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57번, “안식년과 희년(2)”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 속죄일에 나팔소리가 퍼져 나감
25장 9절 “너는 일곱째 달이 되면 그달 초 열흘날에 숫양 뿔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희년이 속죄에 근거하여 완전한 자유가 온 백성들에게 선포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에 의해 성취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내어 나팔을 불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희년을 선포하며 나팔을 분다면, 사람들은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칠 것이다.
10절은 사람이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도록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는 완전한 책임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희년에는 수고가 없으며, 책임이 없다. 즉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 심지어 수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어떤 부담이나 책임 없이 밭에 나가서 먹을 수 있다. 책임을 지는 대신에 우리는 안식과 누림과 외침을 갖는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을 때 그런 체험을 했다. 우리가 구원받던 날 우리는 해방되었으며 모든 묶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이 희년의 체험이며 누림이다.
* 각 사람은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감
10절 “너희는 각자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자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신약의 믿는 이들이 그들의 잃어버렸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유지를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곧 신약의 희년 때에 우리는 우리의 가족, 곧 신성한 가족에게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부유하며 우리의 신성한 가족 안에서 자유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외쳐야 하며, 교회 집회 안에서 주님을 향한 기쁨의 소리를 내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희년이다.
* 일곱절기에는 두 가지 완성이 있다.
레위기 25장의 일곱 절기들에는 두 가지 완성이 있다. 첫 번째 그룹의 네 절기는(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한 오순절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그룹의 세 절기들은(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천년 왕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완성은 교회 생활을 산출한 오순절이며, 두 번째 완성은 완전한 희년을 가져오는 장막절 곧 천년 왕국이다. 11절-12절 “오십년째 되는 해는 너희를 위한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되고, 수확한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어들여서도 안되며,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딘다. 이 해는 희년이며, 너희에게 거룩한 해이다. 너희는 저절로 난 것을 먹어야 한다. 이것은 희년 때에는 사람의 일이 불필요함을 의미한다. 희년은 전적으로 사람이 안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신다.
*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속한 토지는 영원히 팔지 못함
23절 ”땅을 영구히 팔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고 체류자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성한 소유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패배하고 타락하더라도 영원히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보호하심이다. 신약에는 왕국의 보상과 왕국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천년 왕국 동안에 패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징계받을 수 있으나, 우리의 영적 소유권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 천년 왕국이 끝난 후 징계받았던 믿는 이들은 그들의 신성한 소유지를 다시 돌려받을 것이며 특별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 팔렸던 땅을 되사는 것에 관하여
레위기 25장 24절부터 28절까지는 팔렸던 땅을 되사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그의 잃어버린 소유지를 회복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었음을 본다. 첫째, 그의 잃어버린 소유지는 가까운 친척에 의해 다시 살 수 있었다. 이것은 은혜의 문제이다. 둘째, 그에게 재산이 있다면, 스스로 그것을 다시 살 수 있었다. 셋째, 그것을 다시 살 수 있는 친척이 없고 스스로도 그것을 살 수 없다면, 그는 희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은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잘 나타내는 예표이다.
* 레위기 25장 29절부터 34절까지는 팔렸던 집을 되사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
29절-30절은 만일 어떤 믿는 이가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렸다면, 그 누림은 하나님의 짧은 은혜의 범위 내에서는 회복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 것이 교회 시대 안에서 회복되지 않는다면, 천년 왕국에서도 그 누림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없는 자에게서 있는 것까지 뺏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마 25:29). 그러므로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성벽 있는 성내의 집은 교회 생활의 예표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팔 수 있으나 교회 생활만은 팔아서는 안 된다. 교회 생활을 판다면 우리는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받으며, 희년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교회 생활의 누림은 일 년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짧은 은혜의 범위 내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
완전한 일 년은 교회 시대를 예표한다. 우리는 교회 시대가 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실상 교회 시대는 짧다. 신약은 교회 시대가 짧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주 예수님은, 『내가 속히 갈 것이다.』(계 3:11)라고 말씀하셨다. 게으르고 악한 종만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마 24:48)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오심을 서두르고 계시며 교회 시대는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다. 교회 시대는 길어지거나, 연장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 생활이 내일 끝나게 될지 아닐지 장담할 수 없다. 교회 시대는 짧은 시간 동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시대는 짧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 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은 주님의 재림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고 빨리 그것을 되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한 천년 왕국 안에서도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천년 왕국 동안에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적한 바와같이 이것은 없는 자에게서 있는 것까지 빼앗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시대에서 교회 생활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는 시대에 교회 생활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회복되기 쉽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교회 생활을 회복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회생활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팔지 않도록 경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팔았다면, 우리는 가능한 빨리 잃어버린 교회 생활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우리의 잃어버린 교회 생활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년 왕국 동안 징계받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게 되면, 장차 올 천년 왕국에서도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는 것보다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32절-33절은 레위인들이 누림을 잃었어도 쉽게 회복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합당하게 봉사하는 믿는 이들이 누림을 잃게 되어도, 시간의 제한 없이 누림이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가 많이 봉사할수록 우리에게 유익됨을 본다.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봉사할수록 우리의 교회 생활의 누림은 더 안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쉽게 잃어버리지는 않겠지만, 만일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쉽게 그리고 빨리 그것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봉사하는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3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과 교회 생활의 누림 모두를 위하여 우리는 교회 봉사에 더욱 참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다시 찾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한정된 시간 내에 잃어버렸던 교회 생활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한 장차 오는 시대에도 교회 생활을 잃어버릴 것이며 우리가 영원한 시대를 위하여 징계받고, 훈련받고, 교정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 25장의 예표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신약의 분명한 말씀들 안에서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느슨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교회 생활을 회복하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 시대가 얼마 동안 지속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 년이 하나님께는 단 하루가 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천 년이다.
장차 올 천년 왕국 동안의 시대적인 상벌의 심각한 문제는 복음이며, 특별히 마태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상과 벌에 관하여 여러번 경고하고 있다(마8:12,11:17,13:42,22:13,24:51,25:30). 레위기 25장에는 두 가지 누림-땅을 누리는 것과 집을 누리는 것-이 있다. 땅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예표하고, 집을 누리는 것은 교회 생활을 누리는 것을 예표한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교회 생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시대에 교회 생활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으며, 잃어버리게 되면, 장차 오는 시대, 곧 왕국 시대의 천 년 동안 징계받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0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소유하기 위해 그분의 체험 안에서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며 그분을 따르고 배우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는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완전히 외적으로 그분을 모방할 것을 가르친다. 15세기 토마스 아 캠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외적인 삶을 모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의 신학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모방하고, 그분께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약의 어떤 구절들은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서들 안에서 주 예수님은 종종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고했다(고전 11:1). 그러한 구절들은 외견상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성경 교사들이 믿고 있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그분을 외적인 본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갈 2:20).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를 그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가르침 받았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결심했어도, 그들은 결국 성질을 내고야 만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실패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강한 의지로 성공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가르침의 실행일 뿐이다.
그런데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신서들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권하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한다. 위에 언급한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고백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도 그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라고 간증했다.
우리가 결혼 생활에서 주의할 것은 다투려는 유혹이 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을 때는 부부싸움을 하려는 유혹이 온다 해도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다투지 않을 것이다. 배우자와 다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대신,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
새 신자들이 외적인 방식으로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흉내를 내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단지 그리스도를 사는 것만을 알 뿐이라고 간증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오 주 예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과 대화하기 시작하며, 그분과 교통하기 시작하며 그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먹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살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다면, 마귀의 어떠한 유혹을 받는다 할지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귀와 모든 귀신들을 패배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으로 사는 생활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종교와 다르며 공자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것과도 다르다.
내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학교에 다니는 나의 누님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어느 날 누님은 나에게 어떤 성경 교사에 대해 알려 주었는데 그는 매우 인내가 있었고, 항상 손에 성경을 가지고 천천히 걸으며, 종종 멈추어 하늘을 보거나 성경을 보곤 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을 때 그렇게 해 보려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흉내를 내는 「원숭이」와 같았다. 나는 빠른 사람으로서 느리고 인내하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는 포기했다. 그러다가 나는 속 생명 무리들과 접촉했고, 그들의 어떤 가르침을 통하여 빛 비춤을 받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밖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대신 우리는 그분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살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이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누릴 필요가 있다. 이것이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또 한 번 승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