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22. 5. 23. 10:45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22. 5. 16. 00:35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9. 4. 12. 00:05

지방교회 동영상 생명이만나 108회

주님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그 영이심


지방교회 이만나 유투브 : https://youtu.be/dMHUOZu_W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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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rryking 2019. 1. 10. 00:16

지방교회 동영상 생명이만나 64회 -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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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10. 05:00



하나님 경륜 적용하기- 씨뿌리는 자와 씨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어떤 책은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나와는 직접 관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당장 내가 맞 부닥뜨린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읽는 것도 있습니다.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읽되 남의 이야기처럼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시작 한 이후로는 그 말씀들이 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3장을 읽었습니다. 소위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것이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세 가지인데 씨뿌리는 자, 씨, 그리고 밭으로 예표된 우리의 마음입니다. 

1. 씨 뿌리는 자  

마13:3은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대목은 비유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참 내용은 무엇입니까?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씨뿌리는 자'로 비유된 누군가가 뭔가 모르지만 '씨'로 지칭된 뭔가를 뿌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의 '씨뿌리는 자'는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말씀은 말씀으로 푸는 것이 제일 정확한데, 37절에 의하면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주 예수님-라고 정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주님자신이 씨뿌리는 자는 '인자'(the Son of Man)라고 밝히셨으니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저는 여기서 더 전진된 묵상이 있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 지상 사역시의 과거 사실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승천 하신 이후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직접 복음의 씨를 뿌리고 다니신다는 뉴스는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사례를 끄집어 내자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고 하심으로 사울을 바울되도록 회심시킨 이야기 정도가 생각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지금은 씨를 뿌리지 않으시는가? 

여기까지 묵상할 때 그렇지 않다고 느낍니다. 주님은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사람들 안에서 씨를 뿌리고 계신다는 빛이 왔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누림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씨뿌리는 자'가 아니며 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거나 철학과 윤리를 설파하는 사람들도 복음 전도자로 간주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오직 거듭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자신'만이 씨뿌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둘째는 복음을 증거하는 자는 자신의 복음 전파 경험이나 말 재주를 너무 신뢰하지 말고 자신 안의 '씨뿌리는 자'로 하여금 씨를 뿌리시도록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앙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은 아니로되 주님과 하나된 자였고 자기가 아닌 주님을 사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심었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씨뿌리는 자'와 하나로 연합됨으로 '나는 심었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고전3:6). 

마가는 그의 복음서 4장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싹 (the blade)그 다음엔 이삭(the ear) 그 다음엔 충실한 곡식(the full corn) 그 다음엔 추수가 있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점점 자라시고 형태를 이뤄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날 어느 특별한 장소로 옮겨가는 문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성경을 수 차례 심지어 수십 차례 읽었다면서도 이처럼 분명한 핵심을 놓치는 것일까요. 수건이 그 마음에 있는 채 성경을 읽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의 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천사들이 '영원한 복음'(계14:6)을 전하기 전까지는 씨는 씨뿌리는 자와 연합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뿌려질 것입니다. 즉 특별한 선교사나 전도사님들 목사님들 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성도들에 의해 뿌려질 것입니다(벧전2:9). 

이 일이 현재 택사스 주의 한 도시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이런 일이 미국 온 땅 심지어 전 세계에 까지 파급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2. 씨  

씨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는 배추 씨나 오이 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물질 축복의 씨나 건강 축복의 씨도 아닙니다. 이 씨는 성경 본문에 의하면 '천국의 말씀'(the word of kingdom) 입니다(19절). 38절은 이 씨가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8:12는 '천국의 아들들'(the children of kingdom)이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씨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거나 지옥에 안 간다는 씨와도 많이 다릅니다. 또한 천국의 씨는 마음 밭에서 자라는 것을 함께 말해야 하고,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의 정체들이 함께 말해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죽기만 하면 천국은 100 퍼센트 간다고 말하는 씨는 여기서 말하는 천국의 말씀인 씨와는 완전히 다른 씨-다른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마7:21은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엄중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에 이 말씀의 조건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교계에도 씨뿌리는 자와 어느 정도 연합된 사람들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입에서 선포되는 씨가 '그 씨'인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씨가 다르면 다른 싹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뿌리는 그 씨가 마태복음 13:3에서 인자가 뿌리시던 그 씨와 같은 종류의 씨인지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의 아니게 원수에게 쓰임받아 가라지를 뿌리는 짓을 할 수 있습니다(25절). 여기서 원수 사탄도 자기가 직접 뿌린 경우 보다는 그의 일군들을 동원하여 그리한 것입니다(고후11:15). 

3. 떨어지는 곳(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씨가 진짜인지 유사품인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곳에 떨어지는 가도 열매 맺음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줍니다. 
이 천국의 말씀
 이 떨어지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사람의 존재 안이고 더 정확히는 마음(heart)입니다(19절). 

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떨기이고 또 어떤 이의 마음은 좋은 땅인지는 성경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마13:19-23). 

오늘 날 마음을 처리하는 문제와 생명의 성숙을 복음과 함께 전파하는 단체가 어디있습니까? 길가, 돌밭, 가시떨기 마음을 처리하지 않고 주님 앞에 갈 때에 작은 상은 커녕 벌을 받고 심지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 쫒겨 슬피울며 이를 갈 가능성도 함께 말해주는 단체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속량하여 죄를 사하시고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생명의 성숙을 통한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음까지를 포함한다(갈4:4-5, 엡1:5, 롬8:29)는 하나님의 경륜에 눈 멀때 결코 완전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완전한 복음은 불 완전한 구원을 가져올 뿐입니다. 

장로교파 분들이 전하는 복음, 소위 구원파가 전하는 복음도 나름대로 복음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3장 2-11까지에서 전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부족이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말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복음은 상당 부분이 그냥 지나치거나 그냥 문자로만 언급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이 복음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취었던 진짜 완전한 복음입니다. 로마서 전체는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는 책이나 그 책 내용이 구속의 죄사함이나 거듭남만이 아니라 개인의 영화롭게 됨(롬8:23)과 그리스도의 몸 안의 생활(롬12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천국복음(this 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 온 세상에게 전파되어야 끝이 올 것입니다(마24:14). 

(그럼에도 한국 신학계의 교통정리자를 자임하는 어떤 단체는 바로 위 24:14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됨으로 이방인들에게 적용하면 큰일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 분들에겐 성경 66권이 다 그들의 성경이 아닙니다.참으로 지금은 바른 진리 분별이 절실히 필요한 혼잡의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5:30

 

성경말씀

(단9:11)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오늘의 만나

 어떤 갈림길에 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치우침 없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어떤 길도 사랑하지 않고 어떤 길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당신 앞에 놓인 길을 치우침 없이 보는, 균형 잡힌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길을 지시하실 때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면 주님은 쉽게 그분의 뜻을 당신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침과 불순종은 주님의 뜻을 아는 데 아주 큰 장애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기의 판단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고 해서 ‘원함’과 ‘원치 않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당신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뜻을 세우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인 줄 알 때에는 즉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어떤 원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어떤 원함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의 원함이 곧 하나님의 원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지방교회 생명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5. 19:30
성경말씀 

 (히3:1)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부름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님들... 

 오늘의 만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주님께 쓰임받는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속에 주님께서 우리를 쓰실 것이라는 미약한 음성이나 적은 느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스스로 자문해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이러한 느낌을 가졌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쓰임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은 다 주님의 지극히 큰 움직이심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일은 그분이 우리 속에 주를 위해 쓰임받기 원하는 마음을 주시는 일보다 못한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주님을 거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어찌 주님을 위해 쓰임받으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속에 주를 위해 쓰임받으려는 생각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권고와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5. 18:45
성경말씀 

 (사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오늘의 만나

 
 이사야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상황을 보았을 때, 그는 아주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선지서의 처음 다섯 장에서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 관하여 좋은 것은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주님은 그를 이상 안으로 이끌어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사6:1). 주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상황을 바라보지 말라. 그것을 본다면, 너는 낙심할 것이다. 나를 바라보아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좋은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좋다. 나를 바라보아라.”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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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5. 18:40
성경말씀 

 (고전6: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오늘의 만나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은 우리에게 세 부류의 사람을 보여 줍니다. 첫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고전3:3). 악을 행하고, 사악하며, 간음과 같이 더러운 것들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분파와 시기와 교만과 분열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갈망과 욕망을 따라서 일하고 움직이며 행동합니다. 두 번째 범주는 대다수의 고린도 사람들과 같이 혼적인 사람들입니다(고전2:14). 그들은 매우 감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병 고침, 은사, 방언 등만을 관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다지 육신에 속하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렇게 악한 것 같지는 않으나 분명히 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세 번째 범주는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고전2:15). 영에 속한 사람은 그의 생각을 영에 두고, 영을 따라 행하며, 영 안에서 탄식하고, 영 안에서 불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영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육신이나 혼에 속하지 말고 오직 영에 속하라고 권면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항상 영 안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이나 혼 안에서가 아닌 영 안에서 주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와 한 영이므로 영 안에 있어야 합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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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20:25
성경말씀  

(시143:8) 아침에 나로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오늘의 만나

 
 주님의 얼굴을 보면 모든 일이 가볍습니다.  쓰메이위라는 분은 중국 최초로 미국에 유학 갔던 여의사입니다.  몸집은 왜소하고 체중은 백 파운드도 안되었습니다.  그녀는 의사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 주는 한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워낙 부지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크고 어려운 책임을 맡고 있는데 어찌 힘들지 않아 보입니까?"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만일 매일 아침 일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저도 결코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을 보면 모든 일이 가벼워집니다."
출처:온전케 하는 예화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