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30
성경말씀  

(요일3:19) 이것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평온해질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요한일서 3장 19절의 하반절에서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구를 삽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만일 우리가 신성한 실제에 의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항의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마음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생활과 마음이 주 앞에 있다는 필수적인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평온한 마음을 갖기 위해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기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하고, 잠언 17장 22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 안에는 가끔 기쁨이 없습니까?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평강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강 대신 소란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 살 때 우리는 진리 안에, 즉 실재 안에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을 굳세고 화해되고 확신되게 할 수 있으며 평온케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기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25
성경말씀 

 (삼상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오늘의 만나

 
 다윗이 매끄러운 돌을 고른 이유는 그러한 돌의 힘은 균형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은 다윗의 손에 있지만 다윗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매끄러운 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매끄러운 돌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교회 가운데 두시고 한 차례의 풍랑으로 벽에 부딪혀 깎이게 하시는데, 삼 년, 오 년이 지난 후에는 당신과 나는 모두 매끄럽게 됩니다. 그러나 깎일 때 얼마나 아픈지요! 그러나 깎이지 않으면 어떻게 매끄러워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계속하여 어떤 사람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이 한 무리의 사람이 당신을 깎지 않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매끄러워질 수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오해하여 행하고, 십자가가 임하면 계속하여 벗어나려고 하며 자유롭기를 고대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록 고통은 감소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공과는 배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십자가를 주신 것은, 당신이 환경 가운데서 그분의 주권적인 권위에 순종하고 완전히 순복하여 저항하지 않고 기꺼이 제한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20
성경말씀 

 (마5: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비난하고 박해하고 거짓말로 여러분을 반대하여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은 사람의 천연적인 성실과 고상함을 볼 때 그것들을 감상하고 존경하며 신임을 표합니다. 그러나 일단 세상은 우리 안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즉 우리가 참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면 즉시 그것에 대해 적의(敵意)를 갖습니다. 세상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열매를 보여 주면 세상은 칭찬을 할 것이지만, 세상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보여 주면 세상은 극히 반대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세상이 마음대로 발전하도록 놓아둔다면, 그것은 결코 한 명의 그리스도인도 산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성실, 그리스도인의 예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산출하기를 갈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의 문명은 세상으로부터 감상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용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명, 곧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세상은 이 생명을 만나면 틀림없이 이 생명을 반대할 것이며 그것을 사지(死地)에 놓으려 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15
성경말씀  

(요3: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만나 

 여기에 한 가지 엄중한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영적인 일에서 추구하고 인식하고 얻는 것이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만일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실재를 만지는 것이며, 만일 다른 것이라면 비록 우리가 볼 때는 매우 좋고 가치가 있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만지는 것은 여전히 공허하고 무익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영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만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영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 이외에 다른 것은 머리로 만질 수 있으나 그분 자신을 만지려면 반드시 영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그분 이외의 것을 만지려면 사람의 열심과 총명만 있으면 족하지만 그분 자신을 만지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앙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10
성경말씀 

 (고전12:25) 이것이 몸 안에서 분열이 없이 오히려 지체들이 서로를 동일하게 돌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그리스도의 몸을 발견한 사람, 곧 몸의 느낌을 가진 사람은 분쟁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자녀를 나누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의 속의 느낌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몸의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나 몸의 분쟁은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데 한쪽 손이 다른 쪽 손이 나쁘다고 그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두 손은 나뉠 수 없으며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종파(宗派)를 벗어났다고 하며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종파를 벗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본 사람은 반드시 종파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종파를 벗어난 사람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종파를 벗어났으나 그들 자신이 또 하나의 종파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가 종파를 벗어난 것은 자기의 ‘특수함’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모든 지체가 다 우리의 사랑스런 형제라는 것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파(分派)적인 사상, 분쟁하는 일체의 태도, 하나님의 자녀를 분열시키는 일체의 행동, 하나님의 자녀들을 분열시키는 일체의 이념은 다 그리스도의 몸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05
성경말씀  

(고후2:14)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를 개선 행진 가운데 이끄시며, 어디서나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십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가 그분께 항복하고 모든 것을 파쇄하며 그분께 붓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해방할 수 있고, 사람들을 이끌어 앞으로 더 전진하여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해 그들 안에 욕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느낍니다. 복음의 목적은 바로 우리 죄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상태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얻고자 하시는 것을 얻으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소유와 어떠함, 심지어 영적 체험에서 가장 보배로운 것까지도 그분께 가져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여! 당신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잃기 원합니다. 당신의 일이나 당신의 자녀들이나 또는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당신 자신을 위하여 잃어버립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00
성경말씀  

(고후2:14)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를 개선 행진 가운데 이끄시며, 어디서나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십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가 그분께 항복하고 모든 것을 파쇄하며 그분께 붓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해방할 수 있고, 사람들을 이끌어 앞으로 더 전진하여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해 그들 안에 욕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느낍니다. 복음의 목적은 바로 우리 죄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상태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얻고자 하시는 것을 얻으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소유와 어떠함, 심지어 영적 체험에서 가장 보배로운 것까지도 그분께 가져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여! 당신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잃기 원합니다. 당신의 일이나 당신의 자녀들이나 또는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당신 자신을 위하여 잃어버립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3:55
성경말씀 

 (창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오늘의 만나

 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주장을 내세우고, 기도하지 않고도 말하고, 일을 추진하는지요! 또 얼마나 쉽게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서도 확신을 가지는지요!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만져지고 파쇄되어 자신을 의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날, 비로소 절름발이가 될 수 있습니다. 절름발이란 길을 걷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절름발이인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지에까지 인도하시지 않은 사람은 브니엘의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방법이 있고 확신이 있으며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의 통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3:50
성경말씀 

 (계12:11) 그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로 그를 이겼으며, ... 

 오늘의 만나

 
 요한계시록 12장 11절 말씀은 얼마나 귀한지요! 형제들이 그를 이김은 그들의 장점으로 인함이 아니고, 그들의 성장으로 인함도 아니고, 그들의 체험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형제들이 저를 이김은 어린양의 피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피를 사용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를 받아들이자마자 사탄의 능력은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피를 의지해서 해야 하므로, 매일 우리에게는 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날, 피를 의지하고 피를 믿은 것같이, 그 이후에도 날마다 우리는 피를 의지하고 피를 믿어야 합니다. 피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많은 이유 없는 참소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쇠사슬을 부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참소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기는 믿는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기는 믿는 이는 반드시 피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피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당신이 평가하신 피의 가치에 따라 나에게 적용하소서.” 우리가 평가한 가치가 아니라 주님께서 평가하신 피의 가치에 따라서 사탄의 능력을 처리해야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3:45
성경말씀 

 (히11:8)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름을 받고서 장차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오늘의 만나

 
 한 척의 해군 함대가 항로를 잃어 며칠 동안 다른 배나 해안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장은 흔들림 없이 밤낮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그의 군함이 다행히도 목적지인 부두를 향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육지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다만 나침반의 방향을 의지해 항해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노정도 이와 같습니다. 눈을 의지하지 말고 마음속의  성령의 느낌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포함해야 하며 믿음과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