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당신을 존경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참된 관심거리인가, 무엇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 저의 경우는...'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솔직히 가슴이 벌렁거릴만 하지는 않지만 귀가 솔깃하긴 합니다. 누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말하는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얻었는지 이런 것이 제겐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오늘 아침엔 어제 밤에 비가 와서 그런지 더 을씨년스러웠습니다.
빗물이 먹어 무거운 나무로 된 차고문을 들어 올리고 차가운 감촉의 차 문을 열고...냉기가 있는 차 안에 들어가 부르릉 시동을 걸었습니다.
오 주예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 주님... 예전처럼 차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서 집회 장소로 갔습니다.
집회소 문을 열고...저는 컴컴한 유아 방으로, 저의 자매는 윗층 방으로....
오! 주 예수여! 이 시간 주님을 앙망합니다.
바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처럼 당신 자신을 내게도 계시하여 주옵소서! 내게서 수건을 벗겨 주소서! 주님 자신을 더 알게 하소서!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깜깜한 방 안에서 이리 저리 거닐면서 존재 깊은 곳에서 그분을 앙망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경의 중점들이 만져졌습니다.
구약은 무엇인가?
오실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중점은 무엇인가? 그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
오 주님! 그러나 이런 것들의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다음 세 가지 중점들이 다시금 깊이 만져졌습니다.
1.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힘써 증거했다.
저는 처음에 신약을 읽다가 사도 바울이 회심 한 후
'예수가 그리스도심을 힘써 증거했다'(행9:22)는 기록이 여러 번 쓰여진 것을 보고, 그거 당연한 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구약의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야인 '그리스도'와 나사렛 촌 동네에서 두 부모가 다 사람인 가운데 난 '사람 예수'를 동일인으로 연결 짓는 일이야말로 큰 주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굳은 유대인들은 절대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는 주' 또는 '주 예수' 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고전12:3).
오! 주 예수여!
이 아침에 고백컨대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2. 바울은 얼마나 이 그리스도 알기를 힘써 추구했던가?
바울은 빌립보서 3:10 에서 '그리스도를 알려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주여 뉘시오니까? 물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알았지 않은가.
또 갈라디아서에서는....그 아들이 자신에게 계시되므로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자기 보다 사도된 예루살렘 '영적 거인들'도 안 만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정도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만큼 안 것 아니야?
뭘 또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의 참예함을 알기 위해서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겠다고 하는가?
이런 묵상이 이어지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골2:2)이심이 생각나면서
에베소서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아는 것'(이해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엡3:18-19).
오! 내가 지금까지 아는 그리스도는 얼마나 제한적인지 이런 묵상 가운데 다음 요점이 떠올랐습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해서 과연 그 중점을 아는가?
어떤 시골 사람이 하루 예정으로 서울에 와서 남산 타워가 보고, 덕수궁가 보고,
남대문 시장 둘러보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에 대해서 전혀 백지였던 그에겐 서울 하면 남산 위 타워 모습이 그려지고, 덕수궁과 남대문 시장에서 보고 겪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날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가서 서울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신나게 그리고 생생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남산 타워, 덕수궁, 남대문 시장이 서울의 전부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셋이 서울을 말할 때의 중점인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점은?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다 등 뭔가 포괄적이고 중심이 되는 개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말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파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성경이 중점적으로 말하는 그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엔 짧은 기간 동안에 선명하게 스치고 지나간 것들인데 말로 이해가 되도록 표현하려니까 길어지고 자꾸 살이 붙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신 사건 '그리스도의 죽음'...이것은 끝낸 것이다.
뭘 끝내? 엣사람, 옛창조...죽음을 통과할 수 없는 없는 모든 것들을 끝낸 사건
'그리스도의 부활' ....새창조의 발아 '그리스도의 승천'...왕으로서의 취임식....이런
예전에 보고 배웠던 것들이 새롭게 기억이 나면서, 주님이 우주의 참 실재와 중심이라는 빛이 더 선명해 졌습니다.
약 30 여 분간의 묵상(?) 내지는 주님을 앙망하는 시간이 순간처럼 지나가고....저는 다시 성경을 펴서 디모데 전서 1:3-17 말씀을 먹고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대 다른 가르침'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런 말씀의 씻겨짐의 시간들이 있은 후 다시 2층에 모여서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그 날의 읽을 말씀을 먹고, 약간의 교통을 하고 아침부터 시작되는 하루 스케줄에
들어 갑니다.
한 사람은 집회소에서 나오자마자 차타고 오는 중에 핸드폰으로 한 형제님과 아침 부흥을 하고...한 형제님은 생선 팔러 가시고, 한 자매님은 아이 챙겨서 학교 보내고
일하러 갈 준비하고
....
하루 중 이런 저런 일들이 지나가고 많은 것들을 만지지만 깊은 중심 안에서 놓칠 수 없는 관심은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