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집회는 잘 할 수 있지만 각 사람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
집회가 크면 책임형제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별집회 몇 명이 참석하는가? 오늘 집회에 몇 명 참석하는가?
... 클수록 좋지 않고, 작을수록 좋다. 그러나 작아져야 하지만, 증가되어야 한다.
작아졌지만, 더 많아져야 한다. 집회에 오라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다.
중국을 가면 대집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집에서 교회생활을 실행하고 있다.
내가 목사들을 데리고 상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상해가 지금은 4천명이 모인다.
십년이 지났는데, 열배의 증가가 있다. 상해는 집회소가 없다.
모두가 가정에서 모인다. 이것이 주님의 회복 안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교회생활이다.
우리는 환경의 제한이 없다보니까 점차 편안한 길을 가고자 한다.
점차 기독교의 길을 가고자 한다.
마태복음 13장에는 큰 나무의 원칙이 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인데 큰 나무로 자라버렸다.
이것은 기독교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마음 안에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가기를 마음 안에서 원한다면 원칙에 있어서 우리는 기독교의 길을 가는 것이다.
RSG, 활력그룹, 한 사람 한 사람 전화해서 20명을 잘 돌보면 된다.
그러면 그곳에 교회생활이 있는 것이다. 오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그들의 집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관념은 중심에서부터 주위로 가는 것이다. 먼저 인도하는 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인도하는 이로부터 다른 이로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의 유기적인 길은 몸의 모든 세포가 움직이는 것이다. 모두가 알아서 자란다.
중심에서 둘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상호성 안에서 자란다.
우리의 잘못된 관념은 위에서 아래로이다. 즉, 먼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집사들, 지역책임자들을 온전케 하는 등.. 위에서 아래로의 관념이 있다. 오히려 아래에서 위로일 수 있다.
형제자매님들이 일어나면 몸 전체가 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