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후서 3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문자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영께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의문 문자는 기록된 구약이다. 그러나 구약은 비록 성경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대할 때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이 성경의 말씀은 의문 문자에 불과하다. 의문 문자의 의미는 전에 한번 성령이 역사한 적이 있는 것을 후에 다시 한번 사용하지만 성령은 만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문 문자이다.
어떠 사람은 일년 삼백육십 오 일 동안 로마서를 읽고서 객관적인 방면의 교리는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성령의 말씀하심과 감동이 하루도 없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의문 문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 일찍 성경을 읽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데 단지 관례대로 하는 것이라면 의문 안으로 떨어진 것이다. 비록 외적으로 영적인 껍질은 있지만 속의 영은 조금도 만지지 못하기 때문에 의문인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자신 안에서 먼저 영적인 느낌을 만져야 한다.
어떤 형제에게 말씀과 영이 있었다면 내가 그 형제의 말을 들을 때도 틀림없이 말씀과 영을 얻어야 한다. 오직 영적인 기관만이 영적인 것들을 실제화할 수 있다.그 형제가 읽은 객관적인 문자에다 영을 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주관적으로 나는 반드시 생각으로 그의 말을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영으로 이 형제가 말한 말씀 배후에 있는 영을 만져야 한다.
어떤 형제가 말씀을 전할 때, 나는 먼저 그의 성경 해석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또 비유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주의하지 않고 다만 나의 영을 사용하여 그의 영을 만진다. 영이 흘러 나왔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한편의 말씀이 사람을 공급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말하는 사람의 영이 흘러 나오는가의 여부에 있으며, 사람의 영을 만졌는가의 여부에 있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크고 조리가 있으며 생각이 좋다고 하더라도 영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문자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 중의 일은 반드시 영이 그 안에 있어야 하며, 단지 일만 잘하고 절차만 옳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홍콩교회가 대북의 봉사하는 방법을 전부 모방하여 그대로 한다 하더라도 영이 없으면 의문일 따름이다. 내가 교회 안에서 수년 간 염려한 것은 주로 죄의 문제가 아니라(물론 죄를 가벼이 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의문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많은 영적인 일이 외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안으로는 영적인 실제가 결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테복음 7장에서 주님은 심판대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주 열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이적을 행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열심으로 일하고 심지어 권위를 사용하여 귀신을 쫓으며 이적을 행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아니라 바로 과연 그 일들이 육체에서 난 것인가 아니면 영에서 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직 영적인 지각을 알고 만진 사람이 한 것만이 영에서 난 것이며 주님께 열납될 수 있다.
(Watchman 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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