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7. 05:00

하나님의 경륜 적용하기 - 율법과 그리스도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하나님의 경륜 적용하기 - 율법과 그리스도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우리가 알듯이 바울이 딤전1:4에서 말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자신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에 분배하심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단체적인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본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그의 온 힘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골1:28).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보지 못했던 시절의 그는 가는 곳마다 옳은 것으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인생을 살았었습니다(딤전1:13, 빌3:6).
 
 

생명되신 그리스도 자신을 살고 공급함으로 사람의 참된 필요를 채우는 길을 걷는 사람과 성경이 하라 하지 말라고 한 율법적인 요구에 묶여 결국 사람들의 참된 필요를 외면하고 오히려 정죄하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열매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사울의 대비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2장을 읽었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사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안식일 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도 잘못이 없다며 그들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셨습니다. 물론 '그들의 참된 필요인 배고픔'도 돌아보는 마음이 있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이에 더하여 비록 안식일이긴 하지만 손이 오그라들어서 불편한 사람의 참된 필요도 관심하셨고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제단에 차려 놓았던 진설병을 먹었으나 죄가 되지 않았던 사실(삼상21:6),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은 점(민28:9-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안식일 제물을 드리기 위해 일해야 했음),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점(호6:6) 등의 진리적 당위성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는 사실만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을 두둔할 뿐아니라 한 수 더떠서 자신이 직접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을 깨뜨리신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안식일을 범한(그들의 눈에) 주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counsel)를 열었습니다 (마12:14). 

이러한 사건은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에스겔 20:12, 신명기 5:15 등의 구절들을 예수님을 정죄할 근거말씀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 자신은 성경을 잘 지키는 정통이지만, 성경내용의 바로 그 주인공이신 주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이단이요 비성경적인 분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단편적인 성경지식은 있으되 그러한 안식일의 주인(마12:8)이신 주 예수님 자신을 보는 영적인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을 보는 눈이 먼 것이 소위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한 부분만을 붙잡고 '배고파 밀 이삭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때 그들은 배고파 밀 이삭 잘라 먹는 사람들을 위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주고자 하시는 그들의 주인 그들의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시고 품으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짓밟고 정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주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데서 더 전진하여 주님 자신까지도 극렬하게 반대하며 저지하고 심지어 죽이려 듭니다(마12:14).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데 이러한 그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밖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공격받고 그영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없이 다만 사랑하시고(요3:16) 그들에게 주님자신인 생명을 주시고 또 주심으로(요10:10) 그들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인 주님자신으로 충만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가시고(엡1:23) 마침내 거룩하고 흠없는 신부로 단장해 가시는(고후11:2, 계19:7, 21:2, 9-10) 현재의 주 예수님의 일 하심에 다만 아멘하고 동역하기를 갈망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2.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에 소속된 분들은 일반 성도들이 잘 못들어 본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경륜'이란 말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뭡니까?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인데, 한국복음서원에서 펴낸 '하나님의 경륜'(위트니스 리)이란 책을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예, 기회가 되면 한번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거기서 오래 생활하셨으니, 나름대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한번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이해한 하나님의 경륜을 조금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경륜은 위트니스 리나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성경 용어입니다. 디모데 전서 1장 4절을 보면 나옵니다. 거기서 앞 뒤 다 빼고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란 말만 마음에 담아 두셨으면 합니다. 

  -제가 '경륜'이란 단어를 검색에 쳐 보았더니 일곱명이 하는 자전거 경주 이야기가 나오던데,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거구요. 아, 저 사람은 얼굴에서 경륜(연륜)이 느껴져 라는 식으로 일이나 조직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예, 저도 호기심으로 경륜이라는 단어를 검색에 쳐 본적이 있는데, 진짜 '창원경륜공단' '한국 경륜선수위원회' 이런 단어들이 뜨더라구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두 방면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 단어 원문의 의미를 푸는 방식이구요, 또 하나는 그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쓰인 내용들을 몇 단어로 압축해서 요악하는 식입니다. 우선 '경륜'이란 말은 위 디모데 전서 1장 4절 말고도 엡1:10, 3:2, 9, 골1:25, 고전9:17 등에서도 쓰였어요. 헬라어 원문은 '오이코 노미아'입니다. 이것은 '집'의 의미인 '오이코스'와 '관리'의 의미인 '노모스'의 합성어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집 관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따라 말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주님자신', '분배' '표현' 이 세 단어로 압축해서 정의할 수 있어요. 

  -주님 자신을 분배해요? 아무리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으려고 해도 '분배'라는 말은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실 겁니다. 사실은 저도 처음에 그랬거든요. 그래서 나름대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할 성경 구절들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위 고전 9:17을 보시면 개역성경으로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오이코노미아'인데, 이것을 KJV은 'dispensation' 이라고 번역했어요. 그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찾아보시면 첫 의미가 바로 '분배' 또는 '나누어 줌' 입니다. 

 즉 바울이 위 구절에서 '직'을 맡았다고 했는데, 무슨 직분인가 하면 쉽게 말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생명으로 나누어주는(소개하는) 직분입니다. 그런 직분을 통해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믿고 영접하게 되는 소위 복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조금 인위적으로 느껴지시면 좀더 설득력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요한복음 10장 10절 후반절이예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양들인 우리 편에서는 생명을 얻고 또 얻는 것이지만, 생명을 주시는 그분 편에서 보면 생명을 주고 또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명을 분배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분배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지요. 그런데 생명이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에 근거해 보면 주님자신이 생명입니다. 

 이처럼 '주님자신' '분배'가 이뤄질 때 나타난 결과가 바로 '표현'입니다. 사람 안에 생명이 처음 분배된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계속 분배되는 생명을 그 거듭난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라서 성숙하게 합니다. 이런 거듭난 사람들, 생명이 성숙한 사람들은 불신자와는 다른 어떤 예수 믿는 냄새가 납니다. 얼굴에서 그들의 말에서 생각하는 관점에서...그것이 표현입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주님자신이 우리를 통해 안으로부터 충만히 표현되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엡1:23)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계21:11). 

 질문은 짧은데 어찌하다보니 제 답이 너무 길어것 같아 죄송하네요. 

  -예, 나름대로 성경을 토대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계시구나 하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내용들이 다 이해가 된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번 찬찬히 검토해 보고 추가 질문이 있으면 나중에 또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참고로 시간이 나시면 엡1:4-5, 3:2-6, 골1:24-29 등도 함께 연구해 보시면 제가 오늘 설명드린 내용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좋은 시간 가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럼 나중에 또 뵙지요. 안녕히 가세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4:35
성경말씀 

 (눅16:10) 가장 적은 것에 신실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신실하고, 가장 적은 것에 불의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불의합니다. 

 오늘의 만나

 
 신약경륜에서 신약의 믿는이들이 물질적인 소유를 관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그분께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대상29:14, 16),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고(롬8:20~21), 악한 자인 사탄에게 강탈되었습니다(요일5:19). 따라서 그것들은 타락한 사람에게 속해 있고 불의합니다(눅16:9). 하나님은 이 시대의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 믿는이들의 매일의 필수품을 공급하시며, 이 시대에 그분의 청지기들에게 이 물질적인 재산의 일부를 맡기시어, 그들이 훈련받고 배우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음 시대에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그들은 이 재산 중 어느 것도 그들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다음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믿는이들은 세상을 상속받고(롬4:13), 그들 자신을 위해 변함없는 소유를 가질 것입니다. 이 시대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주신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 신실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그들이 오는 시대에 얻게 될 영원한 소유에 대하여 신실하기를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출처 : 감추어진 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1. 16:55
골3:10-11  새샤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사랆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로새서 3장3절과 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시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심을 본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새사람의 조성 성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새사람의 유일한 조성 성분이시기 때문에, 새사람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미국인과 중국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노예와 자유인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 새사람 안에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신다. 나는 이 이상을 봄으로써 우리 속에서 깊은 열망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 ,저는 당신께 점유되고 사로잡히며 당신의 소유가 되기 원합니다. 저는 제 속의 모든 공간과 여지를 완전히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체험하는 일에서 제한 받거나 좌절되기를 원하신 않습니다. 저는 어떠한 제한이나 재약이나 얽매임없이 당신을 누리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문화가 아닌 오직 당신만을 얻기 원합니다. 저는 어떤 종류의 문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에 의해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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