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2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 번째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 번제와 소제의 비교
번제의 주된 항목은 피이다(1:3, 11). 소제의 주된 항목은 기름과 유향이다(2:1). 기름은 섞고 기름 붓기 위한 것이며, 유향은 소제 위에 놓이기 위한 것이다.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런 실수도 범하지 않고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전적으로, 끝까지 절대적인 사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절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면에 있어서 죄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절대성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몇몇은 상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완전히 철저히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가 이 땅 위에 사셨을 때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사복음서에서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는 구속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속죄는 또한 우리와 하나님간의 상황, 곧 화목이 없는 상황을 화평케 하기 위한 것이다. 속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상황을 누그러뜨리며 어떤 문제들을 해결한다.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한 것만큼만 번제로서 그리스도를 드릴 수 있다. 속죄에는 피가 필요하다. 오직 동물들만이 번제가 되기에 적합한데, 이는 동물들만이 속죄를 위해 뿌려질 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물은 생축 중의 소나 염소나 양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여야 했다.
소제에서는 동물의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생명, 곧 밀과 밀알과 밀 이삭들이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식물의 생명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산출, 번식, 증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소제에서 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름과 유향을 본다. 기름은 소제에 부어져서 그것과 연합되며, 유향은 소제 위에 뿌려진다. 피와 기름과 유향에 관해서 우리는 번제와 소제와의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본다.
제물들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누림을 갖기 위한 하나님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며, 그분만이 그것을 드신다. 하나님의 「입」은 번제를 태우는 불이며, 그 불은 계속 밤낮으로 탄다. 번제를 드시는 신성한 드심은 아주 질서정연하다(레 1:7-8).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드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제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번제는 먹을 수 없지만 소제의 일부분은 먹을 수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봉사는 거룩하며 그들의 음식 또한 거룩하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 곧 우리의 거룩한 봉사에 걸맞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소제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이신 그리스도이다. 먼저 하나님이 그분의 분깃인 소제의 부분을 누리며, 그런 다음에 우리의 누림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누림은 공동의 누림(co-enjoyment), 곧 하나님의 누림과 함께한 누림이다.
유향과 고운 가루와 기름이 단 위에서 불살라짐(레2:9)
모든 유향과 고운 가루의 부분과 기름의 부분은 단 위에서 불살라진다(2:2).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의 상당한 부분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하여 음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상징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사람의 생활은 탁월하였으나, 이 탁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그분의 속성과 미덕들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전에 인류 가운데 그러한 수준은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고, 연합되고, 충만된 하나님-사람이시다. 더우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부활을 표현하셨는데, 심지어 바리새인들에게 화내시고(마 23:1-36),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요 2:12-17)조차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탁월함은 그분의 인간성과 그분의 신성함에 있었다. 즉 그것은 그 영 안에 있고 부활과 함께한 그분의 인성과 신성 안에 있었다. 이것이 사복음서가 그분의 탁월함 안에서 그분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다. 그분은 고우시고, 고르시며, 완전히 균형잡히신 분이며 어떤 것도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으셨다. 더우기 그분은 그 영으로 충만되신 분이며 부활로 적셔진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행하셨을 때 항상 그 영으로 충만되셨으며 부활로 적셔지셨다.
소제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위한 것임(레2:3,10)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 2:3). 이것은 하나님이 누리신 후에 우리도 우리의 음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은 만족케 되시기 위해 그분의 분깃을 받으셔야만 했다. 남은 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분깃이다. 레위기 2장의 예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한 그림이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기름 섞인 고운 가루, 곧 기름과 연합된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기름과 가루가 연합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영에 의해 예수님을 먹고자 한다면, 오늘날 그 영은 말씀 안에 합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접촉할 때, 말씀 안에 합해져 있는 그 영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 예수님의 사람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생활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대하여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며 그 영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양공급이신 예수님을 공급한다. 자연히 우리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음식이신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생활을 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린다. 이것이 소제이다.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1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1 “누구든지 여호와에게 소제물을 제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가루를 바치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야 한다.”
*번제와 소제의 차이점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을 강조하며 소제는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을 강조한다. 번제의 강조점은 그분의 삶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에 있다. 번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義)이신 것을 강조한다. 소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을 강조한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그리스도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의(명사-righteousness)와 의로운(형용사-righteou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 자체이며 또한 그분이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속죄제로서 죄가 되셨고, 다른 한편으로, 속건제로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 타락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단지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죄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우리는 의로운 그리스도, 모든 방면에서 올바르신 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만족케 하는 향기를 드릴 수 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의가 아니다. 우리는 죄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번제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 우리가 의가 될 수 있는가? 우리 자신 안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것은 가능해진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의가 없다. 우리에게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의를 가질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롬 10:3). 번제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의(義)이시며, 소제로서 그분은 가장 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다.
* 고운 가루
소제는 고운 가루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가 소제의 주요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지만 우리의 인성은 거칠고 조잡하다.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온유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의 인성은 모든 방면에서 곱고, 온전하며, 균형 잡혀 있고, 올바르시다.
소제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들을 통과한 밀로부터 산출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으로 만들었다. 그분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는 슬픔 위에 슬픔을 맛보셨다.
고운 가루는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유에 있어서 완전하며 조금도 과하지 않고 균형 잡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시다. 그분의 인성과 우리의 천연적이고 타락한 인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 기름
소제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눅 4:18, 히 1:9).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그분은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영인 신성한 요소도 있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소제로서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우리는 그분에게 「기름이 발라졌다(oiled)」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기름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셨다는 뜻이다.
* 유향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아주 즐거운 느낌을 갖게 해준다. 예표에 있어서, 소제 안에 든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고난으로부터 표현되어 나온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마 11:20-30, 눅 10:21 참조). 그분의 인생의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비록 그분이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지라도,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게 하셨다.
소제에는 세 가지 요소들-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이 주로 이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었음을 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들 안에서 사시며 행하셨다.
그분의 전 생애는 사실상 십자가 아래 사신 것이다. 그분은 항상 죽임 당하셨으며, 가죽이 벗겨지셨으며, 각이 뜨이셨다. 여섯 시간 동안 지속된 그분의 십자가는 그분이 죽임당하시고, 가죽이 벗겨지시고, 각 뜨이신 것의 총체였다. 주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 사셨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으로부터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최상의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셨다. 이 인성에 기름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인생에서 그분은 고난들이 아닌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부활은 우주 안에 있는 유향, 향기로운 향기, 달콤한 맛이다. 어떤 것도 이러한 부활의 향기처럼 달콤하지 않으며 향기롭지 않다. 이것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생이다.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밤에(요18:4,7) 그분은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8절). 「이 사람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분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병정들에게 체포를 당하시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제자들을 돌보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를 돌보셨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 19:26-27上).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 받음에서 흘러나오는 부활을 본다.
주 예수님은 고난의 삶이지만,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사셨다. 모든 장소, 매 시간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 안에서의 삶과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다. 이것이 소제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이며, 그분만이 그것을 먹도록 되어 있다.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태워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번제에서 태우는 불을 하나님의 「입(mouth)」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인 반면, 소제는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음식으로서 작은 부분을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 합당한 경배
합당한 경배는 번제와 소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우리 만족을 나누기 위해 소제를 드리는 것, 이것이 실제의 경배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만족되며 이러한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실제의 경배 안에서 번제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러한 경배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며, 우리는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