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25

변형된 삼신론

먼저 이러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귀한 공간을 마련해 주신 월간 교회와 신앙 측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방교회 측의 진리-신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며 공개토론에 강한 의욕을 보이신 이인규님에게 좋은 토론의 본을 세울 것을 제안 드립니다. 한 가지 미리 양해를 구할 것은 제가 토론 전개과정에서 진리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이인규님 개인의 인격을 손상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둘은 다른 것이며, 우리가 서로 대립되는 위치에서 토론을 한다고 해서 주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토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이인규님이 주장하거나 질문하신 내용들을 큰 항목들로 묶어서 답변, 반론 그리고 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Ⅰ. 님의 소위 『정통교회 삼위일체론 개념은 너무 모호』합니다.  

님은 첫째로 「지방교회 삼위일체는 정통교회 삼위일체와 다르다」는 점을 토론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초두부터 『이인규님은 무엇을 정통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인가』그리고 『정통 삼위일체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더 전진하기 전에 다음 글에서 보다 명확하게 정의해 주실 것을 우선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님이 글에서 서술하신 것에 따르면 이인규님의 관점에서 본 정통교회 삼위일체란 삼위를 독립된 세 인격으로 믿는 것이고, 1) 하나님은 삼위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믿는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물론 님이 제시하신 세가지 요점은 정확하게 맞습니다. 저 역시 정확하게 그 사실에 동의합니다. 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분명히 삼위의 독립된 위격을 믿습니다. 이것은 후반부에 설명할 것입니다. 아마도 진짜 이단이 아닌 바에야 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쟁점이 내포된, 많은 설명이 필요한 판단기준으로 너무 모호합니다. 이인규님.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 토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그렇게 간단한 몇 마디의 말로 정의나 내리는 수준이 아님을 아십시오. 매우 깊이있는 부분까지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A. 우선은 위의 기준으로 볼 때 이전의 글에서 님이 옹호하셨던 예장 통합측 장신대학 김명용 교수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이단이 됩니다.  

김명용 교수는 월간 목회와 신학에 발표한 그분의 논문에서 세 번째 기준에 어긋나는『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은 세분이시다』라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님의 정통교회 삼위일체론 기준에 의거해 제가 김명용 교수와 그가 가르치는 장로회 신학교, 그리고 그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소속된 예장 통합 측을 이단 또는 정통교회가 아닌 사람들이라고 단정해도 되겠습니까? 님은 이에 대해 다른 게시판 글에서 (지방)교회측이 『세분 하나님을 부정하면 틀린다』는 김명용 교수의 말을 이상하게 곡해하여 모함한다며 저희들을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여기 본문 중 일부를 옮겨오겠습니다. 직접 확인하고 다음 글에서 님의 입장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이해할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삼위라는 말의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 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성경은 세 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출처: 월간 목회와 신학, 장신대토론게시판 게시물 번호: 206 (2001/02/10,17:11:25))
 김명용 교수는 성경이 세분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인규님도 김명용 교수의 글과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표현이 단지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 또한 위 네 가지 명제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 빠졌습니다. 이 점이 삼신론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것은 『1) 하나님은 삼위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이신 하나님이 어떤 안전장치로 인해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이 부분을 성경적으로 믿으며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채 님처럼 오히려 삼위를 분리시키는 쪽으로 착각을 하면 삼신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님은 지방교회 측이 최 삼경 목사가 『삼위의 독립된 인격』을 주장한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해하시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심(요14:10-11, 20)으로 삼위가 한 분이심을 표현하는 길인 『세 위격 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삼신론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님이 인용하신 신학자들은 균형잡힌 관점에서 썼을지 모르나, 님의 여러 글들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의 글을 받아들인 님은 잘못이해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인규님은 말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상호내재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면에 삼신론 사상을, 그것도 자신의 말이 이단사상인지도 모르면서 반복해서 주장하고 계십니다. 다음이 그 증거입니다. 다음 글들은 지금은 링크가 되어있지 않지만 지난 게시판에서 님이 다른 분들과 토론시 하신 주장들입니다. 

  -이인규님의 주장-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입니다....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 

사도, 교부시대 때부터 이어온 정통신학은 님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님의 주장은 세 인격의 독립성의 정체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고... 같은 반 아이들 10명이 다른 반으로 분리되지 않은 채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로 서로 교통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님은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하셨지만 이것이 님이 말하는 『세 인격의 독립성이고 상호내재의 의미』라면 저는 위 내용만으로 이인규님을 최삼경 목사와 똑같은 삼신론이단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계시니 (지방)교회의 삼위일체가 님의 삼위일체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님의 글 2) 지방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와 3)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관해 엉뚱하게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며 4) 지방교회에 드리는 네 가지 질문도 역시 이런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발생되는 의문에 불과 합니다. 님의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의 삼위 인격체의 독립 사상』이 왜 성경과 다른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삼신론 사상인지 간략하게 증명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요한복음 14장 11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님의 주장에 따르면 아들이 성육신 이후엔 아버지와 분리되어 하늘에는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셔야 할 것 같지만, 성경은 성육신 이후에도 여전히 아들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요1:18). 

  둘째로 신학자들의 주장과 다릅니다.  

  1) 상호내재(coinherence)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So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The Works of St. Augustine “On the Trinity”, Book VI, p.103). 

  2) 아우그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적 관계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 위격(페르소나)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2) 세 위격이 각기 완전할 뿐 아니라,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3) 신성 안에는 일체의 분리가 없다. (4)그 셋은 함께 서로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258-260쪽, Augustinus, De Trin.,VII.1, 2)』

  3) 심지어 노골적으로 세분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는 김명용 교수도 같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마스케누스(Damascen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4) George Bull 주교도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이라고 했습니다.

  5) 아우구스트스 스트롱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Systematic Theology(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6) 저희들 역시 동일한 입장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따라서 성경말씀으로 보나 정통신학자들의 관점으로 보나 님의 「1-1반 아이들식」의 삼위 인격체들의 독립사상은 「한 부부」 또는 「한 가족」사상과 함께 무서운 삼신론 사상입니다. 이것은 정통교회 삼위일체론도 아니고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님의 신론에 대한 사상을 반드시 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Ⅱ. (지방)교회측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님은 님의 글에서 웨인그루뎀의 주장을 인용하여 아래 항목들이 해당되어야 양태론이라고 정의하셨는데 이것들이 (지방)교회에 해당된다는 증거를 제시해 보십시오. 

1) 어디에서 우리가 삼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하며 단지 그것들을 환상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했나요?
2) 어디에서 우리가 아들의 침례시 성부가 말씀하고 성령이 강림한 것을 부인했습니까?
3) 어디에서 우리가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한 것을 환상, 제스추어라고 했나요?
4) 어디에서 우리가 속죄의 핵심을 잃는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까?
5) 어디서 우리가 구별된 세 인격을 부인했나요? 
 

또한 님은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마치 우리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있다라고 은연중에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뿐더러 성경말씀 그대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믿고 있습니다. 님이 한 번이라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래 내용은 교회와 신앙에서 있었던 내용입니다.

 『(지방)교회측은 세 위격의 영원성과 동시 존재하심을 믿는다고 성경과 위트니스 리의 저서를 근거로 여러 번 변증했었다(96년 10월호 p.164, 97년 7월호 p.160). 세 위격 모두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양태론자가 될 수 있는가!  

 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세 위격 간의 '구별된 고유성'을 믿는다. 

만일 위트니스 리가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고 선택하셨다거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등 세 위격의 고유성을 혼돈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최 목사는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그렇게 못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가장 성경적인 말을 하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위하여 아버지는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 뿐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엡 1:4)...그 다음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셨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정하셨다(5절)"(신약의 결론-하나님, 352쪽).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아들은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을 성취하셨다(엡 1:7-9)"(같은 책 354-355쪽). "그 영의 분배하심은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여 그분의 영광의 찬미에 이르도록 하시는 그분의 인치심이다(엡1 :13-14). 성령의 인치심은 살아있는 것이며..."(같은 책, 357쪽). 

위 인용들을 통해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결코 혼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참된 믿는 이들에겐 상식에 속한 진리가 아닌가! 최 목사가 비판하기 전에 우리측이 변증의 근거로 삼는 위트니스 리의 책, '하나님'(한국복음서원, 1991년)을 한 번만 차분히 읽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최 목사는 97년 11월호 글에서 마치 위트니스 리가 세 위격의 구별을 무시하기나 한 것처럼 장황한 말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가 부실했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킬 뿐이다. 

따라서 위트니스 리가 '한 인격의 하나님'을 주장함으로 양태론자라는 최 목사의 말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거짓임이 폭로되었다. 오히려 위트니스 리의 정통적인 삼위일체관을 억지로 비판하다가 최 목사는 '한 인격'에 대한 자신의 이단적인 관점만을 드러냈다. 이 점은 다시 언급하겠다 -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이인규님의 글에서 3.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해서라는 제목아래「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 사람의 합당한 삶」이란 책 내용을 인용하셨는데 무엇이 어떻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말씀인지 님의 주장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님이 문제점을 선명히 제시하시면 저도 다음 글에서 상세하게 해명 또는 반박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참고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란 말은 요 7장 39절(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고린도 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의 본문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도 부족하고 이미 최삼경목사님과 토론시 다뤄진 부분이니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지방)교회측 반박 내용을 잘 읽어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익명의 지체가 선물로 보내드린 것 같은데 신약의 결론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Ⅲ. 님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그러한 질문들은 (지방)교회측이 지상사역시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만 인정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인할 경우인 즉 진짜 양태론이라고 볼때에나 나올 수 질문들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다시 짚어두지만 우리는 성경 그대로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심(마 6:9)과 동시에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심(요14:10-11, 20, 17:21)을 믿습니다.  

그 중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은 두 번째 질문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나요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네 번째 질문인 다윗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인격적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을까요라는 질문 역시 동일하게 님께서는 우리가 삼위의 인격적인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시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몇 가지 질의하겠습니다. 위에 있었던 질문들과 더불어 답변하여 주십시오.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이인규님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이인규님에게 거는 한 가닥 희망은 그래도 님이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하셨습니다. 님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어떠한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님이 보유하고 계신 저희의 책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님의 질문의 뒤에는 예수 안에는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님의 삼신론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재차 말씀드리건대, 님의 삼신론 사상과는 달리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버지는 보내신 자로서 하늘 보좌에 계심과 동시에 보내심 받은 예수그리스도 안에도 구별된 채 상호내재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6:9, 요 14:10-11, 20, 8:16). 이 두 방면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이인규님처럼 신론 이해에 있어서 심각한 혼동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9절의 본문의 의미를 잘 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토론의 서막에 불과하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점점 걷혀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과 위엄이 가득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있도록 그분의 진리를 위해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추신. 독자들을 위한 변 .  

어쩌면 그분의 구원을 누리고 있는 지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어렵기 때문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대부분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물론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우리의 한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계를 말한 것이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이해로 그 안의 감추어진 보화를 캐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넘어서는 것은 도를 지나친 것이나, 연구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토론등을 통해 더 드러나겠지만 하나님이 왜 삼일이셔야 했는가를 이해한다면 다만 머리 아픈 지식에서 떠나 주님께 경배와 찬송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으로 우리 안에 분배하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어떠한 영광이며 축복인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누림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토론이 진행될수록 어려운 신학적 용어와 정의가 대두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사변적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고 많은 기도가운데 그분의 계획안에서 어떻게 삼일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되어지는지를 조금씩 알게되어진다면 더 큰 유익이 되리라 믿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15

지방교회 탐구 - 4

예장통합 교단 신앙고백 적극 동의 

폐쇄적인 과거벗고 연합운동 지향 

미국 CRI "삼위일체 문제없어" 


*지방교회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역원 전경

1. 삼분설과 신비주의
일각에서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인간 삼분설'을 주장하고 가르침에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으며, 성경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이분설을 지지하는 쪽에서 본다면 삼분설(살전 5:23, 히 4:12)에 다소 이질감이 느껴질 수 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이단성을 가릴 만한 핵심 진리는 아니다. 칼빈 신학교에서 오래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안토니 후크마의 경우 장로교인이지만 '삼분설 뿐 아니라 이분설도 거절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개혁주의 인간론, 347쪽). 따라서 이 문제는 좀 더 깊은 포용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해당 진리 자체가 다소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짊(마16:24), 그리스도를 삶(갈 2:20), 그리스도의 몸(엡 4:12) 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형제회 배경을 가졌고 성경본문 주석서를 펴내기도 했는바 신비적인 체험만을 추구하는 소위 신비주의자들은 아니다. 또한 "성경을 영해한다"라고 보일만 한 곳이 혹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터무니없고 부적절 할 때만 그것들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위트니스 리,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60-61쪽)라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성경 해석에 임함으로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2. 양태론 시비
최근 10 여 년 동안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믿으니 이단이다"라는 말이 있어 왔다. 그러나 과거에 (지방)교회 측과 통합교단 토론자가 가졌던 토론 과정 등을 진지하게 지켜 본 이들은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판단에 신중을 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믿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일까? 우선 통합교단 헌법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신 6:4, 고전 8:4,6)" 라고 고백하나 통합측 토론자는 "세 영들" 또는 "세 사람들"식의 "세 분 하나님"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세 인격, 한분'으로 믿는 (지방)교회 측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트니스 리가 이사야 9장 6절,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고린도 후서3장 17절을 본문 그대로 가르침으로 인해 오해가 생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구원의 경륜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두 위격 사이의 '기능적인 동일시' 일뿐 결코 '본체론적 위격의 혼동'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R. B. 개핀 교수와 합동신학대학원 박형용 박사도 장로교인이지만 이점을 잘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차영배, 성령론(구원론부교재), 59-60쪽, 신학지남, 1978년 봄호, 28-39쪽). 수년 동안 (지방)교회를 양태론 자로 오해했던 미국의 저명한 이단변증단체인 CRI 대표 행크해나그라프와 Answers In Action 대표 그레첸 패산티노가 이들과 진지한 대화 후 최근에 태도를 바꾸었다. 즉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삼위일체가 진리상 아무 문제없다." 라고 미국교계 앞에 공개선언을 한 바 있다. 

3. 교회론 관련 논란
지방교회는 "교회가 시대와 지역과 종족과 인간의 계급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명시한 통합교단 헌법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교회론 핵심 내용에 대해서는 쌍방 간에 전혀 이견이 없다. 소위 "지방 입장을 말함으로 다른 단체들은 교회도 아니고 그 안에는 구원도 없다. 라고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든 교회의 일원이며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목사 제도를 부인한다는 소문이 기성 교회 목회자들을 언짢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 내에도 전국에 200여명의 인도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신학을 한 경우와 세속 직업 없이 전 시간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 지방의 모든 성도는 다 한 장소에 모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말도 오해인 것으로 강조한다. '서울 교회'만 해도 현재 23 개 장소에서 모이고 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까지의 바울의 권면에 따라 '성도들 온전케 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대해 많은 영적 자료들을 남겼다. 그들이 주께 받은 이러한 빛과 체험들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는 개혁신학과 상호 보완 된다면 한국 교계에 큰 유익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교회 측은 그동안 교단과의 관계에서 다소 폐쇄적이었던 과거의 자세를 반성하고 건강한 복음안에서 에큐메니칼 정신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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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_12_02_519_edit.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4:35
* [지방 교회](local Church) 이스라엘 탐방팀(한국35명, 미국9명)은 일반적인 성지순례자나 관광객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오는 60여 군데의 지명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자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하였다. 탐방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들은 출국하기 전에 2박 3일동안 방문지에 대하여 미리 철저하게 스타디하였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더 많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15박 16일동안(2012/10/13-28) 이스라엘을 탐방하기 위하여 10월 13일(토) 대한항공 KE957 편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출국하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서 아무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방교회] 이스라엘 성지순례 (3) 에발산과 그리심산 
2012년 10월 15일 

(신 11:29-3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신 27:12-13)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수 8: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삿 9:6-7)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신명기 L/S 메시지 9> 
신명기 11장 8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충고와 경고의 말을 기꺼이 지키면, 축복을 받을 것임을 본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킨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말을 기꺼이 지킨다면, 그들은 약속된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돌보시며 세초부터 세말까지 하나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에게 축복이 있느냐 저주가 있느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하느냐 취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한다면 우리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29절에서 모세는 계속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한다. 우리가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는 우리가 주님께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축복을 받고 그리심 산 위에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고 에발 산 위에 있을 것이다.  
29절에서 모세는 계속하여,『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여섯 지파 -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는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그리심 산에 설 것을 명했다(11-12절). 모세는 또한 다른 여섯 지파-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도록 명했다(13절). 그들이 어느 무리에 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지파들은 선택 없이 하나님의 정하심을 받아들여야 했다.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말함으로 응답했고, 15절부터 26절에 기록된 저주들을 발했다. 저주받은 자들로는 다음 사람들이 포함된다. 우상을 만드는 자(15절),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16절),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17절),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18절),……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26절) 등이다. 
 
Ⅰ. 에발산과 그리심산

에발산과 그리심산

A.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가나안 땅 중심부에 위치한 산이다. 에브라임 지역에 속한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은 세겜(수가, 나블루스)을 가운데 두고 에발산(해발 920m)은 북쪽에 위치해 있고, 그리심산(해발 854m)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B. 세겜에서 바라본 그리심 산은 햇빛이 잘 비치는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밝고 물이 풍성하고 숲이 울창하고 풍성한 산으로 축복의 상징이 되었지만, 북쪽에 위치한 에발산은 민둥산이면서 그늘진 산이기에 저주의 상징이 되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축복의 상징이었던 그리심은 그 의미대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C.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세겜을 감시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에발산과 인접해 있는 그리심 산과의 사이에 있는 공간은 음향의 반향 작용이 매우 뛰어난 천연 계단식 극장이 있다. 


 Ⅱ. 에발산 

사마리아 박물관 랍비

A. 에발산의 에발은 ‘민둥 산’을 의미한다. 
B. 에발산의 낮은 경사지에서는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같은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능하나, 더 높은 곳은 바위투성이의 불모지라서 경작이 불가능하다. 사마리아의 다른 산들처럼, 에발산 역시 표면은 백악질(석회질) 토양으로 덮여 있고, 그 아래는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C. 에발산은 현재 에벨 에슬라미예(Jebel Eslamiyeh)로 불린다. 

 Ⅲ. 그리심산 
A. 그리심산의 그리심은‘제거하다'‘자르다’‘베어버리다’라는 의미를 담은 ‘가라즈’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그리심산은 해발 919m의 석회암으로 구성된 무미건조한 산이다. 그리심산이 위치한 세겜 지역은 고대부터 남북과 동서를 잇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리시심산 위의 성전터

B. 예로부터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에 제2성전을 재건할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재건을 도우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들은 그들만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짓는다. 그러나 B.C. 107년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세겜 지역이 파괴당할 때 성전 역시 허물어졌다. C. 그리심산은 현재 에벨 엣투르(Jebel et-Tor)라고 불린다. 가나안 땅 중심부에 위취한 산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남북과 동서를 잇는주요 도로가 교차하고 있으며 교통의 중심지였다 세겜(수가, 나블루스)을 가운데 두고 에발산(해발920m)은 북쪽에 그리심산(해발854)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에발은 민둥산을 의미하고 그리심은 제거하다를 의미한다. 모세는 신명기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섯 지파로 나누어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회당

예로부터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 제 2성전을 재건할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재건에 동참하려 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지었다 그러나 BC 107년 요한 히루카누스에 의해 세겜지역이 파괴당할 때 성전 역시 허물어졌다 그리심산은 현재 에벪엣투르라고 불린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45

재평가 된 지방교회 (전도 출판사 답신)


전도출판사의 답신 

전도출판사 측은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 지방 교회 측에 해명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첫째는 미국에서 출판 금지된 “The God-Men(SCP)”을 번역하여 “神.人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책을 출판한 것에 대해서 미국에서의 사건 배경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출판했었다는 답신이고, 

  둘째는 위의 번역한 책이 월간 ‘교회와 이단’(96년 4월, 발행인:이대복)에, 상당부분이 재인용된 것을 발견하고 항의한 것에 대한 답신이다. 전도출판사 측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와 이단’과 자기들은 무관하며 내용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증거로 아래 두 차례의 답신을 소개한다. 



전도출판사

<첫 번째 답신>
발신인 : 전도출판사 이치일 서울 성동 우체국 사서함 80호 전화 : 02-295-2737, 팩스 : 02-298-4520 수신 : 풀러턴 교회(The Church in Fullerton), 1330 N. Placentia Avenue, Fullerton, CA 92631 전화 : 1-714-996-8190, 팩스 : 1-714-996-8195 ‘신.인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 책자 출판에 관한 여러분들의 항의 서한을 받고 저희들의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그 책자를 출판하게 된 경위는 한국 성도들이 여러분들에 대한 의문이 있던 차에 그 책자를 입수하게 되었고, 여러분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분들의 믿음과 주장을 알고자 하여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그 책자라 생각되었기에 출판하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의 믿음이나 주장과는 차이가 있어서 여러분들의 명예를 훼손한 책자라면,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 책자를 출판한 저희로서는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출판 허락에 관해서는 1977년도 판이었기 때문에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허락없이 출판했습니다. 현재 초판 후 재판은 하지 않았으며, 여러분들의 요구대로 이 책자는 재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대로 얻은 구원과 동일한 믿음 안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5년 12월 7일 전도출판사 대표 이치일 드림(싸인) 

 <두 번 째 답신>
 발신 : 이치일(전도출판사 발행인), 장세학(번역자) 경기도 고양시 일산 4동 1233-4 호 전화 : 0344-914-2732, 팩스 : 0344-917-4520 수신 : 풀러턴 교회 사역자 조동욱 외 형제님들 1330 North Placentia Avenue, Fullerton, CA 92631 전화 : 714-996-8190, 팩스 : 714-996-8195 여러분의 서신에 대한 저희들의 입장을 말씀드립니다. 저희들은 여러분들과의 서신을 통해 약속했던 대로 그 책(신인 위트니스리와 지방 교회)에 대해서는 출판 및 판매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이단’이란 잡지사가 그 책을 인용했다는 사실은 저희들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바이며, 그 책의 인용 및 출판을 허락해 달라는 부탁이나, 또 저희 쪽에서 그 어떠한 허락도 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과 약속한 대로 이제 더 이상 그 책은 저희들로부터 출판이나 판매 및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의 사용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1996.5.21 전도출판사 발행인 이 치일 (인장) 

 - 재평가 된 지방교회 -

[재평가 된 지방교회] (책 12쪽~14쪽)


재평가 된 지방 교회
국내도서
저자 : DCP Korea 편집부
출판 : DCPKorea(디씨피코리아) 201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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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40

재평가 된 지방 교회 소개(머리말)

머리말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분이심 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반대하고 거절했다.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특히 이단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성경 말씀과 건전한 신학이 기 준이 되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방면에 전문가로 자처하는 이단 감별 사들이 임의대로 이단을 결정하는 일들이 자행되어왔다. 예를 들어 예장 통합 측 총회에 제출한 C 목사의“ 지방 교회 연구보고서”(1991년)는 그 내용이 네 쪽에 불과하다. 이 짧은 보고서를 근거로 이단을 결정지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이와는 달리 미국의 저명한 이단 변증 기관인 CRI는 지방 교회에 대해 6년 간 연구하여 100쪽 분량의 보고서를 CRI 저널 잡지에 발표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면을 다 조사했으며, 각 나라에 있는 지방 교회들을 직접 방문하 여 사람들을 만났다.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했다. 그들은 자신 들의 이익이나 기존의 전통이나 사적인 판단에 따라 평가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건전한 신학에 기초하여 조사했다. 그 결과 CRI는 과거의 평 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얼마나 신 뢰할만하고 수준 높은 연구기관인가? 한국에서는“ 한 번 이단으로 정죄되면, 영원한 이단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번 이단의 누명을 쓰게 되면 벗 기가 아주 어렵다는 뜻이다. 일단 이단감별사들의 표적이 되어 교계 신문에 오르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변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인격적 인 살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이런 식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에“ 재평가 된 지방 교회”를 출 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서두에서 지방 교회(local Church)가 어떻게 해서 억울하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는지 원인과 과정을 설명했고, 이어서 C 목사와의 진리토론, 그리고 미국에서 지방 교회들을 재평가한 책들(우리가 틀렸었다, 복음의 확증, 지방 교회들)을 소개했다. 또한 관련 참고자료들을 부록으로 첨부했다. 우리는 지방 교회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목회자, 신학자, 교수, 신학생들, 성도들)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안에 서 공정하게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2011년 7월 15일 DCP Korea 편집부

- 재평가 된 지방 교회 머리말 -


재평가 된 지방 교회
국내도서
저자 : DCP Korea 편집부
출판 : DCPKorea(디씨피코리아) 2011.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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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35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 6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저기요. 제 친구 한명이 지방교회를 다닙니다. 한번은 그 친구와 함께 지방교회 나가는 분들과 식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한 사람만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하더라구요. 좀 생소했지만, 그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안 붙이는 것은 왜 그래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안 한다니요? 성경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나요? 
아 예, 기계적으로 하지 않고 융통성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안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만 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영의 인도를 따라서 융통성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 성경구절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전후문맥을 잘 보면 기도할 때 항상 그런 말을 끝에 붙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통교단에 속한 곳은 거의 다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지 않나요? 가능하면 이질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같은데요.
 맞습니다. 저희도 핵심진리에 반하거나 죄 짓는 실행만 아니라면 덕이 되는 쪽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성경 문맥의 의도와 다르게 실행할 경우, 적극 동조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더군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이는 것이 해당 성경 문맥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는 취지의 말씀은 요한복음14:13-14, 15:16, 16:23-24 에 있습니다. 이 본문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요, 우선 기도시 맨 끝에 그런 ‘후렴구’를 꼭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글에 검색을 해 보니 의견이 나뉘더군요. 어떤 분은 그렇게 안하면 기도에 효력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 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꼭 기도할 때마다 그 ‘후렴구’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융통성을 두는 쪽도 있었습니다.

-정통교회 나가는 분들 중에 꼭 안 붙여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예, 두 가지 예를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한 분은 고신대 대학원 교수로 계신 변종길 교수님입니다. 이 분이 <크리스챤 Q&A >라는 곳에서 답변하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칼빈의 기도에 보면 이런 문장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http://www.christianqna.org/bbs/board.php?bo_table=z3_3&wr_id=829
다음은 이광호 목사님 답변 중 일부인용 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그런 후렴구로 마무리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후렴구를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거나 도용하는 것이 되며,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http://www.siloam-church.org/lecture/sesin/sesin195.htm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도 끝에 그런 후렴구를 붙이는 것만 듣고 자라와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줄 알았지 솔직히 이 문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정통 교회 신학자가 심지어 칼빈 기도문에도 그런 후렴구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렇게 안 하면 이단 뭐 이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사실 성경에 쓰여진 기도문들에도 그런 후렴구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주기도문도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마6장). 그리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심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는 심지어 ‘아멘’도 없습니다(24-30절). 또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에베소서에서 두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장의 기도(17-19절)나 3장의 기도(14-21절)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없이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

- 그런데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라고 하는 목사님도 있더라구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라면 위에서 소개드린 성경본문들도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할 때, 누구를 생각하나요? 삼위의 1격만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레인 뵈트너라고요 개혁신학을 공부한 분들은 다 아는 정통 신학자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성부만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성자, 성령이 포함된 <삼일 하나님>(Triune God) 전체를 가리킨다 고 말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니까 이 분이 한 말의 영어원문을 직접 소개해 보겠습니다.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07쪽)
사실은 이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셋으로 구별되시지만 결코 분리된 분이 아니니까요. 한국교계 내에는 무의식중에 세 하나님들을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뭐 삼위일체도 나오고 좀 복잡하게 되돌아가는 것같아 좀 그렇긴한데…좀 정리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를 꼭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이 의미하는 내용이 기도에 담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뭐 이런 것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면 ‘내 이름 안에서’라는 문맥이 뭘 의미하나요?
 우선 요14:13절만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또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내 이름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한데, 이 말은 ‘주님의 인격(이름)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18:20의 ‘두세사람이 네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위 ‘이름 안에(안으로)’에 대한 회복역 성경 각주 취지는 집회에 올 때는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문제들과 일들에서” (나와서) “그분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상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해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생각은 다른 것에 빠져있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모임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위 요14:13만 봐도 나의 필요, 나의 선호와 갈망을 이것 저것 구한 후 끝에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째 “다 이뤄 지지도 않고”, 둘째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지도 않음”으로 위 본문에 따른 기도가 아닙니다. 대신에 주님의 뜻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의 인격과 연합되어 마치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직접 기도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도 되고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기도를 하려면 쉽지는 않겠네요. 예수님과 하나되는 상태라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맞춰 기도하라는 말씀이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저희의 기도생활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늘 배우고 있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네요. 나중에 위에서 소개해 주신 본문들을 좀 차분히 살펴볼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사실 후렴구를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진리 자체는 깊은 연합을 전제한 것이라 신약의 핵심진리에 해당될 수 있지요. 사실 요한복음 14-16장은 그런 연합사상을 담고 있어서 겉보기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도 사실 이런 교제가 쉽지 않은데, 무익한 변론으로 빠지지 않고 좋은 대화로 마무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00

6년여 재연구 끝에 실수 인정… “믿는 이들의 정통단체” 평가

▲지방 교회에 대한 과거 비판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을 담은 CRI의 저널 특집판.

‘지방 교회(local Church)’ 운동에 대해 가장 처음 비판을 제기해 이단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던 미국의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이하 CRI)가, 무려 6년여에 걸친 재연구 끝에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라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권위있는 기독교 연구단체인 CRI가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잘못됐었다고 전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방 교회 운동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역동적인 운동 중 하나이며,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인 워치만 니에 의해 시작되고 위트니스 리에 의해 계승·발전된 것으로, 목사인 복수의 장로들, 성직자와 평신도 구분의 폐지, 주님의 상을 중심으로 한 예배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양태론(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각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이론)을 가르친다는 의혹을 CRI가 1970년대 중반 지적한 이래 미국에서 이단정죄를 받아왔다. 한국에서도 예장 통합측이 제76차 총회(1991)에서 경북노회가 제출한 “지방 교회(회복 교회)의 정체에 대한 질의”에 대하여 동 교회의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하여 연구한 후, “위트니스 리 사상은 워치만 니 사상과 함께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낳게 하는(김기동, 권신찬, 이명범 등) 모태가 되는 명백한 이단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어 제77차 총회에 “추가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어 채택됐다. 그러나 이 모든 논란의 시발점이 됐던 CRI가 자신들의 과거 연구 내용을 뒤집고 반성하면서 미국에서 지방 교회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CRI는 최근 자신들이 발행하는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특집판에서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 전체를 할애해 지방 교회 이단논쟁에 있어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지방 교회들은 신약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이 재연구에는 과거 지방 교회에 대해 “정도를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라고 지적했었던 연구원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했다.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는 2003년 지방 교회측 대표들과 가진 만남에서 자신이 지방 교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재평가를 결심하게 됐다. 그는 “그 만남에서 지방 교회들이 부인하는 것으로 알아왔던 바로 그 교리들을 그들이 인정하는 감동적인 말을 듣게 됐다”고 회고했다. 해네그래프는 “지방 교회 대표들은 영원히 구분되는 세 위격으로 계시되신 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 사람은 본체론적으로 결코 하나님의 신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단지 교회(only the church)’라고 말한 것을 ‘유일한 교회(the only church)’로 오해받아 반대받았던 사실을 하나하나 증언했다”고 했다. 

 이에 CRI는 지방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미국 뿐 아니라 중국, 대만, 한국, 영국에서도 이뤄졌다. 이 연구에는 수백권의 책과 논문과 교회 문서와 음성자료와 영상물에 대한 주의 깊은 평가가 포함됐고, 법정 자료들까지도 참고했다. 그리고 해네그래프 대표는 “우리가 한 근본적인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말로 압축된다”고 했다. 지방 교회에 대한 CRI의 최초 연구와 이번 재연구에 참여한 엘리옷 밀러(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편집장)는 “우리가 전에 그들을 ‘정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라고 평가했던 것은 우리가 그들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며 “비록 우리가 여기 서방에서 익숙하게 된 것들과는 다르지만, 이들(지방 교회)은 확실히 믿는 이들의 정통 단체”라고 강조했다. 밀러 편집장은 물론 지방 교회에 비판받을 만한 요소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지방 교회들이 인간 본성에 관해 삼분설을 취하고 그리스도인의생활에 대해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보다는 더 신비스럽게 접근하는 것 ▲세대주의를 포함한 그들의 해석학적인 방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보다 예표론에 대해 더 사변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러 편집장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의 이러한 방면 중 정통 교리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지방 교회에 대한 CRI의 이번 재평가에 대해 미국 교계 일각에서는 강한 비판도 뒤따르고 있다. 이로 인해 CRI의 재정도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행크 해너그래프 대표는 “이러한 소란 가운데서 나는 직원들에게, 우리의 사역은 인기 경쟁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며 “우리의 사역은 강대상의 크기나 정치적인 결탁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한다.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또 “어떤 대가가 든다 할지라도, 중국과 전 세계에서 박해당한 교회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틀렸었다’라는 말보다 더 하기 힘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는 격언을 실천하는 사역으로서, 기꺼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밝혔다.  

앞서 세계적 권위의 신학 명문 풀러신학교 역시 지방 교회에 대해 이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 하워드 로웬 신학부 학장, 베리마티 카케년 조직신학 교수가 참여한 위트니스 리 연구프로젝트(2년)에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지방 교회에 대한 이단 논쟁이 시작됐던 미국에서 잇따라 이같은 재평가가 이뤄짐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같은 흐름이 이어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내에 위트니(지방 교회)에 대한 연구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출처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688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1. 00:28

 

"그리스도께서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여러분도 동일한 생각으로 자신을 무장(武裝)하십시오….. 불같이 혹독한 시련이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닥쳐올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기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만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벧전 4:1, 12-13)"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 (원문 직역: 고난받을 생각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한데,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모든 일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하다는 생각이 없으시다. 구약성경이 줄곧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목자로서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항상 분별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행을 제창하는 그러한 철학 사상을 교회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된다. 우리가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오면, 즉시 기독교는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시련과 채찍질에서 예외가 되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시련을 주시고 채찍질을 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고행을 제창하는 그런 철학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채찍질하시지, 결코 매일 매순간 그렇게 하지는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완고하여 글복치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시련을 계속 주시고 채찍질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보통 때에 그분은 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결같이 택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규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많은 고난은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보통 사람과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것을 잘 예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난받는 길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받지 않도록 안배하실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 편에서는 다만 언제나 고난받을 것을 예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안배가 바뀌어서, 시련이 우리 몸에 닥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응당 감당해야 하며 조금도 이상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만일 당신이 조그만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환경을 안배하실 때에는 당신이 받아들이겠지만,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당신은 즉시 믈러나거나 혹은 사역을 중단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먹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은 입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건강할 때도 이렇게 하며 몸이 약할 때에도 이렇게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곧 병기(兵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탄이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되고 즉시 멈추게 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고난을 잘 참고 견디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보배로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전혀 없게 된다. 그들은 때로 심지어 속에서 원망하며, 원망의 말을 한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봐 두려워 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이 고난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간구만이 있을 뿐 어떠한 찬미도 없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서 그들에게 닥친 것들은 그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속에서 그런 말들이 빨리 지나기만을 갈망한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여 준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날들을 허락하셨을 때,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주님이 당신의 길을 순탄케 하실 때는 전진할 수 있겠지만, 길이 진흙투성이일 때에는 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다고 해서 곧 주님이 당신으로 고난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난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내면에 이미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으므로 당신은 좌절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신체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기타 모든 일에서 시련을 받는 형제 자매는 주의해야만 한다. 주님 앞에서 당신에게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당신이 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물론 당신이 만난 것은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혹은, 당신은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참소하지는 않았는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사역에 있어서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외적인 요구가 그의 능력에 지나칠 때 그는 즉시 좌절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드릴 것을 요구하면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귀중히 여기는 그러한 것에 관한 한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실패는 바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데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 사역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우리의 책임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사람의 영혼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간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오직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 끝없이 고난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 비록 죽을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9. 23:49

마태 복음 24-25장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는 다음과 같이 양측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는 최소한 세 가지 사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1) 두 남자 (두 여자)의 사례(마 24:32-44), 2) 두 종류의 노예 사례(마 24:45-51), 3) 열 처녀의 비유 사례 (마25:1-13) 가 그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분들은 이 사례들을 <믿는 이들과  불신자 구도>로 잘못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모든 유형은 모두 다 거듭난 믿는 이들을 가리키며, 불신자와는 무관합니다. 굳이 유형을 분류하자면 <깨어 있는 성도들과 그렇지 못한 성도들> 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신약성경 회복역과 그 각주들은 이 세 가지 사례들 중 소위 ‘깨어있지 못한 성도들’도 여전히 거듭난 믿는 이들임을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1) 땅에 남겨진 두 명도 구원받은 성도임

40 그 때에 두 남자가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주님께서 어느 날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2절 각주1, 깨어 있도록 >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와 ‘여러분의 주님’은 24장 40절과 41절에 있는 두 남자와 두 여자가 구원받은 믿는 이들이라는 것을 증명 한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지 않으실 것이며, 또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주인도 아니시다.

 

2) 악한 노예도 구원받은 성도임

48 그러나 그 악한 노예가 마음 속으로 ‘나의 주인이 더디 오실 것이다’ 라고 하며, 49 동료 노예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면, 50 예기치 않은 날, 알아채지 못하는 시각에 그 노예 주인이 와서, 51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48절 각주1, 악한 노예> 이 악한 노예는 구원받은 믿는 이인데, 이것은 (1) 그가 주님께 임명되었고(마24:45), (2) 그가 주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으며, (3) 그가 주님께서 오고 계셨다는 것을 믿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51절 각주 3, 벌을 내릴 것이니> 이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징계를 받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8절 각주 1참조.

 

3) 어리석은 다섯 처녀도 구원받은 성도임

마25:8 어리석은 처녀들이 현명한 처녀들에게 ‘우리의 등불이 꺼져 가니, 여러분의 기름을 좀 주십시오.’라고 하였지만…11 그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열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지만, 12 신랑이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나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8절 각주 1, 꺼져가니> ‘꺼져가니’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등이 켜져 있고 그 안에 기름이 조금 있었지만, 충분한 공급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지만, 온 존재가 적셔질 만큼 그분으로 충만되지 않았던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12절 각주 1,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합니다’는 누가복음 13장 25절에서 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승인하지 않습니다’의 의미를 지닌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을 켜고 주님을 만나러 갔으며, 죽고 부활하여 휴거되었지만 성령 충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데는 늦었다. 이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결혼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이 시대적인 보상을 잃어버리지만, 영원한 구원은 잃지 않는다.

 

마태복음 25:1은 천국은 ..와 같으니 라고 말문을 열면서 열 처녀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위 본문에 의하면 비록 거듭났다고 해도 천년 왕국(혼인잔치)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을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나에게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갑니다'(마7:21)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으로도 재차 확증됩니다. 

 

(한국복음서원 발행 회복역신약성경 참조)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8. 16:45

 

(웟치만 니 (Watchman Nee)의 청년시절의 모습)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에야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어머님은 분명한 구원을 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십 칠 세 때 구원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죄에서 구출되는가의 문제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또한 나의 종신 사업과 연관되어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동시에 나는 그분을 주로 영접해야 했다. 그분은 나를 죄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건지셔야  했다. 그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 놓고 구원만 원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한다면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지 않자니 또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인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러한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면으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구주(救主)를 보았다. 한 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주님의 보혈로 나를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또 한 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 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애 일생 중에 첫 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세 명이 과거 나의 동급생이었다. 그중 이광희 형제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얼마나 특이하게 행동하는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학생이었는지를 간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면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주 학교 규칙을 어기는 학생이었고, 좋은 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천부적인 총명을 주셔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등을 했으며 나의 작문은 자주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그때 나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기 장래를 위해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내가 겸손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세상으로 나갔다면 아마도 큰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내 동급생들이 이 일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후 네게 많은 새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이전 나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나의 장래는 이미 끝장나고 포기되었다.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주 어려웠다. 이는 내게 많은 사상과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은 그날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구원받음과 부르심 받아 주님을 섬기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내가 부르심 받은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장래를 한 번 정함으로 영원히 정하였다. 나는 나를 구원하심은 한 면에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 한 면에서는 그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은 한 면에서 나로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하셨고, 다른 면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역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전도(傳道)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장할수록 내 눈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요 가장 비천한 일로 보였다. 그 당시 전도사는 대개가 유럽과 미주의 목사들에 의해 고용된 일꾼들로서 목사의 눈치를 살폈으며 매달 월급은 팔 구 불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전도할 뜻이 조금도 없었고 나는 전도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전에 하찮고 비천하게 여겼던 전도의 직무를 택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1936년 10월 18일 공개적으로 교회 안에서 한 간증)

* 웟치만 니(Watchman Nee)에 대한 그의 동역자였던 위트리스 리(Witness Lee)의 간략한 소개

1900년에 중국 본토에 북청 사변이 발생하였고 이 사변에서 유럽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많은 선교사들과 다수의 중국인들이 순교당했다. 사탄의 의도는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핍박은 서방세계에 있는 믿는 이들을 일깨워 그들로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부담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북청사변 후에 전도자들은 복음에 매우 능력이 있었고 그들의 전파는 중국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에게까지 미쳤다. 1920년을 전후로 하여 복음은 많은 학교에까지 깊이 스며들었으며,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국의 많은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주님께 얻어진 바 되었다.

 

이 특출한 학생들 가운데 "니쑤주" (영어 이름은 헨리 니)라는 사람이 바로 "윗치만 니"이다. 니쑤주는 제3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주에 있는 성공회의 삼일 서원(三一書院)에서 공부하였다. 이 서원은 2년제 대학으로서 영어와 중국어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가 주님의 위임을 수행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일으켜진 후, 영어 이름은 "윗치만 니" (Watchman Nee: 파수꾼이라는 뜻임)로, 중국어 이름은 "니토생" (징치는 자의 징 치는 소리를 나타냄)으로 바꾸었다. 그는 새롭게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을 어두운 밤에 일어나 징 소리를 발하는 징치는 자로 여겼다.

 

주님의 풍성한 긍휼과 은혜로 인해 그는 결국 이 시대의 독특한 은사가 되었다. 웟치만 니 형제는 주님이 이 땅에서의 그분의 회복의 움직임을 위해 중국뿐 아니라 온 땅을 위해 그분의 몸에게 주신 사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