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마지막 때까지 “두 남자가 밭에 있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다가”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밭을 갈고, 맷돌질하는 등 여전히 주어진 생업에 충실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위 본문을 묵상하면서 깊이 다가온 말씀은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두고 우리에게 명령문 형태로 요구하는 한 가지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앞으로 어떤 환경이 닥쳐오든 “그분 안에 거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느 때 우리 앞에 나타나셔도 여전히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영, 즉 연합된 영 안에서 늘 그분 안에 거합니다(고전 6:17).
또한, 이 연합된 영이 우리의 혼을 통과하여 우리의 삶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의가 표현된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보고 그가 거듭난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요일 2:29).
그러나 우리 안의 기름 바름의 가르침(요구)을 거절하고, 대신에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과 자신의 감정대로 살아갈 때, 주님과 우리의 혼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과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제게는 위 ‘그분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가능하면 이러한 불일치를 만들지 말며, 부득이하게 그런 상황이 생겼다면 빨리 주님께 돌이켜 죄들을 자백함으로써 그분과의 교통을 회복하고 또 계속 유지하라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3) 그분 안에 거하지 못한 채 그분이 오시면 어떻게 되나요?
추구하면서 바로 이 부분이 본문에서 가장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개역 성경은 언뜻 읽으면, 주님 재림 때에 당연히 담대함과 부끄럽지 않음을 얻을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회복역은 해당 부분을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번역해서, 본문에서의 부끄러움(혹은 수치 당함)이 재림하신 주님(의 임재)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임을 더 선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 ‘아포’를 일부 번역처럼 ‘before’(앞에)가 아니라 ‘from (Him)’(로부터) 혹은 ‘away from (Him)’(로부터 멀리)라는 원래의 뜻을 살려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몰래 어떤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갑자기 불이 켜지자, 스스로 빛을 피해 다른 곳으로 숨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지금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능하면 늦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든 그 날은 올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재림이 어떤 이들에게는 아래 말씀처럼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서 떠나가십시오(마 7:23).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24:51). (이것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과 그분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져, 신실한 노예들이 누리게 될 왕국의 출현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각주 1).
-그러자 왕이 종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22:13).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은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기는 생명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천년왕국 동안 왕국의 누림에 참여할 자격을 얻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다룸을 받는 것이다.-각주 2, 오는 왕국 시대에 바깥 어둠 속에 던져지는 것은 천년왕국 후에 영원토록 불 못에 던져지는 것과 다르다.
어떤 분들은 위와 같은 말씀을 불신자를 가리킨다고 오해하나, 전후 문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다른 부류에게 돌려서 억지 평안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타조가 다급히 쫓기다가 모래 속에 자기 머리를 파묻고 상황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