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2.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에 소속된 분들은 일반 성도들이 잘 못들어 본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경륜'이란 말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뭡니까?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인데, 한국복음서원에서 펴낸 '하나님의 경륜'(위트니스 리)이란 책을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예, 기회가 되면 한번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거기서 오래 생활하셨으니, 나름대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한번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이해한 하나님의 경륜을 조금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경륜은 위트니스 리나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성경 용어입니다. 디모데 전서 1장 4절을 보면 나옵니다. 거기서 앞 뒤 다 빼고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란 말만 마음에 담아 두셨으면 합니다. 

  -제가 '경륜'이란 단어를 검색에 쳐 보았더니 일곱명이 하는 자전거 경주 이야기가 나오던데,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거구요. 아, 저 사람은 얼굴에서 경륜(연륜)이 느껴져 라는 식으로 일이나 조직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예, 저도 호기심으로 경륜이라는 단어를 검색에 쳐 본적이 있는데, 진짜 '창원경륜공단' '한국 경륜선수위원회' 이런 단어들이 뜨더라구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두 방면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 단어 원문의 의미를 푸는 방식이구요, 또 하나는 그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쓰인 내용들을 몇 단어로 압축해서 요악하는 식입니다. 우선 '경륜'이란 말은 위 디모데 전서 1장 4절 말고도 엡1:10, 3:2, 9, 골1:25, 고전9:17 등에서도 쓰였어요. 헬라어 원문은 '오이코 노미아'입니다. 이것은 '집'의 의미인 '오이코스'와 '관리'의 의미인 '노모스'의 합성어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집 관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따라 말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주님자신', '분배' '표현' 이 세 단어로 압축해서 정의할 수 있어요. 

  -주님 자신을 분배해요? 아무리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으려고 해도 '분배'라는 말은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실 겁니다. 사실은 저도 처음에 그랬거든요. 그래서 나름대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할 성경 구절들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위 고전 9:17을 보시면 개역성경으로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오이코노미아'인데, 이것을 KJV은 'dispensation' 이라고 번역했어요. 그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찾아보시면 첫 의미가 바로 '분배' 또는 '나누어 줌' 입니다. 

 즉 바울이 위 구절에서 '직'을 맡았다고 했는데, 무슨 직분인가 하면 쉽게 말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생명으로 나누어주는(소개하는) 직분입니다. 그런 직분을 통해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믿고 영접하게 되는 소위 복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조금 인위적으로 느껴지시면 좀더 설득력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요한복음 10장 10절 후반절이예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양들인 우리 편에서는 생명을 얻고 또 얻는 것이지만, 생명을 주시는 그분 편에서 보면 생명을 주고 또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명을 분배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분배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지요. 그런데 생명이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에 근거해 보면 주님자신이 생명입니다. 

 이처럼 '주님자신' '분배'가 이뤄질 때 나타난 결과가 바로 '표현'입니다. 사람 안에 생명이 처음 분배된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계속 분배되는 생명을 그 거듭난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라서 성숙하게 합니다. 이런 거듭난 사람들, 생명이 성숙한 사람들은 불신자와는 다른 어떤 예수 믿는 냄새가 납니다. 얼굴에서 그들의 말에서 생각하는 관점에서...그것이 표현입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주님자신이 우리를 통해 안으로부터 충만히 표현되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엡1:23)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계21:11). 

 질문은 짧은데 어찌하다보니 제 답이 너무 길어것 같아 죄송하네요. 

  -예, 나름대로 성경을 토대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계시구나 하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내용들이 다 이해가 된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번 찬찬히 검토해 보고 추가 질문이 있으면 나중에 또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참고로 시간이 나시면 엡1:4-5, 3:2-6, 골1:24-29 등도 함께 연구해 보시면 제가 오늘 설명드린 내용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좋은 시간 가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럼 나중에 또 뵙지요. 안녕히 가세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1. 11:29

 

성경말씀

(창49:8~9)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계5:5上) 그러자 장로들 중에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오늘의 만나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자는 산에 거합니다. 먹이를 구할 때, 사자는 산에서 내려옵니다.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붙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는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취한 후에, 사자는 먹이를 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라는 말씀은 사자가 그 먹이를 삼키려고 산 위로 올라갔음을 뜻합니다. 먹이를 먹은 후 사자는 더 이상 웅크리지 않습니다. 대신 사자는 드러누워 휴식합니다. 여러분의 체험 가운데 사자 새끼이신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또한 누워 휴식하고 있는 만족하는 사자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십니까? 수년 전 내가 젊었을 때 여러 무리의 반대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원수들이 벌써 나의 그리스도에게 먹이가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나의 성질과 문제들과 약함들 그리고 나의 모든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먹이였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그분은 더이상 싸우지 않으시고 휴식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누워서 안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도 또한 그분을 안식하는 사자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휴식하시고 나 또한 안식합니다.

출처 : 창세기 라이프스터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9. 05:00


재평가 된 지방교회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는 최근 “재평가 된 지방교회”(DCP Korea 출판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한국교회에서 지방교회가 오해와 편견으로 ‘이단 정죄’를 받게 된 배경과 지방교회가 어떻게 반론을 펴 왔는가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지방교회(local Churches)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미국에서 발간된 두 권의 책이 번역 소개되면서 비롯됐다. 하나는 영적사이비연구소(SCP) 닐 더디가 발간한 ‘하나님-사람(The God-Men)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투트(CRI)가 발간한 ‘신흥이단들’(The New Cults)이다. 

1982년 현대종교에서 ‘신흥이단들’을 상당부분 원문과 다르게 번역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 워치만 니 계열의 지방교회는 이단인가?”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전도출판사가 ‘하나님-사람’을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그러나 “The God-Men”은 미국에서 지방교회를 왜곡하고 폄훼했다는 이유로 법적 소송에 의해 출판금지되었고, “The New Cults”를 낸 CRI는 “우리가 틀렸었다”며, 지방교회에 대해 재평가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이 두권의 책을 진실인양 믿고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했음에도, 이들 책이 왜곡되었음이 확인된 이후에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는 않는다고 이 책은 항변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한국에서는 한 번 이단으로 정죄되면, 영원한 이단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번 이단의 누명을 쓰게 되면 벗기가 아주 어렵다는 뜻이다. 일단 이단감별사들의 표적이 되어 교계신문에 오르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인격적인 살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며, 지방교회도 이런 식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에 ‘재평가 된 지방교회’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출판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신국판 320쪽/값 12,000원/문의 010-3515-3927>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8. 05:00

미국 풀러신학교 지방교회를 ‘정통’으로 인정


미국 풀러신학교 지방교회를 ‘정통’으로 인정


“지방교회의 관심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이기는 자가 되게 하는데 있다”


한국교회에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대부분은 이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커녕 지방교회란 말조차 생소할 것이다. 인터넷상의 부정적인 자료에 의해 그려진 지방교회 사람들은 자신들만 잘 믿는다며 다른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고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다. 혹자는 지방교회 사람들은 이상은 높은데 실제 생활은 그에 못 미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방교회 성도들에 대한 외부인들의 이러한 평가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되짚어 본다면 현실 교회에서 어떤 비판의 여지도 없이 완벽한 교단이나 단체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 약함이 있다. 그런 점에서 특정 단체가 지향하는 핵심신앙이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3절)에 부합한지는 냉철히 따지되, 성경해석상의 소소한 차이나 약함과 허물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는 아량이 필요하다.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길이다(엡4:3). 

이런 차원에서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교회가 과연 무엇에 신앙의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본인들에게 직접 들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복음서원에서 출판된 각종 도서나 현 지방교회 인도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 ‘생명’ ‘그리스도의 몸’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의 주제다. 

  1. 하나님의 경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책자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워치만 니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표현함). 지방교회측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인, ‘내가 마케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다’(딤전1:3-4)라는 말씀을 자신들에게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창세전에 선택되고 예정된 우리가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엡1:4-5). 성경 말씀 그대로이니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긴 어려울 것 같다. 

  2. 생명 
‘생명의 인식’ ‘생명의 체험’ ‘생명의 성장’ ‘이기는 생명’ ‘생명주는 영’ 등 지방교회 사람들은 생명이란 단어를 유달리 많이 사용한다. 이들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는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이 오신 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물론 그분은 우리 죄사함을 위해 죽으셨지만 그 죄 사함조차도 결국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절차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 25),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 등에 근거하여 <주님 자신이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몸 
지방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지체들 간의 조화와 기능발휘가 현재의 교회생활 중에 실현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고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각양 봉사는 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적인 출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엡4:12,16). 실천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4. 이기는 자가 됨 
성도는 누구나 ‘이기는 자’여야 한다. ‘이기는 자’라는 말은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 각각의 말미에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모두가 비중있게 다루었던 주제이다. 이들이 말하는 이기는 자란 쉽게 말해 거듭난 후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영적생명이 성숙한 자를 말한다. 계시록 3장 12절의 필라델피아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이기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와 달리 특별한 상급이 주어진다. 따라서 모두가 이기는 자일 수 없고 추구하여 그 표준에 이른 자만이 이기는 자라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되려면 일상생활에서 자기 유익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하고 매사에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빌 1:21). 

소위 ‘지방교회 교인이 되어야만 이기는 자가 된다’고 가르친다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지방교회 교인이 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다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소위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생명과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하고, 이기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행상으로는 만인 제사장 제도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런 사람들을 성경의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성경의 중점을 붙잡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것일 수 있다. 

혹자는 위와 같은 진리와 실행은 다 좋은데 이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지나치게 따르는게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다. 즉 뛰어난 두 성경교사를 존경해서 그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와 계시를 따르는 것이지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당신은 모든 것들에서 얼굴을 돌려야 한다. 여러분의 방 친구를 보지 말라. 장로들을 보지 말라. 나이든 자매들을 보지 말라. 나를 보지 말라. 예수를 바라보라...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말라. 우리는 주님을 신뢰한다. 우리는 그밖에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온전케 하는 이시므로, 우리의 믿음은 바로 예수시다.”(위트니스 리, 고봉메시지 제11권 - 로마서 결정연구). 

그동안 한국 교계는 지방교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거나 일부 이단 감별사들이 특별한 의도를 전제로 연구한 자료에 의존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풀러신학교측에서 지난 2년여 동안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신앙고백이 주요 신조와 일치하는 정통이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제가 가능한 주 안의 형제들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방교회를 이단시하고 형제로 여기려 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 교계 내에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특정 교단 교리가 아닌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특정교회가 믿는 진리와 실행에 관해 재평가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한국의 지방교회 인도자들이 전과 달리 다른 단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4 , 교회연합신문 660호 다운로드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660호060820_편집.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1. 05:00


왜 나는 지방교회들에 대한 비판을 그쳤나


더 이상 위협이 없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임

최근 지방 교회 운동에 대해 최초로 비판을 가해 이단 논쟁을 촉발했던 미국의 CRI가 지방 교회를 재평가해 ‘정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기관의 소장이 한기총 대표회장에게 지방 교회에 대한 재평가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지방 교회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지방 교회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CRI가 발행한 지방 교회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아 연재한다. 이 내용에 대한 건전하고 발전적인 반론이 제기될 경우 그 또한 가감없이 게재할 방침이다. -편집자 주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

나와 작고한 나의 남편인 밥 파산티노(Bob Passantino)는 1975년에 미국에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을 출판물을 통하여 처음으로 비판했다.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 (CARIS, 1975)은 1962년부터 미국에 존재해 왔고 공개적으로 악평을 받아 온 운동에 대해 우리(그리고 우리의 조직인 CARIS) 와 CRI 설립자인 월터 마틴(Walter Martin)이 분석이 필요하다고 믿어서 조사한 것이다. 5년에 걸쳐서 다른 출판물들이 이어졌다. 즉 내 동생인 칼 바이즈너(E. Calvin(Cal) Beisner)와 나의 남편 밥(Bob) 그리고 내가 공동 저술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CRI, 1978), 월터 마틴의 오디오 강연, 칼 바이즈너와 내가 써서 월터 마틴의 책인 <신흥 이단들>(비젼 하우스, 1980)부록에 첨부한 것이 그것들이다. CRI 연구원인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 역시 조사, 편집, CRI 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을 돕는 토론에 참여했다. 그후 1980년까지 CRI는 단지 짤막한 요약 정보와 몇 번의 최근 뉴스 정도를 출판했다. CARIS나 밥과 내가 나중에 만든 단체인 ‘행동하는 답변들’(AIA)은 그 주제에 대하여 그 외에 어떤 것도 출판한 적이 없다.

비록 여러 단체들이 전에 그리고 그 이래로 비평글들을 출판했지만, CARIS와 CRI가 부정적이고 공개적인 폭로를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일부 출판물들은 신학적인 평가에만 제한되지 않았고, 일부는 선동적이고 인격을 손상시켰음으로 지방교회들(LC)이 법적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도록 만들었다.

지방교회들이 두 번의 법적인 소송에서 우세한 이후, 1999년에 존 앵커버그(John Ankerberg)와 존 웰던(John Weldon)이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ECNR)>을 출판하기 전까지는 비평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무렵 쯤, 월터 마틴과 밥 파산티노가 작고했고(1989년과 2003년), 칼빈 바이즈너는 이단 비평계 현장을 떠나 공부를 더 한 후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1992-2007), 행크 해나그래프(Hank Hanegraaff)는 CRI의 대표에 취임했고(1989), 엘리옷 밀러는 CRI에 CRI 저널의 편집장으로 머물렀고, 나는 계속 AIA 의 대표로 있었다. ECNR의 출판은 행크와 엘리옷과 나를 논쟁에 복귀하도록 이끌었다. 왜냐하면 ECNR의 사실에 대한 그릇된 진술과 명예훼손적인 모습(nature)은 지방교회들, 특별히 종교의 자유와 투옥을 포함한 그 외의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중국 본토 내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가혹하고 부당한 해악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엘리옷과 나의 초기 경력 가운데 과거 신학적인 조사가 해 왔던 것과 CRI대표인 행크를 위한 역사적 문서는 이제 그러한 초기 작업들을 재평가하고 우리의 성경적인 위치가 지방교회들을 변호하고자 한 것인지, 또는 단지 우리의 질투심 있고 무책임한 동료들 (앵커버그와 웰던)을 조용히 바로잡으려 한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급박하게 재촉했다. 지방교회들이 ECNR을 중재해 달라고 우리에게 접근해 왔을 때, 우리는 어떤 필요한 구속이나 화해 또는 정정을 이끌어 내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갈망했었다. 우리는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상호 접촉, 긍휼어린 사랑 그리고 문맥을 감안한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함을 배웠다. 밥(Bob)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미국에서 이 운동에 대하여 처음으로 출판한 사람들로서 우리가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고 과연 분석이 옳았었는지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그는 확고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이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죽었지만, 나는 그가 지금 행크와 엘리옷과 내가 지방교회들이 본질적인 교리에 있어서 정통이고, ECNR에 의해 명예를 훼손당하고, 비판을 받게 했고 특히 중국에서 지방교회들의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자유를 박탈당하도록 우리가 해악을 끼친 것을 확증하는 일에 기꺼이 함께 했을 것을 안다.

엘리옷의 책임은 본질적인 지방교회 신학을 재검토하고 혐의를 벗겨주는 것이다. 나의 책임은 왜 우리가 처음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요약하는 것과 나의 동료 이단 변증가들에게 우리가 했던 것처럼 재조사와 보다 많은 증거들을 포함하거나 적어도 원래의 잘못된 조사에 근거하여 지방교회들을 정죄하는 일을 삼가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LC 가르침을 접했을 때, 우리는 문제가 우리 쪽의 오해보다는 그들 쪽의 이단성 또는 혼동에서 생겨났다고 가정했었다. 우리와 월터 마틴은 늘 지방교회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기를 삼가했다. 우리는 “정도를 벗어난”(aberrant)이라는 용어를 선호했고, 비록 우리가 본질적인 교리들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 중 일부가 좋게 말하면 모순되고 나쁘게 말하면 이단적(heretical) 이라는 신념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 자매들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우리는 리의 단호하게 표현하는 자극적인 습관, 즉 언뜻 보면 모순적인 문장인데 그후 그의 다른 본문 속에서 그것들을 설명하여 이단과는 구별짓고, 또한 가끔씩은 자극적인 문장들에서 멀리 벗어나는 습관을 오해했었다. 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학생들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추정하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서 이것은 혼동 그리고/ 또는 이단이라는 징후였다.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직접적인 상호 접촉과 연계된 보다 방대한 양의 자료들에 대한 우리의 최근 조사는 그러한 가르침들이 모순되지도 않고 이단적이지도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 특히 외부인들에게 혼동스러울 수 있음을 확신한다. 

둘째, 우리가 1970년대에 연구했던 자료는 다음 세 가지 주된 이유들로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부족했었다. (1) 그 당시는 미국에서 (영문) 출판물이 많지 않았었다. (2) 상당 부분은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는데, 특별히 지방교회 성도들이 우리가 단지 비판하기 위하여 인쇄된 어떤 자료를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꺼려 하게 되었을 때 그러했다. (3) 인쇄물로서 사용가능했던 것의 대부분은 방어용도 아니고 변증 글도 아니었다. 대신에 혼동을 명확히 하고, 이단적이라는 오해를 방지하려는 경험있는 형제들의 인도아래 성도들을 위한 가르침의 보조 도구 수단이었다. 더욱 깊은 결함은 자료들 자체보다도 오히려 우리의 경력들 중에 그 초기 당시 우리의 학문적인 깊이와 넓이에 있었다. 리의 유산은 동방이며 서방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합리적이고 교훈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단지 문화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오류라고 의심하게 했다. 역설 그리고/또는 의미가 있는 명확히 함의 뒤로 미룸-부조리, 앞뒤가 맞지 않음, 또는 단지 상대적임 때문에 혼동될 수 없는-은 동양적인 사고와 초기 시대의 서구의 저술 속에서는 흔한 것인데, 현대 미국 저술에서는 실질적으로 잊어져 왔다.

셋째, 니와 리의 신학적인 접근은 서구 기독교계, 특히 개신교주의, 보다 특별하게는 복음주의 진영들, 각별하게는 이단 변증분야의 조직신학과는 달랐다. 지방교회 신학은 보다 실제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신학적이고 이성적인 페러다임을 묘사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특히 핍박과 반대아래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한다. 이런 면에서 지방교회 신학은 지방교회 교사들은 그들이 동방교회로부터 배웠거나 그들의 신학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y)와 유사하다. 이 패러다임이 단지 다른 것만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나타났었다. 

넷째, 우리는 지방교회들의 가르침들을 그들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들과 분리시킴으로 몇 가지 그들의 독특한 경험들을 이단성의 확증들이라고 잘못 이해했다. 지방교회들은 중국에서 유래되었고, 미국처럼 서구 유럽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동양적인 사고방식, 아시안의 문화적인 관습들, 그리고 오랜 뿌리들은 지방교회들 안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인의 삶(Christianity)에 독특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한 번도 노예가 되거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미국 복음주의자들, 더 구체적으로 “유럽계통” 기독교계는 사실상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예됨과 침략을 경험해 온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적으로 아편전쟁과, 철도 노동자로 부려먹고, 미국에게 “속여서 싫은 일을 하게 시킴” (“Shanghaied”)을 당하게 한 것과 연관된 유럽계통 기독교계는 최선으로는 호소력이 없고 최악으로는 위협적이다. 중국인 그리스도인이 믿는 이들의 모임에 있어서 그 지방(“로마에 있는 교화”) 이외에 다른 아름이나 구별이 없는 신약의 실행을 볼 때 이러한 관점은 침략자들인 로마 카톨릭교 또는 shanghaiers 의 개신교주의에 대한 교정책 이상인 것이다. 우리가 적절히 지방교회의 가르침을 그들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관계 안으로 둘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교회이다 “ 라는 배타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대신에 “모든 참된 믿는자들과 같이 우리는 단지 참된 교회이다”라는 비배타주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방교회들과 대다수 미국교회들의 차이들은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신약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들과 아주 유사하다. 양쪽 집단들은 참된 믿는 자들이다; 그것은 2 세기의 지식을 가진 이단자들과 같은 시대의 정통의 참된 믿는 이들 간의 차이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대부분이 단지 지방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국인이나 유럽인 LC 믿는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여겨진다.)

다섯째, 우리와 지방교회들 모두가 성숙되지 못했고, 경험이 부족했고, 때로는 냉담했기 때문에 지방교회들은 잘못 판단해 왔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단지 복음적인 미국 개신교주의 만을 경험했고; 우리는 주로 조직신학을 공부했고; 우리는 추론적, 논리적, 증거상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변증론법을 전개해 왔다; 우리는 좀 더 주의 깊게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상대론인지 주관론인지 혼동되지는 않는) 종종 흑백 논리,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로 판단해 왔다. 예를 들어 그들의 자료들을 읽는 것에 대해 부적절하게 개별적 대화를 무시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서들에서 지방교회들이 오직 하나뿐인 참된 교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것들을 배타적인 글로 이해했고, 그들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미를 볼 때, “장로교” 와 같은 구별되는 이름에 의해 서술되지 않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이 모호하게 여겨졌다. 만약 우리가 모호하게 추정하지 않고 개별적인 대화에 참여 했었더라면, 우리는 지방교회들의 행동이 지난 5년 동안에 걸쳐 발견했듯이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의 초기에 양쪽이 모두 쉽게 노여워했고, 화해하는데 더디었고, 더 빨리 기만으로 결론을 내었고, 공개하는 것을 격려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의 신학적인 검토에서 엘리옷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것들과 다른 이유들은 우리가 지방교회들은 어떻게 잘못 판단해 왔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호소하는 결정에 이르렀고, 특별히 나의 동생 칼빈 바이즈너, 월터 마틴과 밥 파산티노는 작고했다. 행크 해나그래프는 나의 초기 연구 후에 CRI로 돌아왔다. 공개서한에서 “증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1981년 전에 우리의 잘못된 판단을 가져오는데 처음으로 사용한 증거와 같다. 엘리옷과 나는 그 증거를 재조사 해 왔다. 더욱 중요하게 우리는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상호 접촉을 가졌고, 지금은 그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내용 면에서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점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량의 자료들을 검토했고 상당히 많은 지방교회 성도들과 인터뷰해 왔다. 칼(Cal)은 원래 자료들을 재조사 해왔다. 그는 지방교회 일원들 그리고 인도자들과 직접적인 상호 접촉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칼은 인도그룹이 그들과 엘리옷과 내가 이단이 아니라고 믿고 부인할 필요가 없는 글을 번복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자료들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재조사를 해낼 수 있는 3명의 현존하는 변증자들 중에 두 사람은 그렇게 해왔고, 우리가 틀렸고 지방교회들의 가르침들은 이단이 아니며, 그들은 유사종교 또는 신흥종교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째는 우리의 노력부족으로 해 내지 못해 왔고, 칼은 여전히 지방교회들의 가르침은 이단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진실성을 보여주는 결론은 어떤 것인가? 엘리옷과 나는 칼이 자신의 원래 입장을 고수하는 것보다 우리의 번복이 더 타당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나는 초기에 이러한 주제를 재조사하는 것을 꺼려했었다. 첫째, 나는 다른 필요들에 몰두해 왔었다. 둘째, 나는 나의 변증법적 연구에 거의 틀린 적이 없었고, 재조사를 위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를 거의 정당화할 수 없었다. 세째, 그것은 참된 정통성이라기보다는 지방교회의 정통신앙으로 보이도록 속이는 것으로 간주하기가 쉬웠다. 네째 지방교회들이 일반적인 복음적 미국 개신교 주의와 구별되게 나타났다는 것과 그 가르침이 이단이라는 암시(확실성은 아니지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다섯째, 나는 한 이단 단체 (the Worldwide Church of God, 전세계적 하나님의 교회)를 보아 왔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단교리를 부인하고, 정통교리를 받아들였으며, 잘못한 형제에게 사과하는 것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여섯째,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일곱째, 이단은 적어도 잘못 이름 지워진 정통 단체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편이다.

내가 새로운 조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한 요인은 나의 동생 칼과 공유하는 한 가지 점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이 우리 자신의 연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것에 기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만 한다. 공개서한의 서명자들은 많은 변증자들이며 밥과 월터와 엘리옷과 칼과 내가 1970년대에 한 연구보다 더 광범위한 연구를 하지는 못했다. 우리 중에 3명은 현존하고, 그 중 2명은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에 잘못했다고 했었더라면 적어도 몇몇 서명자들은 그들이 우리가 지금 한 것 만큼의 좋은 연구나 우리가 예전에 했던 보다 나은 연구를 수행할 시간과 역량이 없었을지라도, 지방교회들을 계속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꺼려했었음에 분명하다.

이전의 나의 연구(밥과 월터와 엘리옷과 칼에 의해 공동연구하고 발전된)는 나의 결론이 틀렸었다고 평가하기엔 불충분 했다. 나의 현재 연구(행크와 엘리옷에 의해 공동 연구되고 발전된)는 예전 것보다 꽤 깊고 광범위하며, 예전의 나의 결론을 번복할 정도로 충분하다. 공개서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명했는지, 얼마나 여러 번 동일한 부적절한 출처가 인용되었는 지와 상관없이, 저널의 논쟁에서 지지된 결론이 진실의 장에서 더 지배적이다. 지방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믿고 있고, 이단 안에서 믿는 자들로서 대립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그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다른 변증자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같은 깊이의 문제에 재차 참여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비판을 철회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형제를 비난하는 죄의식이나 이단이라고 받아들이는 잘못된 위험에 놓여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다시 다루지 않아야만 하는 영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레첸 파산티노 코번은

‘행동하는 답변들’(AIA)( http:// www.answers.org)의 설립자 겸 이사이고, 다작하는 저술가이며, 신학교 조교수이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어바인) 비교문학 학사와 믿음 복음주의 루터교단 신학교(Faith Evangelical Lutheran Seminary) (Tacoma, WA) 신학 석사를 가지고 있다.



류재광 기자 입력 : 2010.06.28 06:00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09355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6:10

성경말씀  

(엡4:21~24)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 곧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 버린 것이며,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침례 받았을 때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침례를 받았을 때 매장되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의 ‘생각의 영’은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으로서, 그것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연합된 영은 우리 안으로 확산되어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하여 새롭게 되는 것은 그러한 영 안에서입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그분의 몸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이 아니라 단체적입니다. 이 단체적인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는 만유이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즉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옛사람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은 없었던 반면, 새사람은 내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 지방교회들, 생명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6:05

 

성경말씀

(요일4:7~8)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믿는이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의 표현이 된 사랑을 가지고 습관적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사도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신성한 출생인데, 이 출생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이 믿는이들 안으로 분배되었고, 이 생명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생명 능력을 줍니다. 이 신성한 출생은 형제 사랑의 기본 요인이며, 이 형제 사랑이 주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기 위한 더 높은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신성한 출생으로 받은 신성한 생명의 아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지도 않고 생명이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6:00

 

성경말씀

(계3:20~21)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이기고 나서 나의 아버지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나의 보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해 주겠다.

오늘의 만나

주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문은 교회의 문이지만 그 문은 개인적인 믿는이들에 의해 열려집니다. 주님은 전체 교회를 다루고 계시지만 주님의 다루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다루심은 객관적이지만 믿는이들이 영접하는 것은 주관적이어야 합니다. 21절에서 주님은 또한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이기고 나서 나의 아버지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나의 보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해 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타락한 회복된 교회의 미지근함과 자만심을 이기는 것과 필요한 항목들을 사는 것과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는 것은 장차 올 천년왕국에서 주님의 권위에 참여하는 이기는 자들에 대한 상이 될 것입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5:55

 

성경말씀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파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팔레스타인에는 두 개의 바다가 있습니다. 모두 요단강의 범람으로 생겨난 바다입니다. 그중 갈릴리해는 해안을 따라 야생초가 피고 포도가 무성합니다. 바닷 속에는 비단 물고기가 헤엄치고, 수면은 오색으로 빛나며, 아름다운 경치는 마치 가나안 같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네 명의 사도 역시 그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바다를 의지해 부족함 없이 생활해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해는 바닷물이 짜서 어류들이 생식하기 어렵습니다. 해안에는 식물들도 자라지 못합니다. 갈릴리의 바닷물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물이 맑고 많은 생물이 자라지만, 사해 바닷물은 흘러 들어오기만 하고 빠져나갈 곳이 없으므로 정체되어 죽은 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의 교통을 통해 한면으로는 받아들이고, 또다른 한면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지 않는다면 점차 사해가 될 것입니다.

출처 : 온전케 하는 예화들1, 지방교회 생명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5:50

 

성경말씀

(마6:6) 그러나 그대는 기도할 때, 그대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오늘의 만나

페르시아의 한 재상은 황제가 자기의 업적을 추켜 세운 적이 없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자신의 내실에 목동 시절에 사용했던 지팡이며 행장, 물병 등을 진열해 놓았습니다. 그는 매일 시간을 내어 이전의 생활을 회상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황실의 부귀와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예방책으로 삼았습니다. 다윗 왕 역시 그의 목동 시절의 생활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의 내실이 있었는데 항상 그곳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쓴 시편 23편은 그가 성년이 된 후의 경험과 양 떼들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분명한 기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제,자매님들이여! 당신에게도 이러한 내실이 있습니까?

출처 : 온전케 하는 예화들1, 지방교회 생명 이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