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신앙과 생활>이라는 신앙고백서에서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태도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들이 지방교회에 대하여 생소하게 느끼고 심지어 어느 정도 교제의 벽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문제가 있는가? 우선 외부적 요인으로는 ‘자기네만 교회라고 한다’ ‘지방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라고 한다는 식의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유포시킨, 사실과 다른 말들이 걸림돌이 되었을 수 있다. 이 점은 기성교회들이 사실에 근거한 바른 인식을 가짐으로 풀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지방교회 내부적인 요인들도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익숙지 않은 진리항목과 실행들 그리고 그들의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교회측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 진리와 실행상의 차이점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 노선, 즉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소위 형제회’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특징들 중 일부를 공유한 것이 있다. 그 외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했던 진리항목들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것들은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계 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강조이다.
워치만 니는 자신의 영적 유모와도 같은 마가렛 바버 선교사를 통해 앤드류 머레이, 제시펜 루이스, 이반 로버츠, 오스틴 스팍스 등을 통해 이어져 온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에 대한 진리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위트니스 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노선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위 신비주의로 분류되는 마담 기용, 페네롱 신부, 윌리암 로우 등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한국교계는 이런 방면 전체를 ‘신비주의’로 보고 이것을 경계하는 시각이 강하다. 따라서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이 방면의 서적을 읽거나 공개적으로 동조하기에는 주저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성경을 벗어난 그릇된 영성이나 잘못된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 하늘 보좌와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골 1:27),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은 사실’(롬 6:6),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갈 2:20),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마 16:24) 등의 말씀을 어떻게 삶 속에서 체험하고 실제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과제이다.
둘째, 교회생활 관련 진리와 실행이다.
교회 역사를 볼 때,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형제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이러한 형제회의 유산이 지방교회를 대표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교계에서는 다아비의 신학이 세대주의를 기초로 하고 평신도-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엡 4:12)는 주님의 위임과 루터가 주장했던 ‘만인 제사장 제도’를 어떻게 실행하고 또 완성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더 깊은 관심과 추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셋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한 진리 항목들이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의 몸’ ‘새 예루살렘’ ‘신화’(神化, deification)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진리 항목들은 하나님의 주권, 선택, 예정 등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딤전1:4, 엡 1:9, 3:2)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거듭 강조되었고 ‘그리스도의 몸’ 역시 그러하다(마 16:18, 엡 1:23). ‘새 예루살렘’(계 3:12)은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을 가리키며 요한계시록의 결론이자 핵심주제이다. 신화 진리 또한 정통 초대 교부인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에서 강조한 진리로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러한 사상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로 현재도 가르쳐지고 있다.
따라서 지방교회와 기성교회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서로 배우는 자세로 교제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2. 지방교회 성도들의 기성교회를 향한 태도
지방교회는 본의야 어떻든 기성교회를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그것이 상호 교류에 장애가 된 면이 없지 않다. 어찌되었건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할 대목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벧전 5:5). 사실 워치만 니도 다음과 같이 신앙적 교만을 경고하고 있다.
“주님께서 정하신 교회의 노정은 빌라델피아이다. 빌라델피아의 노정을 가는 사람의 가장 큰 시험은 바로 교만이다. 즉 “우리가 당신들보다 낫다! 우리의 진리가 당신들의 진리보다 분명하고,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교만이 없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토해내신다. 우리는 결코 교만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워치만 니, 50 필수과정(V), 한
국복음서원, 2002년, 135쪽).
미국 교계는 지방교회를 일체 이단시하지 않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만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가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의회’(ECPA) 의 투표권 있는 정회원 중 하나로서 교계 지도자들과 이미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고,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을 수년 째 발간해 옴으로 교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지방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 풀러신학교측은 지방교회측이 성경적인 정통 그리스도인들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미국교회의 선례는 한국교회에서도 참고가 될 만하다. 따라서 지방교회측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성교회측에 다가감으로 교제의 폭을 넓히고, 기성교회측은 대국적 관점에서 “나와 다소 다르나 주 안에 참된 형제들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롬 15:7).
(창49:8~9)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계5:5上) 그러자 장로들 중에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오늘의 만나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자는 산에 거합니다. 먹이를 구할 때, 사자는 산에서 내려옵니다.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붙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는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취한 후에, 사자는 먹이를 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라는 말씀은 사자가 그 먹이를 삼키려고 산 위로 올라갔음을 뜻합니다. 먹이를 먹은 후 사자는 더 이상 웅크리지 않습니다. 대신 사자는 드러누워 휴식합니다. 여러분의 체험 가운데 사자 새끼이신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또한 누워 휴식하고 있는 만족하는 사자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십니까? 수년 전 내가 젊었을 때 여러 무리의 반대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원수들이 벌써 나의 그리스도에게 먹이가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나의 성질과 문제들과 약함들 그리고 나의 모든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먹이였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그분은 더이상 싸우지 않으시고 휴식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누워서 안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도 또한 그분을 안식하는 사자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휴식하시고 나 또한 안식합니다.
한국교회에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대부분은 이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커녕 지방교회란 말조차 생소할 것이다. 인터넷상의 부정적인 자료에 의해 그려진 지방교회 사람들은 자신들만 잘 믿는다며 다른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고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다. 혹자는 지방교회 사람들은 이상은 높은데 실제 생활은 그에 못 미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방교회 성도들에 대한 외부인들의 이러한 평가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되짚어 본다면 현실 교회에서 어떤 비판의 여지도 없이 완벽한 교단이나 단체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 약함이 있다. 그런 점에서 특정 단체가 지향하는 핵심신앙이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3절)에 부합한지는 냉철히 따지되, 성경해석상의 소소한 차이나 약함과 허물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는 아량이 필요하다.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길이다(엡4:3).
이런 차원에서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교회가 과연 무엇에 신앙의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본인들에게 직접 들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복음서원에서 출판된 각종 도서나 현 지방교회 인도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 ‘생명’ ‘그리스도의 몸’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의 주제다.
1. 하나님의 경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책자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워치만 니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표현함). 지방교회측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인, ‘내가 마케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다’(딤전1:3-4)라는 말씀을 자신들에게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창세전에 선택되고 예정된 우리가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엡1:4-5). 성경 말씀 그대로이니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긴 어려울 것 같다.
2. 생명
‘생명의 인식’ ‘생명의 체험’ ‘생명의 성장’ ‘이기는 생명’ ‘생명주는 영’ 등 지방교회 사람들은 생명이란 단어를 유달리 많이 사용한다. 이들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는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이 오신 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물론 그분은 우리 죄사함을 위해 죽으셨지만 그 죄 사함조차도 결국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절차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 25),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 등에 근거하여 <주님 자신이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몸
지방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지체들 간의 조화와 기능발휘가 현재의 교회생활 중에 실현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고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각양 봉사는 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적인 출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엡4:12,16). 실천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4. 이기는 자가 됨
성도는 누구나 ‘이기는 자’여야 한다. ‘이기는 자’라는 말은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 각각의 말미에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모두가 비중있게 다루었던 주제이다. 이들이 말하는 이기는 자란 쉽게 말해 거듭난 후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영적생명이 성숙한 자를 말한다. 계시록 3장 12절의 필라델피아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이기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와 달리 특별한 상급이 주어진다. 따라서 모두가 이기는 자일 수 없고 추구하여 그 표준에 이른 자만이 이기는 자라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되려면 일상생활에서 자기 유익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하고 매사에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빌 1:21).
소위 ‘지방교회 교인이 되어야만 이기는 자가 된다’고 가르친다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지방교회 교인이 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다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소위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생명과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하고, 이기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행상으로는 만인 제사장 제도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런 사람들을 성경의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성경의 중점을 붙잡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것일 수 있다.
혹자는 위와 같은 진리와 실행은 다 좋은데 이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지나치게 따르는게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다. 즉 뛰어난 두 성경교사를 존경해서 그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와 계시를 따르는 것이지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당신은 모든 것들에서 얼굴을 돌려야 한다. 여러분의 방 친구를 보지 말라. 장로들을 보지 말라. 나이든 자매들을 보지 말라. 나를 보지 말라. 예수를 바라보라...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말라. 우리는 주님을 신뢰한다. 우리는 그밖에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온전케 하는 이시므로, 우리의 믿음은 바로 예수시다.”(위트니스 리, 고봉메시지 제11권 - 로마서 결정연구).
그동안 한국 교계는 지방교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거나 일부 이단 감별사들이 특별한 의도를 전제로 연구한 자료에 의존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풀러신학교측에서 지난 2년여 동안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신앙고백이 주요 신조와 일치하는 정통이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제가 가능한 주 안의 형제들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방교회를 이단시하고 형제로 여기려 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 교계 내에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특정 교단 교리가 아닌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특정교회가 믿는 진리와 실행에 관해 재평가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한국의 지방교회 인도자들이 전과 달리 다른 단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수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오늘의 만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7:11).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그분의 임재를 거두시고 그들에게서 떠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아이성을 치기 위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여쭈어 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에서 패배한 비밀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다는 것과 더 이상 그들이 그분과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패배 후에, 여호수아는 법궤 앞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는 공과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고,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을 말씀하기 시작하셨고,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지혜와 통찰력과 안목과 사물에 관한 내적 지식이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바벨론 사람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제멋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능하고 모세의 율법에 능한 서기관이며 학자인 에스라가 필요했습니다(스7:6,11). 그는 하늘에 속한 신성한 조성과 문화의 총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을 소집하여 그 자신의 죄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렸습니다. 더 많은 에스라들이 필요합니다. 장로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고서 성도들이 그것을 따르기는 기대하지만, 정작 장로들이 진리를 가지고 성도를 심방하지 않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참된 장로 직분은 성도들을 심방하여 그들을 목양하고 먹이며, 진리에 관하여 말함으로 그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에스라처럼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며, 하늘에 속한 진리들로 그들을 조성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장로든 사역자든 기독교의 풍조를 깨끗이 벗어나기 바란다. 기독교의 풍조는 바로 설교하는 사람을 대단히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은 장박사를 청해서 말하게 하고, 내일은 왕 목사를 청해서 말하게 하고 또 며칠 지나서는 무슨무슨 전도자를 청해서 말하게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도데체 무슨 효과가 있는지 묻겠다.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한 지역 집회 혹은 한 지방교회가 오늘은 이 동역자를 청해 설교하게 하고, 내일은 저 동역자를 청해 설교하게 하는 것을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당신은 모든 동역자를 초청해서 그곳에서 말하게 했겠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이고 이전의 자신 그대로이다. 몇 명의 구원받은 사람이 더해진 데 불과하고, 몇 명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당신은 영원히 교회의 건축과 교회의 동역을 보지 못할 것이다. 건축과 동역을 갖기 위해서는 책임형제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교회를 치리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결코 설교자를 초청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 기운데서 사역하는 방법이 아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반드시 교회 가운데 두고 일에 몰두하며 수고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당신이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볼로 등 이러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유용한 한 가지는 여러분 자신이 엎드려져서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고, 사람은 거기서 농부가 되어 온통 얼굴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밭을 경작할 필요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이 돌보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집임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주부와 같이유리창을 닦고 바닥을 청소하고, 옷을 궤매고 의복을 손질하며, 뜨거운 밥을 하고 찬 밥을 먹으면서 그곳에서 수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천 번, 만 번 설교를 들어도 소용없다.
형제들이여, 한 천사가 여러분의 장소에 와서 한 주 동안 특별집회를 열면 여러분이 있는 곳의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이런 소망을 품지말라. 빨리 굴복하고 차분히 일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접촉하여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그들을 도우라. 만일 그들에게 물질적인 필요가 있고 당신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헌신이라거나 공급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한 형제가 밥을 먹지 않았는데 당신에게 밥 한 그릇이 있으면, 당신이 반 그릇을 먹고 그에게 만 그릇을 주면 된다. 이는 헌신이라기 보다 당신과 그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생명 안에서 서로 나누는 것이다.
버울은 그가 자신과 동행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두 손으로 일했다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지체된 형제자매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 당신이 이런 정도까지 짊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축복하시는지 축복하지 않으시는지 시험해 보라! 교회의 건축은 서서히 되어지는 것이며 힘을 들일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요행을 바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기대할 수도 없다. 오직 당신이 손수 집 안에서 수고하고 힘들여 일해야만 당신의 집은 모양을 갖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는 장로들의 돌봄에 맡겨졌다. 장로들은 주부로서 다만 수고하고 힘들여 일해야 한다. 교회의 건축은 장로들의 수고에 달려 있다. 단지 부흥회를 여는 것은 역사하지 않는다. 당신은 반드시 여기에서 심혈을 기울여 일해야 한다.
나는 각지 교회의 장로들이 이 원칙을 붙잡고 각지에서 힘을 다 쏟기 원한다. 설교를 잘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지방은 갈수록 엉망이 된다. 특별집회는 적게 열수록 좋다. 시간을 아껴서 한 명 한 명 접촉하고, 한 명 한 명에게 시간을 들여 그들이 배우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