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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골2:2), 삼위는 각 고유성을 가지고 구별되나 상호내재 하심으로 결코 분리되실 수 없으며, 신약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God)(요4:24) 이셨지만, 성육신 후로는 하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신성'의 면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전제하에, '맏아들'에 관련된 핵심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느 날 입으신 '육신'과 이 '인성'이 부활시점에서 어떤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몇 차례에 걸쳐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의한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롬5:10). 또한 앞으로의 글들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시점'에서의 '인성방면'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도행전 13장 33절의 '오늘'은 성육신이 아닌 '부활시점'입니다.
행13:33은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시편 2:7의 인용이며 같은 내용이 히1:5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This day)이 '성육신' 시점인지 아니면 '부활'시점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만일 위 날이 성육신의 때를 말한다면 새로울 것이 없지만, 부활의 날을 가리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번의 출생이 있다는 말이 되며 나중의 출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을 성육신의 때로 보시지만 전체문맥을 보면 이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박만수 외, 증거, 도서출판 안티오크, 1993, 170쪽). 오히려 '오늘'을 '부활 시점'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사도행전 13장 이후는 사도 바울 일행의 이방 땅의 사역을 다루는데, 사도 바울은 행13:13-43에서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33절의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he had raised up Jesusagain)는 말씀은 '오늘'이 '부활시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명한 신약학자인 조지 레드도 그가 쓴 '부활론'에서 다음과 같이 위의 해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사건을 시편 2편의 성취로 보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50쪽).
(2)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또 하나의 출생'으로 말합니다. 즉 그분은 첫 출생인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셨고 두 번째 출생인 부활 안에 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 주님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매우 많이 강조하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독생자(삼위의 제2격)의 방면과 많은 형제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방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생한'(only begotten)이란 말은 하나님이 유일한 한 아들만 가지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요1:18, 3:16). 신격의 두 번째이신 아들 하나님(신성)은 그분의 영원한 신분이며 사람은 누구도 이러한 신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에게 둘째, 셋째, 또는 많은 아들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즉 독생자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맏아들'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롬8:29, 히1:6). 이것은 앞서 본 '독생자'의 방면이 아니라, '신성'과 부활시점에서 높이 올려진(uplifted)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롬1:4)를 가리키는 것-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하늘에 있습니다(롬6:6, 엡2:5-6). 그러므로 주님은 히브리 서에서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많은 아들들)이 다 하나(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히2:11).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서로 '형제 자매'라고 한다며 비판하는 어떤 분들과는 크게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습니다(요12:24, 벧전1:3). 또한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은 가지지 못하지만 주님의 몸으로서 맏아들이신 주님과 동일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한 새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엡2:15).
즉 맏아들이신 주님은 [경배 받는 '신격']과 '신성'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인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아니나- 이것은 독생자의 고유권한이심] '신성한 생명과 본성' 그리고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요1:12, 벧전1:4,.롬12:2, 빌3:21). 존귀한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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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요1:18)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 하나님이시라면, 많은 형제들이 있는 '맏아들'(the first-born, 롬8:29)은 '신성'과 '높이 올려진 (인정되신) 인성'(롬1:4)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한국교계에서는 이러한 깊은 성경 진리가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꼼꼼히 듣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부활 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면, 그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는 아니라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이후 부활, 승천, 재림 심지어 영원토록 '인자'(사람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주님이 부활 후에도 뼈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눅24:39), 승천 후에도 스데반에게 인자로서 보이셨으며(행7:56), 재림 시에도 인자로서 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6:64). 이뿐 아니라 주님은 영원토록 인자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실 것입니다(요1:51).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비오면 걸치고 날이 개면 벗어버리는 레인코트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은 부활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은 아니라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성육신 이후 영원토록 '하나님-사람'(God-Man)이십니다.
(2).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높이 올려졌다 또는 인정되었다'면 예수님의 고유한 인성이 파괴되어 제 3의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사실은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이 이렇게 저희들을 오해하였습니다. 즉 지방교회측이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나실 때부터 승천 시까지 참하나님이시요 참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말한 '인성의 변화' 또는 '인성의 높이 올려지심'(uplifted)은 예수님의 '육의 몸'이 부활 후에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제 3의 어떤 물질로 변질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고 한 비판입니다(고전15:42-44).
이 점은 쌍방의 공개 토론시 충분히 설명 또는 반박되었다고 믿습니다(누가이단인가, 118-121, 252쪽 참조). 롬1:4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길 원하시는 분은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른 책자인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WL, 한국복음서원, 1996년, 245쪽 분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첫 열매로서 입으신 영광의 몸의 형체를 낮은 몸을 가진 우리도 장차 똑같이 입을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우리 참된 믿는 이들이 가지는 영광스런 소망 중 하나인 것입니다(빌3:21, 고전15:49, 히2:10). 장로교 신약학자 조지 래드도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세상 끝 날의 성도들의 부활체와 동등한 서열에 있다. 예수님과 성도들은 한결같이 '영적인 몸', '영광의 몸'을 소유한다. 이 사실은 빌립보서 3장 21절에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진술되어 있다'(죠오지 래드, 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55-156쪽).
사실 부활 전 후의 '예수님의 인성'에 어떤 비밀스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부활 이후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셨던 주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20:19, 26, 눅24: 31, 막16:12). 장로교 신학자인 조지 래드는 이러한 비밀스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부활의 순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답은 예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위 책, 126쪽).
(3). 주님은 부활 이후에도 고유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되, 인성은 '비밀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성수를 위해 몸만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에겐 이런 교제가 골치 아프실 것입니다. 그냥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으면 되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느냐고 나무라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둑세계에도 다양한 급수가 있고, 영어를 배워도 초, 중, 고급반이 있듯이, 성경진리에 대한 인식 정도도 성도들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제를 통해 빛 비춤 받고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는 분은 주님을 깊이 있게 추구하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 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인 58개 구절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부활 전후의 '인성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15:42-49, 52).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위 내용들이 우리가 부활시 체험할 것 일뿐 아니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가 본으로 먼저 체험하신 것임은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고전15:23).
본질적으로 영이신 삼위 하나님(요4:24)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후, 그 육신조차도 부활시 영화롭게되어 조지 래드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세계]로 높여진 분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맏아들'(롬8:29)이십니다. 이 분이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지금은 몸된 교회생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인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고전15:45, 요일5:11-12, 갈4:19, 롬8:30). 오! 이 어떤 구원인지요(롬5:10, 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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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의 요 7:39는 난해구절중 하나입니다 :
'이는 믿는 자의 받을 '그 영'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원문에는 없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But He said this concerning the Spirit, whom the ones believing into Him was about to receive ; for Holy Spirit was not yet, because that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위 영어본문은 핸드릭슨사에서 출판한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1987년판)의 본문이며, 영어 KJV는 원문에 없는 'given'을 넣었음으로 인용치 않았습니다.
위 구절에서 '믿는 이가 받을 그 영'이 아직 없는 이유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라는 본문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보겠지만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신 그 영'(The Spirit)이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된 시점인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 영'의 존재시기와 그 영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시기는 '부활시점'입니다.
원래 아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 안에 계셨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셨지만 이 영광은 입으신 육신 안에 가려져 있었습니다(요17:24, 1:18). 그러나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실 때 영광을 감싸고 있던 그분의 인성이 비로소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눅24:26, 요12:16). 주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와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함께 말씀하셨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요12:23-24).
이처럼 영광은 빛이신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인 것입니다(요일1:5, 계21:23).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WL, 한국복음서원, 1996, 118쪽 분량)라는 책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삼위의 제 3격 성령님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이미 계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육신 하신 아들을 성령과 분리된 분으로 아시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분리된 분으로 아십니다. 즉 성령을 먼저 등장하셨던 아버지와 아들은 저 하늘에 남겨둔 채 홀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보는 잘못된 신관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구별되시되 결코 분리됨 없이 언제나 서로 안에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간의 상호내재는 영원 전부터,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 아니 영원토록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시킬 자도 없습니다(요14:10, 20, 요일1:3, 2:22-24).
한 장로교 신학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제3위 성령님이 이미 내재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성육신과 성령에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의) 육신 안에 성령께서 영원토록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육신 안에 충만히 거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이며... 여기서의 강조점은 날 때부터 성령으로 태어나셨음을 강조한다. 또 성령의 충만 정도가 아니라 성령자체를 소유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육신은 함께 생을 산다(이순태, 현대성령론 평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25쪽).
3.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과 인성 둘 다 소유하신 '그 영'은 부활 후에만 계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7:39의 '그 영'은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 또는 롬8:2의 '생명의 영'과 동의어로서 '맏아들' 즉 부활 후의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이런 말을 언뜻 들으면 삼위의 제2격과 제 3격이 동일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가 분리할 수 없으나 엄격히 구별되듯이, '그 영'(아버지, 아들, 성령 + 높여진 인성) 안에서도 삼위는 분리할 수는 없으나 엄연히 구별됩니다.
요7:39와 같은 심오한 진리는 한국교계에서는 낯설지 모르지만 국외의 일부 장로교 학자들 중에는 이 부분의 진리를 보신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화란 개혁신학 배경을 가진 경건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자에서 요7:39의 '그 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인간을 죄와 저주에서 구원하심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 새로운 거룩한 인성(humanity)을 완성하심으로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생명을 (성도들이) 전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부활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성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성도들 안에) 임하실 수 있었다'(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42-42쪽).
따라서 요7:39의 '그 영'은 삼위의 제3격만이 아니며,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님)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생명 주는 영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놀라운 분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셔서 우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요3:6).또 다른 장로교 신학자인 루이스 B. 스미디즈도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은,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질 수 있'는 기독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여수룬, 1991, 26-27쪽).
PS: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고전15:45를 연구할 때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끝으로 The Spirit, The Holy Spirit, Spirit 등을 모두 삼위 제 3격만을 의미하는'성령'으로 번역하는 것은 혼돈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22:17은 제 3격 만을 의미하는 '[성령]과 신부'가 아니라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높여진 예수의 인성을 가지신 [그 영]과 신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도 the Holy Spirit이 아니라 The Spiri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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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6회에 걸쳐 '맏아들'(롬8:29)에 대해 교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극히 성경적이지만, 한국교계 내에서는 생소한 부분이 있으며, 더구나 앞으로 '기독론'과 '성령론'이 겹쳐지면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다음은 풀러신학교의 루이스 스미디즈 교수가 쓰고 총신대학과 웨스터민스터에서 공부한 오광만 님이 번역한 'UNION WITH CHRIST'(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 1991년판) 내용 중 '기독론들'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해당되는 것들을 요약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점에서 본 기독론(위 책 제1장)
첫째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십자가와 부활은 당연히 불순종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적인 일을 성취했지만, 이것은 지엽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이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 지는 것'에 강조 점을 둡니다.
즉 기독론의 중점을 예수님 생애의 역사적인'행위들'에 두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된 '존재'에 두는 관점입니다(위 책, 22-29쪽).
둘째는 계약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성부와 성자간의 계약에 의해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사건)을 매우 강조합니다(위 책, 29-36쪽).
셋째는 상황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되, 그 강조 점을 이러한 죽음이 악의 세력들을 처리함(골2:15)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적 상황(situation)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데 두고 있습니다(위 책, 36-50쪽).
대략적으로 동방정교회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을 취한다면, 한국 교계 대다수 성도들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장로교단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다음 글들은 그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되 '성례적 기독론'의 관점을 포함하며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인성 안으로 주입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밖에 남아 계신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이 받으신 모든 고난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사역들은 무익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Institutes II. xvii. 1)'(위 책, 29-30쪽).
2.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두 가지 관점(제 2장)
첫째는 '증발된(pneumatic?)그리스도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위 책 저자는 이 범주에서 빌헬름 부세트와 아돌프 다이스만의 관점을 소개했는데 핵심은 부활 전의 '예수'가 부활 후의 '주(영)'임으로, 그리스도 주와 영을 '동일'(고후3:17)하게 보는 관점입니다(위 책, 53-57쪽).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칼빈은 그의 '에베소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셨지만,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고 말합니다. 즉 이 이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 즉 예수님의 '대리인' 일뿐입니다(위 책 57-61쪽).
그런데 위 책 저자인 루이스 스미디즈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사도 바울의 관점- 성경적 관점-을 자세히 고찰한 후, '성령(그 영)은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위 책 61-88쪽). 물론 저자는 이러한 총론에 해당되는 글에 이어서 그의 책의 후반부 전체인 약 180쪽을 할애하여 자신의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 결론적인 몇 줄만 읽고 성급하게 '양태론자' 라고 공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이런 혼란은 앞서의 지적처럼 '그 영'을 아버지와 아들은 제외된 '제3격 하나님만'으로 볼 때 생깁니다).
스미디즈 박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C.H. Dodd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분은 James Dunn의 '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 giving Spirit'(B. Lindars & S.S. Smalley편집, Christ and the Spirit in the New Testament(Cambridge, 1973)과 'Jesus and the Spirit(philadel phia, 1975)를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 내의 성령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하자면, 지상에서 그의 몸의 생활의 확장을 얻으신 셈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NewYork, 2nd ed., 1954), p62). (위 책, 86쪽).
지금까지 본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민감한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이 주도해 온 한국교계는 위 이론들 중에서 '계약적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대리로서의 성령론'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정통'이고 다른 것은 '이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강조하고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생명을 소홀히 하는 이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 같은 개혁신학자인 J.H. Bavinck가 지적한 '개혁교회의 영적 결핍'의 중요한 원인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성령론, 경향문화사, 1994, 61쪽).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서 '영적 성숙'(서신서)과 '익은 열매'(계시록)를 산출하시는 분은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부활생명'으로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생명 주는 영'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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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 책만 보게 하고, 다른 서적은 일체 못 보게 통제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희들의 신학계간지 '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의 글들을 쓰기 위해 인용한 '참고 목록들'을 훑어보시면 그 말이 거짓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히려 지방교회가 개혁신학을 포함한 기독교계의 여타 신학들의 실상을 깊숙이 알고 있더라고 소문 내시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똑똑한 머리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평범한 비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1) 하나이며 셋이신 하나님(창1:1, 마28:19, 사45:15, 요14:11). 2)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요1:14, 갈4:4). 3) '예수님'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고전15:45). 4) 승천 후 예수님이 하늘과 성도들 안에 동시에 계신 것(히7:25-26, 고후13:5, 롬8:10). 5) 예수님이 믿는 사람들과 결혼하시는 것(고후11:2, 계21:2, 9-10)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진리들을 참되게 아시려면 사도 바울 처럼 겸손히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나아가 이런 영적 실제들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엡1:16-18상, 3:14-15). 이러한 심정으로 이제 '경륜적인 방면의 하나님'과 '고전15:45'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에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너무 무시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변치 않고, 엄격하게 구별되며, 상호 내재하여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한 분이십니다(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하나님의 위격이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개혁신학의 뿌리인 아우구스티누스나 터툴리안의 가르침과도 다른 무지한 '이단 가르침'입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 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을 참조)).
이러한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케 하고 나타난 모양도 같게 할 경륜(계획)을 수행하셔야 만 했습니다(엡3:2-11, 요10:10하, 벧후1:4, 요일3:2). 이것을 계획(아버지), 성취(아들), 적용(그 영)하시는 일을 위해 삼위 하나님이 거치신 긴 과정들을 가리켜 학자들은 '경륜적인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이종성, 위 책, 257, 261쪽).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지방교회측이 '하나님이 육신 입어 하나님-사람'이 되셨고(요1:14), 이 '하나님-사람이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고전15:45)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전능성을 위배한 이단사상이라고 공격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안 되셨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안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적 사실조차 정면 부인하는 끔찍한 이단사상] 이면에는 예수님의 행적을 '사건중심'으로만 이해해 온 신학사조가 잠재의식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성육신이 한 번 해본 '사건'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의 경륜 방면에서 엄청 난 '존재의 변화'입니까? 이 비밀을 영 안에서 참되게 본다면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성육신의 엄청난 경이'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입니다.
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딤전3:16)!!
2.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십니다.
고전 15:45 하반 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아담'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구별되나 '결코'(never) 분리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인성)을 입으신 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자신인데,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신령한 몸(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신 것뿐입니다(고전15:44, 빌3:21). 이러한 '되심'(became, was made)의 시점은 예수님의 부활시점입니다(눅24:26, 행3:13).
어떤 번역본은 원문(조오포이에오 #2227)를 '[살려주는]' 영이라고도 하나 다른 용례와 번역본들을 참고할 때 '[생명 주는] 영'이 더 무난합니다. 그러나 '살려주는'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요6:63, 5:21, 롬8:2, 11, 고후3:6).
즉 성육신 안에서 예수님은 구속(redemption)을 위해 육신이 되셨다면(요1:14, 29),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입(the imparting of life)을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 뿐 아니라(고전15:3),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10:10하, 5:40). 따라서 한국교회들이 설교나 복음전파 시 '죄사함' 만 강조하고 '생명' 방면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롬5:10 원문참조).
3. 개핀 교수님과 차영배 박사님의 토론이 말해주는 것
'성령론-구원론 부교재'(차영배, 도서출판: 경향문화사, 1994)에 소개된 고전15:45에 대한 위 두 분의 서면 토론내용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존경받는 개혁신학자이며, 차 박사님은 직접 국내신학교 교수로서, R. B. Gaffin 박사님은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자신에게 배우고 귀국하여 국내 신학교 교수가 된 제자들을 통해 한국 교계 내 신학이론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위 책에 소개 된 개핀 박사님의 고전15:45에 대한 입장은 '본문 내용이 삼위 상호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 경륜적, 기능적 관점이라는 전제아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선물은 높아지신 그리스도 자신, 곧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는 생명을 주는 (성)영이며,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일치한다'고 합니다(위 책, 49쪽). 이에 대해 차 박사님은 '고전15:45의 살려주는 영'은 뼈와 살이 없는 성령을 가리킨 말이 아님으로 성령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함은 위격을 혼동할 위험이 크고, 양태론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반박합니다(54쪽).
이에 대해 개핀 교수님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본체론적', 위격적 혼동 없이 '기능적'으로 단일이라는 것(functional oneness)이다'고 재차 반박했습니다(63-64쪽).
위 토론을 평가하자면,
첫째, '생명주는 영= 단순한 제3격만의 성령'은 물론 아닙니다. 고전15:45 본문 자체가 이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둘째, 개핀 박사님은 위 내용을 경륜적 관점에서 서술했다면, 차 박사님은 이것을 본질적 관점에서 '양태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차 교수님은 개핀 교수의 '본체론적 혼동 없이' 라는 단서를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성육신 안에서도 예수님 인성 안에서 위격 혼돈 없이 상호내재 했던 아들과 성령이 부활 후라고 해서 위격 혼동을 가져올 일이 없습니다.
셋째, 본문에서 '생명주는 영'이 단순한 3격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신격(아버지 아들, 성령)+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인식이 두 분에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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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조연배우'와 '세트'도 있지만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맏아들(롬8:29)'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입으신 인성을 다룬 핵심진리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가, 아니면 셋으로 분리되는가?, 또한 우리가 영접한 주님이 인성을 가지시는가, 벗어 버리셨는가 아니면 인성을 아예 입으신 적도 없는가? 하는 점들을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이 상호내재 하심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 글에서 열거한 난해구절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와 터툴리안은 '분리된 세 하나님' 사상을 배척합니다.
성경본문(요14:10-11, 20)과 위 정통교부들은 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주장하는 '분리된 하나님(들)' 이단사상을 배척합니다. 정통 삼위일체 이론의 최종주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로 계신다. 위격의 하나가 아니라 실체의 하나이다. [하나님과 아들이 분할 할 수도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게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의 세 위격을 삼중적(triplex)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각자가 유리(분리)되어 있는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격은 상호내재 한다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쪽).
'삼위는 구별되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터툴리안의 견해는 이미 소개 드린 바 있습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
삼위일체 신앙이 잘못되면 기독론, 성령론도 당연히 잘못되게 되어 있음으로 한국교계 내에서 영향력 있는 분들의 '분리된 세 하나님 이단사상'은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합니다.
2. 맏아들과 관련 된 난해 구절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맏아들'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육신이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된 생명 주는 영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분이 이 시간에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보좌 위에서 계시며, 동시에 생명으로서 이 땅위의 참된 거듭난 성도들로 된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계십니다. 이런 성경적 관점을 갖는다면 다음 구절들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1:51]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28:11-22의 야곱의 꿈의 성취입니다. 맏아들인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건축하도록 하늘로 땅을 향해 열려있게 하고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머리로서 하늘의 모든 풍성을 교회에 전달하시고(엡1:22-23), 이 땅 위의 주님의 몸인 교회지체들을 아버지께 이끌고 계시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엡2:18, 요14:5).
[요7:39]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제3격 성령'이 아직 없다는 말이 아니며, 영화롭게 된 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실제이신 '생명 주는 영'이 부활 전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행9:4]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역사적으로 사울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결코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승천 후 맏아들은 생명으로 제자들 안에 들어와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몸인 제자들을 핍박한 것은 곧 주님자신을 핍박한 것입니다(골3:4, 고전6:17).
'예수님 사랑해요'를 외치면서 주님의 지체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것은 마치 주님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발로 그분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작은 지체'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임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마25:40).
[롬1:4]는 '이 아들로 말하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시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고전15:44)으로 높여짐으로' 그분 안에 있던 신성이 영화롭게 된 인성을 통해 밖으로 충만히 표현되신 것을 말합니다.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롬8:10]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롬8:34]는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두 분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이신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생명'으로 믿는 이 안에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롬8:2).
[히2:11-12]는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받는 자(많은 형제들)가 다 한 아버지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요12:24). 놀랍게도 예수님은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형제'라 부르지만(요20:17, 롬8:19, 벧후3:15),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또는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형제님' 하고 친근하게 부를 수 없다면 거기에 이미 계급적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인 니골라당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계2:6,15). '형제'는 직분이 없는 평신도를 가리키는 저급한(?) 호칭이 결코 아닙니다.
[계5:6]은 하늘에 계신 '어린양의 일곱 눈'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분리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인성을 입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생명 주는 영으로 이 땅에 오심을 말합니다. 삼위는 상호내재하나 구별된 상태로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에, 2격이 3격과 혼동을 일으킬 일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영(Spirit)'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무조건 '아버지', '아들'은 아니고 제3격인 성령하나님만'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오! 우리 안에 지금 계신 이는 비밀하고 신령한 몸(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 사람'이십니다. 이 분은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상호내재하시며 인성도 있으신 그 영 하나님(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십니다. 이 분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에서는 아니나 우릴 맏아들인 자기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롬8:28-30).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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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부담(burden)을 글을 통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지를 묻고 순종하다보니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핵심사항을 재 강조함으로 '맏아들'(롬8:29)에 대한 교제를 마칠까 합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작은 지체들의 교제가 한국교계 내에서 '맏아들'에 대한 성경적 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어떤 표현은 분별을 위함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분들을 정죄 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 상한 분이 계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1. '맏아들'(롬8:29)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합니다.
1) 한 분 하나님이신(사45:5, 고전8:4)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위격이 엄연히 구별되시지만, 상호 내재하심으로 영원토록 결코 분리되지는 않으십니다.
2)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God)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고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1/3하나님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딤전3:16, 골2:9)이심으로, 아버지와(혹은) 성령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 입니다(요14:10-11, 마1:18).
3) 예수님은 삼위가 상호 내재하는 '온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죄만 없으시지 평범한 우리들과 똑같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8, 딤전2:5). 성육신과 부활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성 자체에는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습니다.
4) 하나님 사람이신 예수님의 육신(인성)은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고전15:42-47). 이것은 인성을 벗어버리거나 인성이 제3의 물질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고전15:44).
5) '하나님'이 성육신 후 '하나님 사람'으로(요1:14), 또한 부활 후에는 이 분이 신령한 몸을 입은 하나님-사람이신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만일 누가 하나님의 불변성만을 주장하며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부인한다면 심각한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6) 성경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요 생명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을 가진 맏아들이십니다(롬8:29). 이 분은 지금 하늘 보좌 위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시는 동시(롬8:34)에 이 땅에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골3:4). 이러한 실체가 한 '새사람' 또는 '그리스도의 몸과 머리'입니다(엡2:15, 골1:18).
2. 거듭난 후의 신앙생활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엡1:4-5, 롬8:29).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복음으로 불러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요3:6), 혼을 변화시키고 계시며(롬12:2, 고후3;18), 결국 우리의 몸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빌3;21, 롬8:23),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경은 이 목적을 위해 합력하고 있습니다(롬8:28).
속히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고(엡4:13-16) 새 예루살렘이 완성되기를(엡5:25-27, 계21:2, 9-10) 하나님이 고대하시고, 이기는 자들이 고대할 뿐 아니라, 썩어짐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피조물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롬8:19,21).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소서! 세월을 아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시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엡5:16-17, 벧후1:3-4)! 이 땅의 모든 주의 종들은 마땅히 당신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이 한가지를 위하여 수고하게 하소서(갈4: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