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1. 05:00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형제 

‘지방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말은 비판자들이 만든 말


워치만 니는 신앙적 교만을 가장 경계

풀러신학교 공개적으로 지방교회 인정

<지방교회 신앙과 생활>이라는 신앙고백서에서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태도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들이 지방교회에 대하여 생소하게 느끼고 심지어 어느 정도 교제의 벽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문제가 있는가? 우선 외부적 요인으로는 ‘자기네만 교회라고 한다’ ‘지방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라고 한다는 식의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유포시킨, 사실과 다른 말들이 걸림돌이 되었을 수 있다. 이 점은 기성교회들이 사실에 근거한 바른 인식을 가짐으로 풀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지방교회 내부적인 요인들도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익숙지 않은 진리항목과 실행들 그리고 그들의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교회측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 진리와 실행상의 차이점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 노선, 즉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소위 형제회’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특징들 중 일부를 공유한 것이 있다. 그 외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했던 진리항목들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것들은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계 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강조이다. 
워치만 니는 자신의 영적 유모와도 같은 마가렛 바버 선교사를 통해 앤드류 머레이, 제시펜 루이스, 이반 로버츠, 오스틴 스팍스 등을 통해 이어져 온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에 대한 진리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위트니스 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노선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위 신비주의로 분류되는 마담 기용, 페네롱 신부, 윌리암 로우 등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한국교계는 이런 방면 전체를 ‘신비주의’로 보고 이것을 경계하는 시각이 강하다. 따라서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이 방면의 서적을 읽거나 공개적으로 동조하기에는 주저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성경을 벗어난 그릇된 영성이나 잘못된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 하늘 보좌와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골 1:27),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은 사실’(롬 6:6),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갈 2:20),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마 16:24) 등의 말씀을 어떻게 삶 속에서 체험하고 실제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과제이다. 

 둘째, 교회생활 관련 진리와 실행이다. 
교회 역사를 볼 때,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형제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이러한 형제회의 유산이 지방교회를 대표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교계에서는 다아비의 신학이 세대주의를 기초로 하고 평신도-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엡 4:12)는 주님의 위임과 루터가 주장했던 ‘만인 제사장 제도’를 어떻게 실행하고 또 완성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더 깊은 관심과 추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셋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한 진리 항목들이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의 몸’ ‘새 예루살렘’ ‘신화’(神化, deification)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진리 항목들은 하나님의 주권, 선택, 예정 등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딤전1:4, 엡 1:9, 3:2)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거듭 강조되었고 ‘그리스도의 몸’ 역시 그러하다(마 16:18, 엡 1:23). ‘새 예루살렘’(계 3:12)은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을 가리키며 요한계시록의 결론이자 핵심주제이다. 신화 진리 또한 정통 초대 교부인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에서 강조한 진리로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러한 사상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로 현재도 가르쳐지고 있다. 따라서 지방교회와 기성교회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서로 배우는 자세로 교제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2. 지방교회 성도들의 기성교회를 향한 태도 
지방교회는 본의야 어떻든 기성교회를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그것이 상호 교류에 장애가 된 면이 없지 않다. 어찌되었건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할 대목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벧전 5:5). 사실 워치만 니도 다음과 같이 신앙적 교만을 경고하고 있다. “주님께서 정하신 교회의 노정은 빌라델피아이다. 빌라델피아의 노정을 가는 사람의 가장 큰 시험은 바로 교만이다. 즉 “우리가 당신들보다 낫다! 우리의 진리가 당신들의 진리보다 분명하고,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교만이 없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토해내신다. 우리는 결코 교만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워치만 니, 50 필수과정(V), 한

워치만 니, 50 필수과정(V)

국복음서원, 2002년, 135쪽). 미국 교계는 지방교회를 일체 이단시하지 않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만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가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의회’(ECPA) 의 투표권 있는 정회원 중 하나로서 교계 지도자들과 이미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고,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을 수년 째 발간해 옴으로 교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지방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 풀러신학교측은 지방교회측이 성경적인 정통 그리스도인들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미국교회의 선례는 한국교회에서도 참고가 될 만하다. 따라서 지방교회측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성교회측에 다가감으로 교제의 폭을 넓히고, 기성교회측은 대국적 관점에서 “나와 다소 다르나 주 안에 참된 형제들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롬 15:7).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3 , 교회연합신문 657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657호060723_편집.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에클레시아 교회론에 대한 간략한 반박 (4) - 개혁교회 교회표지와 불일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9.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3)


2. 신약교회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할 에클레시아 개념들

신약에서 교회 (Church)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물론 70인 역 구약에서도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에클레시아가 우리가 현재 토론하는 대상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염두에 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속성상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외시킵니다. 

 1) 이방인 폭도들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H.J 님이 용례 중 하나로 소개해 주신 사도행전 19장 32, 39, 41이 말하는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개념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부의 권세 아래 있는 무리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구약의 유대인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서두 글에서 언급되었던 케빈 길레스 책 345-346쪽에 의하면 70인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약 100번 나타났는데(이 단어의 대부분은 카할이라는 히브리어), 그중 시편 28:5와 에스겔 32:22-23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유대인은 이러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으로(롬2:28-29) 소위 표면적 유대인인 구약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모임은 에클레시아 이되 신약교회 개념(이면적 유대인)인 마태복음 16:18이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개념에서는 제외됩니다.

 3)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이 제외됨

위 책은 유대인이되 열왕기상, 역대상, 역대하 등에서 약 33번 쓰인 에클레시아는 특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 역시 신약교회의 예표와 그림자의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마태복음 16: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는 아닙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회심 전후의 사울과 바울의 모습에서 관찰되듯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일 뿐입니다. 즉 예배하는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통해 참된 신약교회의 구성원이 된후 그는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이되 그 신분과 그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었노라고 실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3:6). 그가 고린도후서 11:28에서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고 할때의 그 교회는 그가 회심 전에 몸 담았던 예배공동체인 이스라엘 개념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을 혼동할 때 그 사람의 교회론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이해에서 멀리 빗나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교회는 시점으로 볼 때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교회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들만을 염두에 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단수의 교회로서 복수의 교회들이 되는 성경적인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할 때 염두에 둔 교회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H.J 님은 위 제외된 모든 개념들을 다 포함한 신구약 전체에 나타난 '에클레시아'의 용례들을 다 교회개념으로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범위에 있어서도 단지 <특정 목적을 위하여 따로 불러 나와서 만들어진 모임> 즉 민회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 집에서 모이든 예배당에서 모이든 도시에서 모이든 다양한 범위의 모임 그 모두가 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에 다루겠지만 교회의 다른 특징들을 무시한 채 에클레시아라는 원어적 의미만을 중시함으로 본의 아니게 분열의 뒷문을 이론적으로 열어주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1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교회들을 다 포함한 하나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라는 식의 성경본문 왜곡으로 빗나갈 여지가 다분합니다. 이 점은 별도의 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9. 01:35

지방교회에 대하여 

이 글은 '지방교회'라는 것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나누고 싶어 쓴 글입니다. 저는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회에 한번도 가본 일이 없고 그들을 만난 적도 없으나, 책을 통해서 알게된 저의 지식과 생각을 자유롭게 써 보았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지방교회는 어떤 분파나 교단이 아닙니다. 지방교회는 말 그대로 각 지방의 교회를 대표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이들 역시 어떤 교파나 분파가 아닌 지방적 합일의 위치에 서 있는 형제들일 뿐입니다. 최소한 워치만 니가 처음 의도한 바는 그랬습니다.

지방교회를 잘 이해하려면 교회의 분열과 성직계급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히 피상적이고 빈약한 교회사 지식과 성경지식을 가지고 쓴 글이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오늘날 교회의 분열과 성직계급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본 분열과 성직계급 3. 합일을 위한 노력들, 지방교회 4. 지방교회에 대한 요약된 이해 및 개인적 의견 5. 지방교회에 대한 몇가지 의문점

1. 오늘날 교회의 분열과 성직계급

현대의 기독교를 볼 때 우리는 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분열 문제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등의 말, 즉 교회 내에서의 분열을 인정하는 말을 철저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볼 때, 바울은 교회 내의 분열에 대해 몹시 근심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런 것(말)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나는 장로교회에 속했다.', '나는 감리교회에 속했다.', '나는 오순절교회에 속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분열은 주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장로교회를 세우신 적도 없고, 감리교회를 세우신 적도 없으며, 오순절교회를 세우신 적도 없습니다. 그분은 다만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을 뿐입니다.

물론 사도시대에도 여러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 사도시대의 교회들은 명백히 지방적 합일의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열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지방적 경계 외에는 아무 것도 그들을 나누는 기준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에베소교회는 있지만, 바울교회, 게바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는 없는 이유입니다. '할례당'은 있지만 할례교회는 없는 이유입니다. 아주 분명히도, 성경에는 지방교회 이외의 교회는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된 것 - 교회가 여러 교파로 분열된 것 - 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열 즉 당짓는 일이 죄이며 육에 속한 일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는 엄밀히 따져서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돌을 오늘부터 밥이라고 부르자고 밥이 되지 않는 것처럼, 간판만 세우고 '교회'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초신자가 '교회를 선택'할 때도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자, '그'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어떤 교회를 가야 할까요? 기독교 월간지를 보면 '교회'의 선전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제단, 말씀의 제단, XX동에 우뚝 솟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제단 등등... 마치 상품 광고처럼 교회를 선전합니다. 도대체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할까요? 그를 전도한 사람은 이미 '가까운 교회를 찾으십시오'라는 조언만 남기고 먼 곳에 있는 자기의 '교회'로 떠나버렸습니다. 수많은 교파와 수많은 '개교회'가 진열장 위의 상품들처럼 널려있습니다. 방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방언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오순절교회를 만들었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의 사실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침례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구미에 맞춰서 선택하라고 해야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의 또다른 문제는 성직계급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중세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교리적으로는 만민이 제사장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학교라는 곳을 나와 정규 코스를 밟은 한 사람'(담임목사)을 중심으로 모든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역과 간증에 있어서 많은 제한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영적 계급이 엄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다릅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그러한 계급이 없으며, 다만 모든 형제들이 받은 은사대로 섬겨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본 분열과 성직계급

성경에 기록된 교회 최초의 분열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분열인 것 같습니다(물론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논외로 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책망(고전 1:11-16, 3:3-5 고후 12:20) 했습니다.

사도시대 직후부터 A.D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할 때까지 교회는 엄청난 박해를 당했습니다. 서머나교회(계시록에 나오는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이 시대에 순교한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불에 타 순교했으며, 순교하기 전에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가 불에 타는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교회사 책을 보면 그의 순교 이야기가 나오는데,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간증하는 것이 큰 감동을 줍니다. 그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처참한 방법으로 순교하면서도 믿음의 정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놀라움 중의 하나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핍박 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을 교회가 다시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그리스도교가 국교화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세상과 영적 간음을 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없는 성직 계급이 언제부터 교회에 들어왔는지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직자들은 국가에서 연금을 받기 시작했고, 세례를 받으면 흰옷 두벌과 몇냥 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이게 되었습니다. 또 교회에는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한과 유산을 상속할 권한도 부여되었습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해서, 중세의 기독교(오늘날의 카톨릭)는 거의 이교집단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일부 성직 계급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고,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거나 번역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고등학교 때 '바비도'라는 소설을 배우셨지요?) 성직자들의 타락은 극에 달했으며 교회의 중요한 진리들도 대부분 가리워져 루터가 95개조항을 발표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의 초보적 진리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믿음으로 구원받음'의 진리를 발견한 이후 교회가 강하게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분열은 이 때부터 시작됩니다. 당시의 카톨릭 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루터가 카톨릭교 안에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고, 재침례파 등 수많은 분파들이 이 때부터 생겨나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부흥과 회복의 역사를 계속 행하셨습니다. 많은 진리들이 회복되었고, 곳곳에서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웨슬리 형제, 존 낙스, 진젠돌프 백작과 모라비안 형제들, 찰스 피니, 조나단 에드워드, 다비와 형제운동, 케스윅 총회, 펜 루이스, 이반 로버츠와 웨일즈의 대부흥, LA 아주사가의 한 흑인의 체험에서부터 시작된 오순절 운동,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과 부흥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말하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역사적 순서가 좀 틀려도 양해 바랍니다.)

3. 합일을 위한 노력들, 지방교회

이 중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달리 분열되어 있음을 보고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고자 한 최초의 시도는 167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듯 합니다. 이들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교파를 떠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고 각처에서 그들의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진젠돌프가 자신의 모라비안 교회에 이런 운동을 수용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19세기 초, 성직계급과 종파조직이 성경에 없는 것임을 발견한 형제들이 아일랜드와 더블린에서 자신의 교파를 떠나 집회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조직과 사람이 아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J. N. 다비, 윌리엄 캘리, 맥킨토쉬(모세오경의 저자), 뉴톤, 벨렛, 죠지 뮬러, 죠지 커팅, 찰스 스탠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졌습니다. 이들은 한동안 주님께 크게 쓰임 받았고 막대한 영적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십년 후, 놀랍게도 이들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각 모임의 일치된 행동을 주장하고, 어떤 형제들은 각 모임마다 독립적인 행정을 주장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워치만 니라는 젊은이가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강력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15여년간의 그의 사역을 통해 적어도 7만여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중국과 동남아 각지에 600여개의 지방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생명의 말씀사와 한국복음서원에서 번역된 수많은 책들로 인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 한 지방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하나의 예배당이 아닌 하나의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성경대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형제운동의 중요한 과오가 바로 지방의 범위를 명백히 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각 모임의 일치된 행동을 주장한 형제들은 지방의 범위를 넘어서 연합회적인 과오에 빠졌고, 각 모임의 독립을 주장한 형제들은 지방의 범위에 이르지 못하여 한 지방에 여러개의 교회를 만드는 과오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대로 한 지방(시, 읍, 면 등 사람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사는 곳)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 하나의 행정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어떤 교파나 혹은 국가에 속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교회 안에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계급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점에 있어서는 형제운동과 견해를 같이했습니다. 그는 문화 혁명 때 투옥되었으며,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교회의 길』, 『교회의 정통』(한국복음서원) 등의 책을 읽어보면 교회에 대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 지방교회에 대한 요약된 이해 및 개인적 의견

글의 첫 부분에서 밝힌대로 지방교회는 어떤 교파나 분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뉠 수 없고, 지방 외에는 어떤 것도 교회를 세우는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에 대한 '그들'의 주장입니다. 바울조차도 지방교회 이외의 교회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교회를 세우는 입장이 되기에는 불충분했습니다. 오늘날은 창시자가 루터냐 웨슬레냐, 침례를 받느냐 약세를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느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느냐 등의 수많은 이유로 교파가 갈리워지지만, 성경은 지방 이외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어떤 입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방교회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가르침도 아니고, 특별한 가르침도 아닙니다. 더구나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개교회' - 성경에 없는 말이지만 - 의 유일한 유형(The one and only type of each church 영어가 맞는지 모르겠군요?)일 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어볼 때, 사람의 전통과 권위 - 교황과 카톨릭 - 를 떠나 성경으로 돌아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단'이라는 것이 우리의 교황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은 영적인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다고 해도 반대해야 합니다. 종파는 참 편리합니다. 열광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순절교회로 가면 되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싫은 사람이라면 구세군이나 퀘이커 같은 교단을 찾아가면 됩니다. 자기 구미에 맞춰서 선택할 수 있고, 만나고 싶은 형제들끼리 모이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이야기한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교회가 '몸은 하나'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심하게 찢어져 있음을 겸손히 자인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해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5. 지방 교회에 대한 몇가지 의문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분명히 옳으며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역시 몇가지 의문점은 남습니다.

첫째로 '합일을 한답시고 또다른 분열을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성경은 한자도 빼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방을 교회의 경계로 정하셨으면 인간이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방의 경계가 분열을 막는 성경의 방법이라면, 성경대로 해야지요. 성경대로 하는 사람이 적을지라도 말입니다.

둘째로 '기존 교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천히 교파간의 영적 교제 등으로 하나가 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말입니다. 교파가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겠지만, 잘못된 것이면 헐어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현대의 성직계급인 목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워치만 니는 이런 '영적 합일'을 '담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있어서 미지근하면서, 미지근하지 않은 축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째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교파 안이냐 밖이냐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견해입니다. 사실 워치만 니도 하나님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침례, 방언, 성결, 종파를 떠나는 것 등을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런 부수적인 진리들도 다 합당한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 점에 대해 전혀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다 중요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성령의 권위가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사실 '지방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실제가 있고 없고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그들 - 지방교회를 주장하는 이들 - 의 의견이 아무리 옳고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성령의 권위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 자신들을 하나의 또다른 종파로 만들어버렸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함과 풍성함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어떤 영적으로 뛰어난 개인 -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 의 견해를 성경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들은 이미 또다른 하나의 종파로 자신들을 변질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저는 그들의 집회에 참석해 본 적도 없고 그들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이만 부족하기 이를데 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지방교회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지방적 합일의 입장에서 모이고 있는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 그런 분이 계시면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의 교회가 나아갈 길을 밝히 제시할 수 있는 선지자적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 눈의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출처 : 한국 인터넷 신학대학

* 참고가 될까 해서 아래 글을 발췌해 올려 드립니다.

('교회의 표현은 모든 지방에서 하나임' 중에서...)

우리는 교회가 이 땅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지방에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교회의 각각의 표현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하나여야 한다. 우리는 나뉘어질 이유가 없다.

만일 우리가 런던에 간다면 거기에 한 교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만난다. 우리는 거기서 그들에게 어떤 류의 교회가 있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류의 달이 있는지 물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달은 다만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다만 하나의 교회가 있다. 내가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나는 그곳에 있는 교회와 만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뉴욕, 샌프란시스코, 도쿄, 홍콩에 갔을 때, 나는 그곳에 있는 교회와 만났다.

우리가 나누어질 이유가 없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들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는 단순하게 교회와 만난다. 이것이 주님이 정하신 합당한 길이다.

하나님은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교회가 표현되어지도록 정하셨다. 한 지방에서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 중 몇은 주님의 구원에 의해 분별될 것이다. 그리고 이 분별된 사람들은 그 지역 사회, 그 지방에서 교회의 표현으로서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 땅 위에 지방들에서 표현된다. 교회의 표현이 있는 곳에, 그 표현은 하나이어야 한다. 단순해지자. 기독교 안에 있는 혼돈으로 복잡해지지 말라. 사람들에게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고 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라면,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나는 교회에 속하고 당신도 교회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교회에 속한다.

삼십 이년 전, 우리가 상해에 있을 때였다. 서너명의 형제들이 그들의 손에 성경을 든 채 집회에 가기 위해서 시내버스를 탔다. 그 차에서 승객들에게 팜플렛을 뿌리고 있던 또다른 믿는이가 그들에게 왔는데 그는 그들이 형제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형제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어느 교회에 속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서너명의 형제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될 지 의아해 했다. 그런 다음 그들 중 가장 연장한 형제 하나가 『우리는 당신과 바울과 베드로와 마르틴 루터와 모든 성도들이 속한 교회에 속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팜플렛을 가진 그 형제는 이것을 생각해 본 다음 『그것 참 굉장하군요.』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그것은 굉장하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교회에 속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영광스럽지 않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한 교회의 일반적인 지체들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위트니스 리 [교회 생활의 실행을 위한 기본 원칙, p. 34-35, 한국복음서원]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8. 05:00


복음의 확증 (6) 창조주이시자 피조물이신 그리스도


위트니스 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만 창조물이실 뿐 참 하나님은 아니시라고 가르친다는 거짓 비방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비방은 위트니스 리가 첫 번째로 감내해야 했던 비방으로서, 그 시기는 그가 대만과 홍콩에서 사역을 수행하던 195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트니스 리는 골로새서 1장 15절의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는 표현을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신 것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했는데, 그 당시 그의 젊은 동역자 중 일부는

Arius

마치 그가 4세기의 아리우스 (Arius) 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비방은 주로 극동 지역에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현재의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았지만 서양의 독자들은 대부분 그가 의미했던 바를 제대로 이해해 왔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에 소개해 드릴 몇 가지 예문만으로도 그의 실제 관점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 중 첫 번째 라는 뜻이다. 아리우스 (Arius) 이단 때문에 골로새서 1장 15절의 이 요점을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성경 교사들은 많지 않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니며 오히려 영원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가르치면서 골로새서 1장 15절을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의 근거로 삼았다. 역사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그의 이단 때문에 정죄받고 쫒겨났으며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했다. 아리우스의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때문에 니케아 회의 때부터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성경 교사들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문자적인 번역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리우스 같은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58년부터 나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자 피조물인 사람이시므로 명백히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피조물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글들을 출간해왔다 <장로 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22-23쪽). 

이 요점에 관해서 우리는 교회사 가운데 아리안 주의 (the Arians) 라는 이단 종파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아리안 주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영원 안에서는 하나님이 아니셨고 어떤 시기에 하나님이 되셨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4 세기의 아리우스 (Arius) 에게서 나온 이단 종파에 속한다. 

아리우스는 골로새서 1장 15절 하반절의 말씀, ‘그 (아버지의 사랑의 아들) 는…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시므로 하나님의 동일한 본질 (헬라어 ousia) 를 갖고 계시지 않으며, 비록 우주와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지만 (히1:2, 요1:3) 그분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시작이 있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시므로 아버지와 동등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심각한 이단이다. 

하나님의계시와 이상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임을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믿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순수한 계시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분의 인성에 따라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한다. 그분의 신성에 따르면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 창조자이시지만 육체가 되셔서 몸을 입으셨으므로 또한 인성을 소유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인 면에 있어서 인성을 갖고 계시고 피조물이시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8-39쪽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창조주이시나, 사람으로서 피조물이시다. 만일 그분이 피조

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물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피와 살과 뼈를 가지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는가? 피와 살과 뼈가 있는 몸을 입지 않으셨는가? 정녕 그러하셨다…우리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항상 하나님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육체 되심을 통하여 사람이 되셨다. 만일 그분이 사람이 되시지 않았다면 붙잡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으셨을 것이고,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는 진리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81 쪽

단지 위트니스 리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는 구절을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아리우스도 이 구절이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는 위트니스 리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자신의 잘못된 관념을 ‘입증하기’ 위해 그러한 해석을 사용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수없이 많이 가르쳤고,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 결코 이 진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왔습니다. 더 나아가, 위트니스 리가 이 주제에 대한 대다수 현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르지는 않지만, 최소한 어떤 면에서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닙니다. 
삼일성과 기독론에 대한 정통 관점을 수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아타나시우스 (Arianos 2.62-64), 닛사의 그레고리 (Eunom. 2.8, 3.3; Perf),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Thes. 25; Trin. Dial. 4; 6) 과 같은 성경 교사들도 이 구절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의 일부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들 중 첫 번째 사람인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논쟁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상을 접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어떤 면에서는 창조물의 일부라고 보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그의 주요 주장을 훼손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위트니스 리 역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인간 존재라는 신분이시므로 창조된 영역의 일부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8. 01:33

지방교회 십자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2)


저는 비록 부족함이 있긴 하지만 이런 교회론에 관련된 진지한 논의를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시고자 하는 일이 곧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는 것'(마16;18)이고, 주님의 종들인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자와 교사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 또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4:11-12). 그런데 저와 HJ 님의 최근의 논의에서 보이듯이 교회 또는 에클레시아에 관해서는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논점들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으로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을 깃점으로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교회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가 있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합의된 정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수 많은 경쟁적 선언들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교통 정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 우리의 토론의 대상은 어떤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가? 

케빈길레스는 그의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에서 현재 우리에게 교회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없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15쪽) 

  위 책을 번역한 홍성희 님도 역자 서문에서 위 케빈길레스의 말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론에 관한 책은...이미 나와 있는 것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각각의 교회, 교파, 교단에 따라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어서 교회에 대한 통일된 교리가 아직도 나와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토론대상이 되는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 HJ님과 제가 약간의 혼동을 빚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라도 우리가 토론하는 대상인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처음부터 밝힌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단수의 '우주교회'가 복수로 나타나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문제제기 한 것임으로 당연히 마태복음 16장 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바로 그 교회를 염두에 둔 교회개념을 토론의 전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16에서 목자(사)와 교사들 등의 주의 종들이 세워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HJ 님은 '에클레시아'라는 원어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개념과 범위를 내포한 교회개념을 토론의 대상으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에클레시아)개념 안에는 HJ 님이 소개한 것처럼 사도행전 19:32, 39, 41에서 보듯이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까지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개념 안에 과연 이런 폭도들의 모임이 끼여들 여지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편차가 쌍방에게 약간의 오해와 혼잡을 가져온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 우리가 토론하려는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특징들을 통해 에클레시아이되 그에 부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배재시킴으로 토론대상을 더 명확히 하는 시도를 해 보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1:30

지방교회 - 워치만 니의 공로를 치하하여

 - 

미국 하원 국회 의사록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5)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구별되는 두 본성


우리의 가르침 중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또 다른 항목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모함하는 이들은 우리가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주의하지 않은 채, 단지 이단적인 사상을 전달한다고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 단어를 우리가 사용한다 해서 문제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연합 안에서 훼손되지 않고 구별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우리의 이러한 믿음을 늘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그 중 하나를 발췌한 것입니다. 

그분 [그리스도]은 성령을 통해 그리고 동정녀를 통해 이 두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성령을 통해 그분은 신성한 본질을 받으셨고 사람인 처녀를 통해 그분은 사람의 본질을 받으셨다. 연합이란 두 요소가 결합되어 함께 연합되지만 그 두 요소가 그들의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 함께 결합되어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이 태어나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하나님-사람이 되셨으며, 두 본성과 두 생명, 곧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생명 그리고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생명을 소유하셨는데, 이 둘은 하나로 연합되었지만 조금의 혼동도 없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 삼의 본성이나 제 삼의 요소가 되는 어떤 것도 산출하지 않았다. <장로 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13쪽 

연합’이라는 용어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정의가 타당한 것인가를 검토하는 작업은 잠시 보류하고,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진리를 말할 때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기독교 교리사에 밝은 분들은 위 예문에 칼케돈 신학과 칼케돈 신조 (주후 451년) 자체가 극명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라고 말하면서 정통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두 본성이 연합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유티커스 주의 (Eutychianism) 를 가르친다고 정죄했지만, 그는 분명히 두 본성이 “함께 결합되어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유티커스 주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확증하기 위하여 칼케돈 신조의 표현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두 본성이 “조금도 혼동되지 않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 삼의 본성이나 제 삼의 요소를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이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락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합’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트니스 리는, 연합이란 두 요소가 그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고 결합되는 것, 즉 두 본성이 그 특징을 유지하며 결합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연합’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합이란 여러 요소와 본성의 혼잡을 가리키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합당하게 믿고 있는 것과 상반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연합의 의미가 그러할지 모르나 표준 영어 사전들은 연합의 의미를 결코 그렇게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웹스터  국제 대사전 제3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은 연합을 “어떤 것을 함께 두거나 결합시켜, 그 결합 안에서 구성 요소들이 서로 구별된 채로 남아 있는 것”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해리티지 영어사전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rth Edition) 의 인터넷 판 역시 연합을 “통상 각

각의 특성들을 유지한 채 결합하거나 섞는 것.” (http://www.bartleby.com/61/31/M03131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섞다 (mix)’ 라는 말을 찾아 그 유의어들을 살펴보면, 연합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아래와 같은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유의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연합은 개별적인 특성들을 상실하지 않는 결합을 가리킨다. “존경과 놀람이 함께했다 (mingled).”—월터 스코트 경 (Sir Walter Scott). “그의 동료들은 자유롭고 즐겁게 토박이들과 어울렸다 (mingled).”—워싱턴 어빙 (Washington Irving). (http://www.bartleby.com/61/25/M03525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

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전들이 이와같이 ‘심원한’ 정의를 제공하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이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연합’이라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사실상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논쟁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많은 이들 중에서 월터 스코드 경과 워싱턴 어빙은 지나치게 문학적이었다고 치부하여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실생활 속에서의 용례들을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은 루즈벨트의 연설문에서 인용한 글들을 읽으며 함께 어울렸다 (mingled). (Doug Struck, “Clinton Dedicates Memorial, Urges Americans to Emulate FDR,” Washington Post, 1997년 5월 3일자, http://www.washingtonpost.com/wp-srv/local/longterm/tours/fdr/history.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종종 남부의 파리라고 불리는 애쉬빌은 건축양식과 문화가 독특한 조화 (mingling) 를 이루어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 함께 국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Community Tour”, Coldwell Banker Kasey and Associates [Web site], http://www.coldwellbankerkasey.com/community_tour.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이러한 예에서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구별하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각 계층의 뚜렷이 구별되는 속성들이 이러한 자연스러운 어울림 (mingling)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남부의 파리인 애쉬빌이라는 도시에 있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분명히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는 구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말을 쓴 부동산 중개인은 어떻게 두 문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맛보고 감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전과 일반적인 용례는 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에 관련하여 우리가 채택한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해 우리를 줄기차게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두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부지런히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두 본성에 대한 역대의 논점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어떤 단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그들의 생각 속에서 적신호가 켜지게 됩니다. 그들이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그 단어가 두 본성을 구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반대편 극단으로 치우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이라는 단어가 위격의 혼잡과 변질을 의미한다며 우리를 반대하는 경고를 외치지만, 정작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나뉨도 없고 분리도 없으시다.” (칼케돈 신조) 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신호로 인식되는, 그리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를 왜 포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트니스 리 자신도 이 용어에 관련된 역대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연합’이라는 단어야말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최적의 용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레위기2장에 있는 소제가 신성하면서도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섞인’ (mingled)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성경적인 예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거듭해서 두 본성에 대한 합당한 이해가 무엇이며 합당하지 못한 이해는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2장에서 섞인 (mingled)’ 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성령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갖고 계신 갈망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5절은 소제를 준비할 때 기름이 고운 가루와 함께 섞여야 한다고 말한다. 기름은 성령이신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며 (눅4:18, 히1:9),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름이 고운 가루와 섞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성과 연합되신 것을 상징한다. 기름과 고운 가루는 두 가지 다른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함께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본성은 그러한 결합 안에서 여전히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체험함>, 영문판 32쪽

어떤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가 두 본성을 묘사하는 적절한 용어를 찾기 위하여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지만,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고유 권한이며, 그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 해서 그를 (또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용어가 레위기 2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서 보아 온 것처럼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는 데 확신이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가장 완벽한 표현이자 두 본성이 갖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비밀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 귀한 진리에 대한 더 탁월한 이해와 표현을 제공하는 이 단어를 쉬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진리와 함께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현대 신학계에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위트니스 리만이 유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저명한 신학자인 윌리암 밀리간 (William Milligan)도 정확히 동일한 맥락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신성한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신 이후의 둘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이 영 안에 거처를 만들 때, 즉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오실 때, 그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보석을 금테에 물릴 때에는 금은 금으로, 보석은 보석으

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이와 같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기체가 서로 안으로 확산되어 전체적으로 섞이는 것처럼 연합되며, 그 결과 두 기체는 함께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매 입자 속에서 발견된다…그분 (그 영)은 그들의 존재에 스며드시며, 그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신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The Ascension and Heavenly Priesthood of our Lord, [London; New York: Macmillan, 1984], 183-184쪽)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1:26

지방교회 영상 - 하늘에 속한 이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