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05
성경말씀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12:22~23) 그럴 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덜 귀하게 여기는 몸의 지체들에게 더욱 귀한 것을 입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되지만, 

 오늘의 만나

 
 우리가 진정으로 몸의 생명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집에는 제한이 있으며 우리가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몸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끊임없이 교통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의미를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하지 않습니다. 다른 형제들을 귀히 여기거나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의 생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다른 형제들을 귀히 여기고 생명을 만지며 집회 가운데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집회에 올 때 우리는 도움을 받게 되고 생명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집회를 마치고 나올 때 어떤 형제가 와서 좋지 않은 집회였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좋지 않은 것은 집회가 아니라 그 형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의 입장 위에 있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교통하여 생명 공급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의 육체가 처리되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볼 것이고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교통할 것입니다. 그는 가장 약한 형제나 자매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00
성경말씀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만나

 
 “헤브론”은 원문에서 “교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생명의 문제이며 교통은 생활의 문제입니다. 벧엘을 거치지 않고서 헤브론에 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벧엘 다음에 헤브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통이라는 것은 몇몇의 사람들로 조직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없이 교통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처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통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처리되어야만 우리는 몸 안에서 살며 교통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실이며 실제이며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교통합니다. 우리가 천연적인 생명을 처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 안으로 들어가며 끊임없이 교통 안으로 이끌어 질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아는 사람들은 개인주의로부터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며 그들이 아주 약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통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보는 시점까지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교통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헤브론의 의미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55
성경말씀  

(창6:12~13)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마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39)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심판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하나님은 노아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노아에게 보여 주셨으며 그분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참된 상황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혼미했고 눈이 멀었으며 가리워져 있었고 분명치 못했으며 마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그들에게 임할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눈은 멀어 있었고 정욕으로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보십시오.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묘사한 것처럼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쾌락과 자기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정욕과 쾌락과 돈과 다른 세상적인 것들로 마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모릅니다. 노아의 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비밀을 노아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노아는 참된 상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에 강포가 가득하고 모든 육체의 끝 날이 이르렀으며 그분이 땅과 함께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13). 또한 하나님은 노아에게 할 일 곧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지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50
성경말씀 

 (롬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향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향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살전5: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분께서 또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의 모든 것과 가진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며칠이 지난 후에 잊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분은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가끔 우리에게 오셔서 그분께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너는 그날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약속한 것의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약속할 때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았음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말한 짧은 한마디 안에 하나님과 관계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는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로 인해 하나님께 묶였습니다. 그분은 부르신 분이고 우리는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미치기를 원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렇게 할 동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는 미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얻으소서. 주여!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소서. 나는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사람들을 주님께 헌신하게 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헌신하도록 동기를 주는 것은 주님의 나타나심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오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라거나 모든 것을 제단 위에서 주님께 드리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시면 그 어느 것도 그들을 헌신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45
성경말씀 

 (행7:2下~4上)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땅과 너의 친척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마4:19~2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람 얻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동기와 힘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방문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밤새 잠을 설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습니까?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다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수 년 동안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인 보잘것없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따랐던 것입니다. 나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던 예수님이 큰 빛(마4:16)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모두 그 큰 빛에 이끌렸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부르실 때 그들은 예수님께 이끌렸습니다. 외관상으로 볼 때 그들을 부른 분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영광의 하나님이 귀신의 땅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40
성경말씀  

(창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수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오늘의 만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가장 어두운 배경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배경은 아주 강한 것이었습니다. 이 배경의 첫 번째 측면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그가 쌓은 성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사람은 그의 보호가 되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을 쌓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방어해 주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할 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을 쌓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떠나게 하라. 나는 자신을 방어할 성을 쌓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을 뿐 아니라 자신을 높일 탑을 건축했습니다. 탑은 사람이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순간 자동적으로 자신들을 높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성을 쌓을 때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을 높일 탑을 건축합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 24장 2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바벨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즉 다른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귀신들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우상을 숭배하지만 사실상 귀신들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계9:20).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15
성경말씀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오늘의 만나  

창세기 6장 8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은혜를 언급한 곳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나에게는 매분마다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은혜로우신 분이며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가 있음을 압니다. 주여, 은혜에는 나의 동역이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은혜를 입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견딜 수 없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라는 곳이 있습니다.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여러분이 창세기 6장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여기에서의 은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많은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오셔서 그와 함께 계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노아의 힘이며 능력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누렸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혼잡한 세대, 아무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는 세대 안에서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강하게 하셨으며 그와 함께 서 계셨으며 그를 부축하셨습니다. 노아가 입은 것은 은혜였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은혜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00
성경말씀 

 (창4:2上)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오늘의 만나  

창세기 4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두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공허함을 뜻하는 '아벨'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결과, 인생은 공허해졌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바쁘게 움직이지만 그들 안에는 무언가 비어있고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들 속 깊은 곳에 허무함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상관없이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밤이나 아침 일찍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당신 안에는 무언가 비어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허무감이 지금 제가 말하는 공허함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왕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소유한 모든 것과 행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공허하고 허무한 사람일 뿐 입니다. 의미있는 특별한 두 번째 이름은 부서지기 쉬운, 죽어야 마땅한 사람을 뜻하는 '에노스'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인생은 공허해졌을 뿐 아니라 부서지기 쉽고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부서지기 쉽고 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요! 또한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일주일을 더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내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과 사람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5:50
성경말씀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오늘의 만나

 
 가인은 주제넘게 자신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피흘릴 수 있는 제물을 관심하시며, 타락하고 벌거벗은 사람을 가릴 수 있는 희생양의 가죽을 관심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옷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속죄 제물인 양을 죽이셨고 그 양의 가죽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릴 옷을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이 사실을 가인과 아벨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말을 영접하여 그 말을 따라 행동하였지만, 가인은 자신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길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 곧 자신의 관념에 따른 다른 종교를 발명했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그들의 선주자로서 자기 의를 세움으로 그리스도를 의로 취해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불순종한 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가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우리가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그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5:45
성경말씀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고후11:3) 전에 뱀이 간교하게 하와를 속였던 것처럼, 나는 다만 여러분의 생각이 부패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오늘의 만나

 
 사탄이 유혹하는 방법은 첫 번째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제안을 함으로써 당신을 유혹하고 설득하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때마다 당신은 그 의심이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뱀에게서 나온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년 전 나는 미국에 있는 어느 침례교 사역자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의문부호는 마치 뱀이 일어서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라고 묻는 모양처럼 생겼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어떤 말씀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모든 말씀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탄의 제안은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간교한 자는 전갈과 같고 그의 질문은 전갈의 독침 안에 있는 독과 같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지식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금했지? 그건 네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이다.” 이 말들은 전갈의 독침에서 나온 독이었습니다. 하와는 독침에 쏘였으며 독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와가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와를 유혹한 사탄의 방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