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생활하면서 십자가에서의 자기 부인을 많이 듣고 또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 그런 체험을 해내기는 참 쉽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어제 주중 집회에서 찬송가사를 누리던 중 '손실과 고통과 모든 시험 십자가 일부로 달게 받아' (342장, 3절) 라는 대목에 이르자...한 자매님이 다른 분들은 이런 가사에
아멘이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최근에 몇 개월 어떤 일로 그야말로 손실과 고통과 모든 시험을 통과하신 분입니다. 아마 다른 부분보다도 '달게 받아' 이 대목이 진짜 그렇게 되더냐...는 질문으로 저는 알아 들었습니다.
십자가의 유형에는 물론 (경제적) 손실, 고통, 시험도 있지만 남들의 관심 범위로부터 잊혀짐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말 이곳 남가주 한국어 권 형제님들 집회에서 한 동역자 형제님이 비슷한 말씀을 공급해 주신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에게 다른 동역자들이 '형제님, 우리가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교통한 결과 형제님이 이제 봉사를 내려놓은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면 본인도
받기가 쉽지 않을 것같다고...
이런 저런 많은 봉사들을 하고 있고 부담도 있고...그런데 나 더러 내려 놓으라니...그러나 참으로 그런 일이 워치만니 형제님에게는 세 번이나 있었답니다. 그것도 오해에 의한...
그러나 니 형제님은 그 모든 환경을 변명하거나 따지지 않고 그대로 다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잊혀진 시간동안 남을 원망하거나 별도의 자기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환경이 열렸을 때 원래 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잊혀진 시간들 동안 부인된 존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풍성은 온 교회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무엇이 그리하게 했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그리고 몸에 대한 이상...이런 것이 형제님에게 그런 자기부인의 삶을 지속하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의 주권가운데 만일 우리 중 누구라도 '잊혀진 시간'을 맞이하고 있거나 장차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될 때에...
교회를 위하여 또 자신을 위하여 앞선 좋은 본을 따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