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경제환경이 나빠진 것은 우리에게 좋은 환경일까요, 아니면 나쁜 환경일까요?
한 형제님은 사랑하는 자녀가 많이 아픕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는지라 주님의 이름을 많이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환경이 닥치자 형제님은 지난 2주 동안 교회생활 20년 동안 불렀던 것보다 더 많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셨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제님이 당한 환경은 좋은 환경인지, 아니면 나쁜 환경인지...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가 이 사역 안에서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그분의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자라고 증가되심으로 그분의 장성한 단체적인 아들들을 얻으심입니다(엡1:5).
그리고 우리의 주권의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부름받은 우리를 이 모양 저 모양의 환경 안으로 밀어 넣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롬8:28)은 합력하여...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가되시고, 우리 자신들은 감소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어떤 일, 어떤 사물로 인하여 온 환경이든 그런 목적을 이루면 좋은 환경입니다. 만일 사람 눈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보이는 환경일지라도 우리가 얻은 주님이 없다면 그것이 좋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어찌 보면 이론이요 교리일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 부활능력에 대한 찬송과 관련 말씀들을 누리면서 이것만이 비결임을 또 다시 느낍니다.
부활 능력 아는 사람 십자가를 사랑해, 생명 성장하게 함은 오직 죽음 뿐일세, 죽음 없이는 생명이 없네 오직 죽음 통해서만 생명 자라네.
도대체 부활능력이 무엇인가..."보배를 이 질그릇에 담았다 이것은 그 탁월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고후4:7)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생명도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4:11).
저 자신을 위하여 그러한 부활 능력을 얻기 위하여 찬송을 해도 힘차게 합니다. 가능하면 말씀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며 암송합니다. 밖의 환경은 답답하고 안타까우나 길이 없을 때 그분 앞에 나아가는 심정은 더욱 간절합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그분을 얻는다면 그 모든 환경이 다 유익하며 감당할만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