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책망받은 한 가지인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님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그냥 사랑도 아니고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오 주님, 저의 우둔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당신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그 마음을 만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계 2:4).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련 성경 구절과 참고 자료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후서 : 물론 성경에 에베소후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신약 사도들로부터 두 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쓴 에베소서이고(엡 1:1),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계시록 2장 1-7절입니다(계 2: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일곱 서신중 첫 번째 서신은 ‘에베소후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J. N. 다비(Darby)는 “신약 안에 있는 ‘후서’는 모두 교회의 황폐함을 말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두 6장으로 된 에베소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졌으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어 가고 있었고, 사랑 안에서 행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그들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 …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면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주님께 강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통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모든 일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훗날 가장 근본적인 이 항목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부와 신랑에게 사랑의 무게감 :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은 한 가지’만 책망받고 그 외의 여러 가지에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으니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가 또한 주님의 사랑스러운 신부임을 생각한다면, 둘 사이의 사랑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하고, 사랑의 느낌이 있어야 하며, 그분에 대한 신혼 때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헌신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주여 저는 제가 처음 당신을 사랑한 것같이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과 저는 신혼 때와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말한 신혼 때의 사랑이다.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여 그들과 주님 사이에 그 신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당신은 그분께 “주여,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는 당신이 기뻐하는 바를 알기 원합니다. 당신의 명령이 아닌 곧 당신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주님의 종은 주님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만약 아가서에서 나오는 술람미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된 구절에 대한 추가적인 묵상 : 주님 앞에서 이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부분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11절은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을 잡는 섬김을 말하고, 15-16절은 나 곧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데, 후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은 위에서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 에스겔 44장에서의 두 종류의 섬김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노예가 밭에서 돌아와서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너는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시중을 들어라”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신약에서의 사례와 유사합니다. 복음전파와 목양은 귀한 것이지만,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또 그런 섬김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어야 합니다.
3)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행 13:1-2). 이 말씀 역시 주님을 위하여(for)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섬김(to)을 말씀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러한 친밀한 섬김의 결과임을 알게 합니다.
요약하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한 어떤 것이 이보다 우선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자백하고,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생명나무로 먹음으로써, 그와 연합되는 “처음 행위(첫째가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어떤 영적인 봉사가 주님 자신보다 더 우리 존재를 사로잡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가 참된 위기요 즉시 회개해야 할 순간임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불의한 일로 주님께 책망받은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상태 때문에 책망받은 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오 주님, 당신을 위한 어떤 봉사가 주님 자신을 대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더 깊이 연합하는 일이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