대학’의 왕애명 박사는 최근에 10년(2002- 2012년) 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및 지방 교회들을 연구한 결과, 이들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개신교 표준 고백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 공개 증언한 바 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36 ). 이것은 미국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 와 풀러 신학교 측이 장기간 연구한 결과와 일치된 결론이다. (지방교회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40


상호내재를 혼동하는 변형된 삼신론이단


토론에서 이인규 님의 글쓰기 습관은 마치 스케치북에 데생 하듯 하는 것이라면, 저는 정밀화를 그리는 식입니다. 짧은 지면에 단어하나 차이로도 정통과 이단이 판가름나는 복잡 미묘한 삼위일체를 다루면서 가볍게 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양측의 글의 분위기와 다루는 범위에 차이가 있게 될 경우 독자들은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제에 저는 토론에서 제기된 모든 항목들에 대해 성심껏 입장을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중요한 쟁점은 자세히, 오해나 근거 없는 비방은 매우 간단하게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쓰다보면 꼭 그 바로 다음의 글에서 모든 것을 다 다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점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합니다. 

Ⅰ. 삼위일체 토론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

저는 최00 목사를 지지하는 어떤 분과 수 개월 동안 지금과 똑같은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지방)교회측)와 ○○○님(소위 정통교회측)은 토론 과정 중에 『1) 하나님은 독립된 삼위(세 인격)이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이인규님이 정통교회 삼위일체 개념으로 제시한 내용들을 양측이 똑같이 믿고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 바 있습니다. 전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실상 이 정도는 상식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토론은 이 정도의 원론적인 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양측이 위와 같은 소위 「정통교회삼위일체」를 모두 인정했는데도 『삼위가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신 데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실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인 1) 상호내재의미에 대해 해석이 서로 달랐고 2)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관점이 한 쪽은 분명하고 다른 쪽은 없는데서 오는 성경본문을 대하는 시각 차가 뚜렷하게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이인규 님과의 토론 쟁점도 먼저 번 토론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고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님들은 위 두 가지 핵심 쟁점에 대해 누가 성경적인 말을 하고 누가 정통 신학자들과 일치하는 말을 하는지를 진리의 주님이신 그분 안에서 기도가운데 자세히 살펴보시면 이 신론 토론의 핵심을 파악하실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 토론에서는 상대방인 ○○○목사님이 「삼위가 한 분이심은 마치 남편과 아내가 각각 독립된 인격체들이지만 한 부부인 것과 같은 개념」이라는 소위 『부부론』을 주장했고, 저는 그것은 인격의 「구별」에서 지나친 「분리」의 개념이며 명백한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약 두 달간의 뜸을 들이다가 중간에 갑자기 일방적으로 포기함으로 토론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인규 님은 말로는 자신은 상호내재를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은 없다』-물론 이 때 인격 안에 인격이 있다는 주장은 인격의 혼동이나 무시가 아니라 인격 상호 간의 구별을 손상하지 않는 상호내재를 뜻함을 주의-며 『정통적인 상호내재 개념』을 사실상 부인함으로 결국 삼위를 분리시키는 변형된 삼신론 사상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남은 신론 토론기간 내내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강조하여 다루어질 것입니다. 즉 요 14:10-11에서 나타난 『상호내재 개념』을 누가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가가 이 토론의 핵심입니다. 

  Ⅱ. (지방)교회 삼위일체관 

지난 번 최00 목사와의 토론에서도 소개된 것으로 아는데... 위트니스 리는 1) 삼위일체를 성경 말씀이 계시하는 그대로 믿는다 2) 성경 본문끼리 상호 모순되는 듯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억지로 체계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3) 특히 신약성경에서 두드러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들」을 강조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보아도 이것은 가장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삼위일체관입니다. 

즉 먼저 교리를 정립하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고, 성경 본문들을 중시하면서 그 말씀 안에서 교리적인 설명을 도출해 내는 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교회측이 교회역사상 다뤄진 다양한 삼위일체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도 아닙니다. (지방)교회측 자체 신학계간지(http://www.lsm.org/a&c/welcome.html)에서 삼위일체론만을 1년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영어를 잘하신다면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은 성경본문 자체가 신학과 충돌을 일으킬 만한 내용들(마28:19, 고후3:17, 사9:6, 요1:14, 고전15:45)을 다룬 위트니스 리 글을 자신의 교리적인 틀로 함부로 비판하다가 성경 본문 자체를 부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님의 오해는 경륜적인 방면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이인규님은 앞으로도 자신의 잘못된 삼신론 기준으로 볼 때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 위트니스 리의 가장 성경적인 언급들을 님이 보유한 위트니스 리의 책 몇권에서 계속 뽑아내어 인용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사실상 삼위을 분리시키는 이인규님의 삼신론 이단사상은 더욱 또렷이 폭로될 것입니다. 

  Ⅲ. 이인규 님의 변형된 삼신론의 실상  

제가 지난 글에서 이인규님을 『변형된 삼신론자』라고 단정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충분한 근거와 확신을 가지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확신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인규 님은 자신은 「삼위간의 상호내재를 굳게 믿고,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분리된 인격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항변했습니다. 막연한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님의 글에서 나온 표현이나 구체적인 성경해석―예를 들어, 성육신 한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성부고난설로 연결시키시는 것―에 있어서는 님은 사실상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지적한 님의 이단적인 주장을 다시 인용하고 비판해 보겠습니다. 

  A. 변형된 삼신론 주장 1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이 말은 님이 말하는 『세 인격의 독립성은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의미의 독립성』입니다. 이것은 『고유의 인격의 구별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인격 간에 서로 상호내재 하시는 정통교회의 상호내재와 다른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B. 변형된 삼신론 주장 2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이러한 최00 목사의 주장에 대해 이인규님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들 안에 아버지가 구별된 인격으로 상호내재 하심을 말하는 요한복음 14:11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는 말씀과 다르고 다음과 같이 칼빈대학교 김석환 박사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인용한 정통 교부의 신앙과도 다른 이단사상입니다.   

『위격 간의 상호내재 :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격의 위격들이 시간 안에서, 장소 안에서, 직무 안에서(in pursuit), 또는 활동 안에서(in operation)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동일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아버지에 의해 역사되며, 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또 성령의 뜻에 의존한다. 거룩한 삼위일체께서 모든 활동들을 수행하시는데, 위격들의 수에 따른 분리된 행위에 의해서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성령에게 전달되는 선한 의지의 한 운동과 성향이 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28쪽,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년, 원출처: Gregory of Nyssa, QNTD (5:334)). 

  님은 상호내재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라고 하시지만 위 인용에서 정통교부는 『장소 안에서도 분리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위격의 구별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실제로 상호내재 하심을 부인하는 것이 님의 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그리고 은밀히 감추어진 채 진리를 변질시키는 무서운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세 위격이 함께 내재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이 어떻게 상호관계를 가지느냐에 대하여…이 문제를 깊이 이해하면서 삼위간의 교제관계를 강조한 것은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였다…아우그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적관계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세 위격(페르소나)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2) 세 위격이 각기 완전할 뿐 아니라,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3) 신성 안에는 일체의 분리가 없다. (4)그 셋은 함께 서로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258-260쪽, Augustinus, De Trin.,VII.1, 2)』 『하나님(아버지)과 아들이 분할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쪽)』 

위 사실은 편견으로 인해 상대방의 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읽지 않으시는 님께서 읽어보셨는지 모르지만『누가 이단인가』책에서도 언급해져 있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분리되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내재 하심에 대해,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라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George Bull 주교도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이라고 했다. 아우구스트스 스트롱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라고 말했다(Systematic Theology(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물론 이런 말들은 삼위의 영원한 구별을 전제하는 말들입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도 다음에서 보듯이 위와 동일한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이인규님은 위의 신학자들의 이름을 모르실지 모르지만 정통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 아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상호내재에 관한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이인규님의 삼위일체론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난 명백한 변형된 삼신론입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C. 변형된 삼신론 주장 3 

『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입니다....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 위 님의 설명은 독립된 세 인격을 자꾸 분리된 방식으로 주장하심으로 「독립과 분리」의 개념을 정의해 달라는 지나가다님의 주문에 대한 님의 답변인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제 말은 위 님의 설명에서 삼위 하나님의 독립된 인격을 학교 학생들이라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독립처럼 동일시하는 발상 그 자체가 이미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은 삼위 하나님간의 독립개념을 세 사람 간의 독립개념으로 보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점이 님이나 최00 목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위에 인용했던 칼빈대학교 김석환 박사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인용된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이곳에 소개해 보겠습니다. 님은 정통교부들의 주장은 존중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으로는 셋이나 실체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님의 실체를 아담과 하와와 셋에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역시 잘못된 것이다』(위 책 241쪽). 결론적으로 이인규님은 원론적으로는 상호내재를 믿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실상에 있어서는 『인격 안에는 인격이 없는 즉 요14:11의 아들 안에 아버지는 없는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변형된 삼신론자입니다. 』 이 점은 이인규님이 빛 비춤이 있어서 잘못된 것을 시인하시고 회개하실 때까지 중점적으로 반복해서 지적될 것입니다. 왜 이러한 감추어진 삼신론 이단 사상이 악한지는 차츰 더 구체적으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Ⅳ. 이인규님의 여러 주장들에 대한 반론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지금부터 다룰 님의 이런 저런 주장들은 다음 항목들에 대한 님의 오해나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1) 님의 상호내재에 대한 비성경적인 이해. 2) (지방)교회측이 성육신 하신 주체와 부활하신 주체를 『아버지와 성령이 영원히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이 분이 입으신 육신은 죄는 없으시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고 계심을 일관되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무지. 3) 고전15:45의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이 부활시 육의 몸에서 신령한 몸(즉 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신 후 그 안에 포함된 영이시라』는 진리인식―이것을 개혁신학자 중엔 앤드류 머레이가 보았음, 그의 「그리스도의 영, 기독교 문서 선교회 출간」참조-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들입니다. 

 다음은 님의 인용이고 저의 반론과 문제제기입니다. 

  첫번째 인용 : 다시 묻겠습니다. 1) 지방교회 삼위일체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까? 2)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가 틀리고, 지방교회의 삼위일체가 옳다는 것입니까? 

  답변과 반론 :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와 동일합니다. 저는 이점을 서두에 밝혔고, 정통교부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밝혔습니다.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가 맞고 님의 변형된 삼신론이 틀렸습니다. 님은 지금 각론은 완전히 빗나갔으면서 자신의 총론이 맞다고만 주장하고 계십니다. 함부로 정통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님은 정통교회란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관이 마치 정통교회의 신론과 일치하는 것럼 보여 사람들을 호도하려고 하나 님의 신관은 신학자들의 글을 자신의 천연적인 관점으로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은 변형된 삼신론에 불과합니다. 

  두번째 인용 :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 혹은 여호와의 영"이라 불리는 하나님 자신이, 껍질인 육신을 입고 성자 예수님으로(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육신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이며, 부활 후에는 삼일하나님(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영이 되어 짐으로 총체적인 합으로 완성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양태론 과는 좀 다르기 때문에 저는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마는 결국 양태론 입니다'. 

  답변과 반론 : 님은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상태로 아들 안에 상호내재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은 것을 부인하십니까? 그렇다면 님의 성육신관은 참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님은 또한 우리가 마치 아버지가 성자 예수님으로서 육신을 입은 것처럼 가르치는 것으로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님의 틀에 함부로 꿰어 맞추지 마십시오. 

  세 번째 인용 : 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지방교회의 주장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초대교회 양태론 자는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 그 주장은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면 지방교회의 주장은 무엇일까요? 

  답변과 반론 :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위에서 성육신 하신 분을 소개 드린 대로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들 하나님이 주체가 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데 님은 엉뚱하게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성부고난설을 억지로 끌어다가 이단을 만들려고 애를 쓰시는군요. 차영배 박사 삼위일체론(총신대학 출판부) 74-76쪽 잘 읽어보시고 '성부고난설' 제대로 인용하세요. 

 님께서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전편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3)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각각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영이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원한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며 선포한다"( 신약의 결론-하나님, 303쪽). 

"우리는 또한 셋(아버지, 아들, 성령)모두 영원하심을 믿는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아버지가 영원하시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에서는 아들이 영원함을 지적하며,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는 영원한 성령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시다"(같은 책, 307쪽). (지방)교회측은 세 위격의 영원성과 동시 존재하심을 믿는다고 성경과 위트니스 리의 저서를 근거로 여러 번 변증했었다(96년 10월호 p.164, 97년 7월호 p.160). 

세 위격 모두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양태론자가 될 수 있는가!  

  (4)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세 위격 간의 '구별된 고유성'을 믿는다.   

만일 위트니스 리가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고 선택하셨다거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등 세 위격의 고유성을 혼돈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최 목사는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그렇게 못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가장 성경적인 말을 하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위하여 아버지는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 뿐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엡 1:4)...그 다음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셨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정하셨다(5절)"(같은책, 352쪽).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아들은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을 성취하셨다(엡 1:7-9)"(같은 책 354-355쪽). 

"그 영의 분배하심은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여 그분의 영광의 찬미에 이르도록 하시는 그분의 인치심이다(엡1 :13-14). 성령의 인치심은 살아있는 것이며..."(같은 책, 357쪽). 위 인용들을 통해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결코 혼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참된 믿는 이들에겐 상식에 속한 진리가 아닌가! 최 목사가 비판하기 전에 우리측이 변증의 근거로 삼는 위트니스 리의 책, '하나님'(한국복음서원, 1991년)을 한 번만 차분히 읽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최 목사는 97년 11월호 글에서 마치 위트니스 리가 세 위격의 구별을 무시하기나 한 것처럼 장황한 말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가 부실했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킬 뿐이다. -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위트니스 리는 세 위격인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동시존재, 상호내재, 영원한 구별과 분리되지 않으심을 믿는데 반해, 사벨리루우스는 세 위격의 동시존재를 믿지 않고 승계적인 셋을 가르치는 것이 다릅니다. 둘은 전혀 별개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여러 언급이 있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와 같이 설명해 드렸으니 이제 더 이상 저희에 대해서 『삼위가 구별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부고난설처럼 보인다.』등의 양태론으로 몰고 가려하는 말씀은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네 번째 인용 : 즉 세 글을 정리하자면... 1)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신성한 부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 분의 온 존재"가 달리셨다. 2) 신성만 살고 인간의 부분은 죽었다. 그 인간의 한 부분만이 사람, 다윗의 씨다 3) 예수는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정되었다. 

  답변과 반론 : 님은 그리스도의 신성부분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주장입니까? 그렇다면 님은 그리스도의 양성 중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하나님 사람이신 그분의 온존재가 달리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까? 그렇다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능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3)은 로마서 1:4의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는 성경본문을 설명한 것뿐입니다. 님은 성경본문을 보고도 양자설 이단이라고 정죄 합니까? 

  다섯 번째 인용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아니즘 이며, 예수가... 양자설... 예수의 신성이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은 성부수난설이라고 하는 일종의 양태론이고 다른 것이란 오직 "단일 하나님"인가 "복합적인 하나님"인가 하는 것뿐입니다. 즉 예수는 인간의 부분과 함께 하나님 자신(신성)도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인간의 부분은 죽고 신성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치시는 분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답변과 반론 : 위 말씀에서 님이 사용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님의 상호내재 개념의 이단적인 이해―인격 안에 인격이 안 계신다―의 치명적인 독소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되긴 하지만 엄연히 아들 안에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나(여기에서 그러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다고 하는 주장아니냐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미 위의 글과 1편의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인규님은 『아버지 하나님은 분리되고 제외된 1/3 하나님 또는 성령을 포함시킨다면 2/3하나님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셨다고 이단적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님의 이단 사상은 추후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인지를 다루게 될 경우 집중적으로 폭로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인용 : 성육신 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 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 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하나님 54쪽) 즉 예수는 "사람의 껍질 + 성부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야기이며, 

  답변과 반론 : 님은 통상 하나님이라고 할 때 성부하나님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위 문맥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을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는 님의 착각과 오해처럼 「사람의 껍질 + 성부 하나님 자신」 이 아니시고 「(영과 혼과 몸을 가지신) 사람 + '아버지와 성령님이 영원토록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으면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니 님의 상상을 따라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곱 번째 인용 : 4. 중보자이신 한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하나님이 아니신 다른 인격의 한 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곧 예수와 동일한 인격이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는 구별된 인격이 언급되지 못합니다. 

  답변과 반론 : 누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고 합니까? (지방)교회 성도들도 딤전 2:5에 대해 님처럼 이해합니다. 님의 좁은 틀안에서 함부로 적용하지 마십시오. 

  여덟 번째 인용 : 5. 상호내재와 인격적인 거함 본인은 하나님 안에 예수께서 계시며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즉 1학년 1반의 학생들은 인격체가 다르지만(독립된 인격), 모두 1학년 1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란 용어는 1학년1반이 아닌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용어설명을 하면 위험한 삼신론이 되는지요? 지방교회는 독립된 세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면 삼신론자라고 합니까? 

  답변과 반론 : 님은 지금 두 가지 말을 하고 계십니다. 님은 「본인은 하나님 안에 예수께서 계시며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굳게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는 아버지 하나님은 그 안에 안 계신다고 하며 만일 그렇게 주장하면 성부고난설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지방)교회측은 아버지가 성육신 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님의 상반된 두 가지 주장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토대로 하여 본인이 알고 있는 이단들은 다 끌어다가 억지로 (지방)교회측과 연결 지으려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아홉 번째 인용 : 6. 상호내재라는 용어, 상호내재란 "존재론적 양식에 관한 표현"이며 "독립된 세 인격"이란 "상호 관계적인 표현"입니다 즉 상호관계적인 면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습니다..... 그 인격은 서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남을 비판하려면 먼저 신학적인 상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존재적 양식이라 는 면에서 보면 삼위는 서로 내재합니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님은 상호 관계적인 점에서 "독립된 세 인격"입니다.

 답변과 반론 : 님의 이 부분은 새로운 주장이시군요. 「상호내재란 존재론적 양식에 관한 표현이며 독립된 세 인격이란 상호관계적 표현이다. 상호관계적인 면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그런 주장의 근거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많은 주장이지만 비판하기 전에 님에게 충분한 설명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열 번째 인용 : 7.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지방교회는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 한 이름을 주장합니다.... 단 일반적인 양태론과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의 복합적인 삼위의 구성요소가 세 형태의 양태적인 과정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답변과 반론 :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으시면서 상호 내재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 1) 성육신 하셨고 2) 인생을 사시고, 3) 죽으시고, 4) 부활 승천하시고 5)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 (지방)교회측의 주장입니다. 만일 님이 이것을 부인한다면 성경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니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 (지방)교회측이 위와 같은 온전하신 하나님이 이 땅 위에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늘 보좌 위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들, 예수님의 침례시의 자연들이 묘사하는 성경구절들을 가감 없이 믿는다는 점입니다. 』 이점이 결정적으로 양태론자들과 다른 점이며 양태론이나 변형된 양태론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님은 지금 성경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억지로 양태론 공식에 꿰어 맞추려하니 관계도 없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열 한 번째 인용 : 아래 다음 글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동일 인격으로 설명하는 지방교회의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곧 예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요한복 음14:16-17에 대해서는 모든 정통 신학책과 주석, 사전들에는 보혜사이신 예수님과 다른 보 혜사이신 성령님과 인격적인 구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답변과 반론 : 님은 여기서도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정통 신학책들이 예수님과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구별하고 있다고 하나 지난 게시판에 올려졌던 루이스 스미디즈가 쓰고 정통신학자인 오광만 교수가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한 「바울의 연합사상」(여수룬)은 고후3:17 등 사도 바울의 관련부분에 대한 언급들에 대해 「예수 =성령」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처럼 성경 본문자체에서 위격 구별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들이 있는 것이 삼위를 각각 독립된 세 사람들처럼만 알고 있는 님과 같은 삼신론자들에게 가장 곤란한 대목이며 여기서 심각한 성경사실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 두 번째 인용 : 김성일님이 인용한 신학적 증거: 님은 김명용교수의 글을 단어 하나로서 단편적으로만 인용하고 있습니다.… 

답변과 반론 : 김명용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는 지난 번 질문을 재차 드립니다. 님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가 정통교회 삼위일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을 지칭할 때는 맞지만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둘은 다른 주장이며 님이 맞으면 김 명용 교수는 이단이고 김명용 교수가 맞으면 님은 틀린 것입니다. 지난 번 저의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답변해 주시지요. 

마지막으로 

님의 질문들은 이 단락 서두에 언급한 그러한 오해와 무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님께서 열린 마음으로 아무런 편견없이 글을 대하신다면 위의 설명가운데 답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 기회로 기약하겠습니다. 저의 바램은 이인규님이 무엇가를 임의로 판단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님의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을 재고해 보시고 정확한 삼위일체관을 갖게되심으로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 가운데 주님께서 역사하시기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25

변형된 삼신론

먼저 이러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귀한 공간을 마련해 주신 월간 교회와 신앙 측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방교회 측의 진리-신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며 공개토론에 강한 의욕을 보이신 이인규님에게 좋은 토론의 본을 세울 것을 제안 드립니다. 한 가지 미리 양해를 구할 것은 제가 토론 전개과정에서 진리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이인규님 개인의 인격을 손상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둘은 다른 것이며, 우리가 서로 대립되는 위치에서 토론을 한다고 해서 주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토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이인규님이 주장하거나 질문하신 내용들을 큰 항목들로 묶어서 답변, 반론 그리고 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Ⅰ. 님의 소위 『정통교회 삼위일체론 개념은 너무 모호』합니다.  

님은 첫째로 「지방교회 삼위일체는 정통교회 삼위일체와 다르다」는 점을 토론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초두부터 『이인규님은 무엇을 정통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인가』그리고 『정통 삼위일체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더 전진하기 전에 다음 글에서 보다 명확하게 정의해 주실 것을 우선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님이 글에서 서술하신 것에 따르면 이인규님의 관점에서 본 정통교회 삼위일체란 삼위를 독립된 세 인격으로 믿는 것이고, 1) 하나님은 삼위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믿는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물론 님이 제시하신 세가지 요점은 정확하게 맞습니다. 저 역시 정확하게 그 사실에 동의합니다. 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분명히 삼위의 독립된 위격을 믿습니다. 이것은 후반부에 설명할 것입니다. 아마도 진짜 이단이 아닌 바에야 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쟁점이 내포된, 많은 설명이 필요한 판단기준으로 너무 모호합니다. 이인규님.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 토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그렇게 간단한 몇 마디의 말로 정의나 내리는 수준이 아님을 아십시오. 매우 깊이있는 부분까지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A. 우선은 위의 기준으로 볼 때 이전의 글에서 님이 옹호하셨던 예장 통합측 장신대학 김명용 교수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이단이 됩니다.  

김명용 교수는 월간 목회와 신학에 발표한 그분의 논문에서 세 번째 기준에 어긋나는『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은 세분이시다』라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님의 정통교회 삼위일체론 기준에 의거해 제가 김명용 교수와 그가 가르치는 장로회 신학교, 그리고 그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소속된 예장 통합 측을 이단 또는 정통교회가 아닌 사람들이라고 단정해도 되겠습니까? 님은 이에 대해 다른 게시판 글에서 (지방)교회측이 『세분 하나님을 부정하면 틀린다』는 김명용 교수의 말을 이상하게 곡해하여 모함한다며 저희들을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여기 본문 중 일부를 옮겨오겠습니다. 직접 확인하고 다음 글에서 님의 입장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이해할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삼위라는 말의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 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성경은 세 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출처: 월간 목회와 신학, 장신대토론게시판 게시물 번호: 206 (2001/02/10,17:11:25))
 김명용 교수는 성경이 세분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인규님도 김명용 교수의 글과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표현이 단지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 또한 위 네 가지 명제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 빠졌습니다. 이 점이 삼신론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것은 『1) 하나님은 삼위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이신 하나님이 어떤 안전장치로 인해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이 부분을 성경적으로 믿으며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채 님처럼 오히려 삼위를 분리시키는 쪽으로 착각을 하면 삼신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님은 지방교회 측이 최 삼경 목사가 『삼위의 독립된 인격』을 주장한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해하시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심(요14:10-11, 20)으로 삼위가 한 분이심을 표현하는 길인 『세 위격 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삼신론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님이 인용하신 신학자들은 균형잡힌 관점에서 썼을지 모르나, 님의 여러 글들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의 글을 받아들인 님은 잘못이해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인규님은 말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상호내재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면에 삼신론 사상을, 그것도 자신의 말이 이단사상인지도 모르면서 반복해서 주장하고 계십니다. 다음이 그 증거입니다. 다음 글들은 지금은 링크가 되어있지 않지만 지난 게시판에서 님이 다른 분들과 토론시 하신 주장들입니다. 

  -이인규님의 주장-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입니다....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 

사도, 교부시대 때부터 이어온 정통신학은 님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님의 주장은 세 인격의 독립성의 정체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고... 같은 반 아이들 10명이 다른 반으로 분리되지 않은 채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로 서로 교통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님은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하셨지만 이것이 님이 말하는 『세 인격의 독립성이고 상호내재의 의미』라면 저는 위 내용만으로 이인규님을 최삼경 목사와 똑같은 삼신론이단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계시니 (지방)교회의 삼위일체가 님의 삼위일체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님의 글 2) 지방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와 3)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관해 엉뚱하게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며 4) 지방교회에 드리는 네 가지 질문도 역시 이런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발생되는 의문에 불과 합니다. 님의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의 삼위 인격체의 독립 사상』이 왜 성경과 다른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삼신론 사상인지 간략하게 증명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요한복음 14장 11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님의 주장에 따르면 아들이 성육신 이후엔 아버지와 분리되어 하늘에는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셔야 할 것 같지만, 성경은 성육신 이후에도 여전히 아들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요1:18). 

  둘째로 신학자들의 주장과 다릅니다.  

  1) 상호내재(coinherence)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So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The Works of St. Augustine “On the Trinity”, Book VI, p.103). 

  2) 아우그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적 관계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 위격(페르소나)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2) 세 위격이 각기 완전할 뿐 아니라,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3) 신성 안에는 일체의 분리가 없다. (4)그 셋은 함께 서로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258-260쪽, Augustinus, De Trin.,VII.1, 2)』

  3) 심지어 노골적으로 세분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는 김명용 교수도 같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4) George Bull 주교도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이라고 했습니다.

  5) 아우구스트스 스트롱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Systematic Theology(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6) 저희들 역시 동일한 입장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따라서 성경말씀으로 보나 정통신학자들의 관점으로 보나 님의 「1-1반 아이들식」의 삼위 인격체들의 독립사상은 「한 부부」 또는 「한 가족」사상과 함께 무서운 삼신론 사상입니다. 이것은 정통교회 삼위일체론도 아니고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님의 신론에 대한 사상을 반드시 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Ⅱ. (지방)교회측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님은 님의 글에서 웨인그루뎀의 주장을 인용하여 아래 항목들이 해당되어야 양태론이라고 정의하셨는데 이것들이 (지방)교회에 해당된다는 증거를 제시해 보십시오. 

1) 어디에서 우리가 삼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하며 단지 그것들을 환상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했나요?
2) 어디에서 우리가 아들의 침례시 성부가 말씀하고 성령이 강림한 것을 부인했습니까?
3) 어디에서 우리가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한 것을 환상, 제스추어라고 했나요?
4) 어디에서 우리가 속죄의 핵심을 잃는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까?
5) 어디서 우리가 구별된 세 인격을 부인했나요? 
 

또한 님은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마치 우리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있다라고 은연중에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뿐더러 성경말씀 그대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믿고 있습니다. 님이 한 번이라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래 내용은 교회와 신앙에서 있었던 내용입니다.

 『(지방)교회측은 세 위격의 영원성과 동시 존재하심을 믿는다고 성경과 위트니스 리의 저서를 근거로 여러 번 변증했었다(96년 10월호 p.164, 97년 7월호 p.160). 세 위격 모두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양태론자가 될 수 있는가!  

 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세 위격 간의 '구별된 고유성'을 믿는다. 

만일 위트니스 리가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고 선택하셨다거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등 세 위격의 고유성을 혼돈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최 목사는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그렇게 못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가장 성경적인 말을 하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위하여 아버지는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 뿐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엡 1:4)...그 다음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셨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정하셨다(5절)"(신약의 결론-하나님, 352쪽).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아들은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을 성취하셨다(엡 1:7-9)"(같은 책 354-355쪽). "그 영의 분배하심은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여 그분의 영광의 찬미에 이르도록 하시는 그분의 인치심이다(엡1 :13-14). 성령의 인치심은 살아있는 것이며..."(같은 책, 357쪽). 

위 인용들을 통해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결코 혼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참된 믿는 이들에겐 상식에 속한 진리가 아닌가! 최 목사가 비판하기 전에 우리측이 변증의 근거로 삼는 위트니스 리의 책, '하나님'(한국복음서원, 1991년)을 한 번만 차분히 읽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최 목사는 97년 11월호 글에서 마치 위트니스 리가 세 위격의 구별을 무시하기나 한 것처럼 장황한 말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가 부실했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킬 뿐이다. 

따라서 위트니스 리가 '한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함으로 양태론자라는 최 목사의 말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거짓임이 폭로되었다. 오히려 위트니스 리의 정통적인 삼위일체관을 억지로 비판하다가 최 목사는 '한 인격'에 대한 자신의 이단적인 관점만을 드러냈다. 이 점은 다시 언급하겠다 -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이인규님의 글에서 3.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해서라는 제목아래「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 사람의 합당한 삶」이란 책 내용을 인용하셨는데 무엇이 어떻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말씀인지 님의 주장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님이 문제점을 선명히 제시하시면 저도 다음 글에서 상세하게 해명 또는 반박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참고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란 말은 요 7장 39절(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고린도 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의 본문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도 부족하고 이미 최삼경목사님과 토론시 다뤄진 부분이니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지방)교회측 반박 내용을 잘 읽어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익명의 지체가 선물로 보내드린 것 같은데 신약의 결론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Ⅲ. 님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그러한 질문들은 (지방)교회측이 지상사역시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만 인정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인할 경우인 즉 진짜 양태론이라고 볼때에나 나올 수 질문들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다시 짚어두지만 우리는 성경 그대로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심(마 6:9)과 동시에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심(요14:10-11, 20, 17:21)을 믿습니다.  

그 중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은 두 번째 질문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나요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네 번째 질문인 다윗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인격적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을까요라는 질문 역시 동일하게 님께서는 우리가 삼위의 인격적인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시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몇 가지 질의하겠습니다. 위에 있었던 질문들과 더불어 답변하여 주십시오.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이인규님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이인규님에게 거는 한 가닥 희망은 그래도 님이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하셨습니다. 님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어떠한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님이 보유하고 계신 저희의 책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님의 질문의 뒤에는 예수 안에는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님의 삼신론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건대, 님의 삼신론 사상과는 달리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버지는 보내신 자로서 하늘 보좌에 계심과 동시에 보내심 받은 예수그리스도 안에도 구별된 채 상호내재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6:9, 요 14:10-11, 20, 8:16). 이 두 방면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이인규님처럼 신론 이해에 있어서 심각한 혼동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9절의 본문의 의미를 잘 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토론의 서막에 불과하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점점 걷혀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위엄이 가득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있도록 그분의 진리를 위해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추신. 독자들을 위한 변 .  

어쩌면 그분의 구원을 누리고 있는 지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어렵기 때문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대부분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물론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우리의 한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계를 말한 것이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이해로 그 안의 감추어진 보화를 캐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넘어서는 것은 도를 지나친 것이나, 연구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토론등을 통해 더 드러나겠지만 하나님이 왜 삼일이셔야 했는가를 이해한다면 다만 머리 아픈 지식에서 떠나 주님께 경배와 찬송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으로 우리 안에 분배하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어떠한 영광이며 축복인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누림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토론이 진행될수록 어려운 신학적 용어와 정의가 대두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사변적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고 많은 기도가운데 그분의 계획안에서 어떻게 삼일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되어지는지를 조금씩 알게되어진다면 더 큰 유익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