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59번, “경고의 말씀(1)”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우리의 이해에 따라 우리는 레위기가 25장의 희년으로 끝맺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두 장이 남아 있다. 우리는 26장에서 경고의 말씀을 가지며 27장에서는 서원을 위한 전적인 헌신을 가진다. 경고의 말씀에 대한 장이 희년을 말하는 장 바로 뒤에 나온다는 사실은 희년에 대해 우리가 너무 많이 소리치거나 너무 흥분해서는 안 됨을 가리킨다. 대신에 우리는 상황을 고려해 볼 수 있는 진지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때문에 희년, 즉 외침의 때에 이어 경고의 말씀이 나온다.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경고의 말씀에 대해 살펴보겠다. 레위기 26장의 경고의 말씀은 단순히 사람이 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신성한 신탁의 말씀(the divine oracle)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방법과 그런 내용으로 경고의 말씀을 제시할 수 있으시다.
이 경고의 말씀에서 우리는 변절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첫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택함받았다.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부터 구속하셨으며 그들로 광야를 통과하도록 하셨으며, 그분이 그들과 매우 오랫 동안 함께 계셨던 가나안 땅에 그들을 두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변절하였고,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셨다. 하나님은 외관상 그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신 것처럼 보인다. 27세기 동안 마치 하나님의 손이 그분의 백성들에게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이것이 그 상황은 아니었다. 경고의 이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택하셨던 하나님이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심을 말하는 예언이 있다. 그들에 대한 그분의 긍휼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들의 조상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그분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레 26장의 경고의 말씀에는 많은 가르침들, 우리가 연구하고 배워야 할 것들로 가득차 있다.
Ⅰ.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 것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26:1). 우상을 만들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추구하는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우리의 신성한 유업을 누릴 수 있는 위치를 상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희년 안에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구한다면, 우리는 희년에 대한 누림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목적을 두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예를 들어 학위, 재물, 지위, 지식 등을 지나치게 추구한다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목적, 유일한 목적인 하나님만을 가져야 한다.
Ⅱ.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킴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2上).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전적으로 그분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누리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공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하고 많은 일을 행하도록 가르침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 항목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을 존중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누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지만, 우리는 이 이루신 것을 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누리는 대신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일을 제쳐두고 계속 노력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받아들이고, 주목하고, 존중하고 누리기를 배워야 하며,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Ⅲ. 하나님의 성소를 귀하게 여김
백성들은 또한 하나님의 성소를 귀하게 여기라는 경고를 받았다(2下). 안식일이 많은 것을 상징하지만, 성소는 더 많은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성소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거처이며 체현이며 표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요 1:14, 골 2:9), 또한 하나님의 거처와 영원한 확장을 위해 그리스도의 확장인 교회 안에서(엡 2:22, 계 21:10), 이루셨고 이루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함을 의미한다.
레위기 26장 2절의 성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거처, 체현, 표현을 의미하며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거처와 영원한 확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이것이 무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체현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확대와 하나님의 확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하신 것에 대한 합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관한 경고를 받아야 한다.
Ⅳ. 순종하는 자들은 축복받음
경고의 주요 방면들인 첫 번째 세 요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순종하게 될 것이다. 26장 3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자들이 축복받을 것임을 본다. 이것은 신약의 믿는이들인 우리가 그 영에 따라 행함으로 여섯 가지 축복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이 여섯 가지 결과를 살펴보겠다.
1) 비를 알맞은 때에 내림
“너희가 나의 율례를 따르고 나의 계명을 지키고 준행하면, 나는 너희에게 제때에 비를 내려 주겠다.”(3-4上). 비를 알맞은 때에 내리는 것은 비로 예표된 그 영이 교회나 개개인의 믿는 이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주어짐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 영을 예표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신 11:14, 렘 5:24, 욜 2:23)라고 불리는 비를 사용하신다. 앞의 세 가지를 주의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우리는 우리 위에 내리는 비이신 그 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땅은 소산을 내고 너희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그 땅에 안전히 거함
백성들이 순종하면, “땅은 소산을 내고 들의 나무는 열매를 넬 것이다.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고 말한다. 10절은 계속해서,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우리의 만족과 안전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을 의미한다. 영적인 만족과 안전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순종하는 결과이다.
3) 두렵게 할 자와 사나운 짐승과 칼을 제하여 그 땅에 평화를 줌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6절). 이것은 교회가 정상적으로 평화로운 상태에 있으며, 사나운 짐승이 없고(행 20:29), 성도들 가운데 서로 다툼이 없음을 의미한다.
4) 대적을 쫓으며 다섯 명이 백 명을 쫓고 백 명이 만 명을 쫓음
『너희가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7-8절). 이것은 교회가 몸의 동역 안에서 대적을 쫓을 것임을 의미한다.
8절에 따르면, 다섯 명이 백 명을 쫓을 것이며, 백 명이 만 명을 쫓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이십 명을 쫓고, 후자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백 명을 쫓는다. 이 예표들은 몸의 생활과 몸의 동역을 함축한다. 동역이 클수록 우리가 쫓는 능력은 더 커질 것이다. 이것이 몸의 원칙이다.
5)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함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9절).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함은 교회가 번성하고 창대케 될 것임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서 증가나 번식이 부족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어떤 면에서 잘못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강한 표적이다. 번성케 함과 창대케 함이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것을 찾아내야 한다.
6) 하나님의 거처가 백성들 가운데 있음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11절).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처를 백성들 가운데 세우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가 그분의 기쁨을 위한 교회 안에 세워질 것임을 의미한다(고후 6:16-18 참조).
Ⅴ. 그들로 회개하도록 불순종하는 자들은 벌을 받음
레위기 26장 14절부터 39절까지에서 우리는 그들로 회개하기 위해 불순종하는 자들은 벌을 받을 것임을 본다. 이것은 그 영에 따라 행하지 않고 육을 따라 행하는 믿는이들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기까지 한 번이 아닌 여러 단계로 징계의 고통을 받을 것임을 의미한다.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57번, “안식년과 희년(2)”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 속죄일에 나팔소리가 퍼져 나감
25장 9절 “너는 일곱째 달이 되면 그달 초 열흘날에 숫양 뿔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희년이 속죄에 근거하여 완전한 자유가 온 백성들에게 선포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에 의해 성취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내어 나팔을 불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희년을 선포하며 나팔을 분다면, 사람들은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칠 것이다.
10절은 사람이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도록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는 완전한 책임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희년에는 수고가 없으며, 책임이 없다. 즉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 심지어 수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어떤 부담이나 책임 없이 밭에 나가서 먹을 수 있다. 책임을 지는 대신에 우리는 안식과 누림과 외침을 갖는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을 때 그런 체험을 했다. 우리가 구원받던 날 우리는 해방되었으며 모든 묶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이 희년의 체험이며 누림이다.
* 각 사람은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감
10절 “너희는 각자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자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신약의 믿는 이들이 그들의 잃어버렸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유지를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곧 신약의 희년 때에 우리는 우리의 가족, 곧 신성한 가족에게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부유하며 우리의 신성한 가족 안에서 자유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외쳐야 하며, 교회 집회 안에서 주님을 향한 기쁨의 소리를 내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희년이다.
* 일곱절기에는 두 가지 완성이 있다.
레위기 25장의 일곱 절기들에는 두 가지 완성이 있다. 첫 번째 그룹의 네 절기는(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한 오순절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그룹의 세 절기들은(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천년 왕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완성은 교회 생활을 산출한 오순절이며, 두 번째 완성은 완전한 희년을 가져오는 장막절 곧 천년 왕국이다. 11절-12절 “오십년째 되는 해는 너희를 위한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되고, 수확한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어들여서도 안되며,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딘다. 이 해는 희년이며, 너희에게 거룩한 해이다. 너희는 저절로 난 것을 먹어야 한다. 이것은 희년 때에는 사람의 일이 불필요함을 의미한다. 희년은 전적으로 사람이 안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신다.
*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속한 토지는 영원히 팔지 못함
23절 ”땅을 영구히 팔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고 체류자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성한 소유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패배하고 타락하더라도 영원히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보호하심이다. 신약에는 왕국의 보상과 왕국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천년 왕국 동안에 패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징계받을 수 있으나, 우리의 영적 소유권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 천년 왕국이 끝난 후 징계받았던 믿는 이들은 그들의 신성한 소유지를 다시 돌려받을 것이며 특별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 팔렸던 땅을 되사는 것에 관하여
레위기 25장 24절부터 28절까지는 팔렸던 땅을 되사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그의 잃어버린 소유지를 회복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었음을 본다. 첫째, 그의 잃어버린 소유지는 가까운 친척에 의해 다시 살 수 있었다. 이것은 은혜의 문제이다. 둘째, 그에게 재산이 있다면, 스스로 그것을 다시 살 수 있었다. 셋째, 그것을 다시 살 수 있는 친척이 없고 스스로도 그것을 살 수 없다면, 그는 희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은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잘 나타내는 예표이다.
* 레위기 25장 29절부터 34절까지는 팔렸던 집을 되사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
29절-30절은 만일 어떤 믿는 이가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렸다면, 그 누림은 하나님의 짧은 은혜의 범위 내에서는 회복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 것이 교회 시대 안에서 회복되지 않는다면, 천년 왕국에서도 그 누림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없는 자에게서 있는 것까지 뺏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마 25:29). 그러므로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성벽 있는 성내의 집은 교회 생활의 예표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팔 수 있으나 교회 생활만은 팔아서는 안 된다. 교회 생활을 판다면 우리는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받으며, 희년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교회 생활의 누림은 일 년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짧은 은혜의 범위 내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
완전한 일 년은 교회 시대를 예표한다. 우리는 교회 시대가 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실상 교회 시대는 짧다. 신약은 교회 시대가 짧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주 예수님은, 『내가 속히 갈 것이다.』(계 3:11)라고 말씀하셨다. 게으르고 악한 종만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마 24:48)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오심을 서두르고 계시며 교회 시대는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다. 교회 시대는 길어지거나, 연장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 생활이 내일 끝나게 될지 아닐지 장담할 수 없다. 교회 시대는 짧은 시간 동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시대는 짧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 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은 주님의 재림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고 빨리 그것을 되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한 천년 왕국 안에서도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천년 왕국 동안에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적한 바와같이 이것은 없는 자에게서 있는 것까지 빼앗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시대에서 교회 생활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는 시대에 교회 생활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회복되기 쉽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교회 생활을 회복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회생활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팔지 않도록 경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팔았다면, 우리는 가능한 빨리 잃어버린 교회 생활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우리의 잃어버린 교회 생활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년 왕국 동안 징계받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게 되면, 장차 올 천년 왕국에서도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는 것보다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32절-33절은 레위인들이 누림을 잃었어도 쉽게 회복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합당하게 봉사하는 믿는 이들이 누림을 잃게 되어도, 시간의 제한 없이 누림이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가 많이 봉사할수록 우리에게 유익됨을 본다.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봉사할수록 우리의 교회 생활의 누림은 더 안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쉽게 잃어버리지는 않겠지만, 만일 교회 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쉽게 그리고 빨리 그것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 합당하게 하나님께 봉사하는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3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과 교회 생활의 누림 모두를 위하여 우리는 교회 봉사에 더욱 참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다시 찾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한정된 시간 내에 잃어버렸던 교회 생활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한 장차 오는 시대에도 교회 생활을 잃어버릴 것이며 우리가 영원한 시대를 위하여 징계받고, 훈련받고, 교정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 25장의 예표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신약의 분명한 말씀들 안에서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느슨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교회 생활을 회복하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 시대가 얼마 동안 지속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 년이 하나님께는 단 하루가 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천 년이다.
장차 올 천년 왕국 동안의 시대적인 상벌의 심각한 문제는 복음이며, 특별히 마태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상과 벌에 관하여 여러번 경고하고 있다(마8:12,11:17,13:42,22:13,24:51,25:30). 레위기 25장에는 두 가지 누림-땅을 누리는 것과 집을 누리는 것-이 있다. 땅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예표하고, 집을 누리는 것은 교회 생활을 누리는 것을 예표한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교회 생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시대에 교회 생활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으며, 잃어버리게 되면, 장차 오는 시대, 곧 왕국 시대의 천 년 동안 징계받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희년의 장으로 잘 알려진 레위기 25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장은 희년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안식일은 잘 알고 있으나, 안식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Ⅰ. 안식년
레위기 25장 2절부터 7절까지와 18절부터 22절까지는 안식년에 대해 말한다. 이 안식은 하루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 동안 안식하는 것이었다. 안식년은 사람을 위한 안식이었을 뿐 아니라 땅을 위한 안식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안식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일하셨으나, 일하신 후에는 안식하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혼자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안식하셨다. 일하신 후,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을 누리셨다. 그러므로 제 칠일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안식하였다. 희년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년을 준수하는 실행을 해야만 했다. 매 칠년은 안식년이어야 했으며 그 해는 사람도 땅도 안식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땅을 위한 안식의 해였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뜻하며, 안식년 또한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안식년은 완전한 우리의 안식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안식일로서뿐 아니라 우리 안식년으로, 즉 부분적인 우리의 안식으로서뿐 아니라 완전한 우리의 안식으로 누릴 필요가 있다. 안식년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 우리의 안식이신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하는 법과 세 배의 소출을 누림
레위기 25장 2절-4절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매주의 하루인 사람을 위한 안식일과 매 칠년마다 있는 땅을 위한 안식년은 우리의 안식이신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4절과 5절은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라고 했다. 이것은 안식이 단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것이므로 사람의 모든 노력은 절대적으로 멈추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땅이 쉴 때, 일하는 이들, 땅을 경작하는 농부들 또한 안식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과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6절-7절은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고 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뜻한다.
제 칠 년의 땅의 소출은 공동의 소유가 되었다. 비록 그 땅이 여전히 소유주에게 속해 있다 할지라도, 땅에서 산출된 것은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속했으며, 심지어 육축들과 짐승들에게 속했다. 이것은 땅의 소출이 공동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공산주의, 즉 사람들에게서 강요하여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의 공산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유하게 하는 공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땅의 소출에 대한 이러한 공동 누림에는 참된 자유가 있다.
20절-22절은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 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 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너희가 제 팔 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 년 즉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충족한 은혜가 우리의 필요를 세 배나 능가함을 의미한다.
강요된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누리는 합당한 누림을 가져야 한다. 땅은 여전히 각 소유주에게 속하므로 땅의 소유는 공동이 아니다. 공동 소유는 제 칠년의 땅의 소출이다. 이 해에 땅에서 산출된 모든 것은 누림을 위한 공동 소유가 된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세 배의 음식을 산출하도록 땅을 축복하신다. 이러한 안식년을 지키는 실행은 우리를 희년으로 인도한다.
Ⅱ. 희년-오십 번째의 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 안으로 들어간 후, 그 땅은 그들 가운데 인수에 따라서 나누어졌다. 이 토지는 어느 것도 영원히 팔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년에는, 팔렸던 모든 토지들이 원래의 소유주들에게로 되돌아왔다.
희년이 되기 전의 여러 해 동안에, 어떤 백성들은 그들의 토지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이나 혹은 질병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토지를 전부 혹은 일부를 팔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희년의 때에 그 땅은 소유주에게로 되돌려졌다. 땅이 되돌려지는 이것은 백성들 간에 땅의 소유권을 균형잡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땅 주인도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로 신성한 규정, 신성한 규례가 자연 자원을 균형잡았기 때문이다. 이 규례는 오십 년마다 효능이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삼십 오 세기 전, 막스(Marx)가 공산주의를 창안하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말씀 안에서 땅을 균형잡기 위한 준비를 하셨음을 본다. 매번의 오십 번째 해에는 원래의 소유주들이 그 땅을 되돌려받기 위해 어떤 것을 하거나 어떤 기도를 하지 않아도 땅은 그들에게로 되돌아와서 다시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예표에서, 희년은 가련한 죄인들인 우리의 상황을 묘사한다.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살아나갈수록 우리에게 배당된 신성한 분깃을 점점 잃어가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잃어버렸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우리는 이 권리를 점점 더 잃어버린다. 결국 우리는 출생으로 받았던 모든 것을 팔아버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잃어버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합당한 구매자에게 판 것이 아니라 사탄과 죄에게 팔았다. 바울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下)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처럼 우리도 죄에게 팔린 노예들이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사탄에게 팔았었다. 우리는 사탄과 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죄에게 팔았을 때 우리는 사탄에게 우리 자신을 판 것이 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죄 아래 있는 사탄의 손에 빠졌다. 아담의 자손들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리를 팔았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을 죄와 사탄에게 팔았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찾아(구속할) 올 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소망이 없었다. 그런 어느날 희년이 왔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주 예수님은 은혜의 말씀들로 희년을 선포하셨다. 그분이 오셨을 때, 그분과 함께 희년이 왔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다.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신약의 희년을 선포한다.
희년은 오십 번째의 날이 아니라 오십 번째의 해이다. 여기서의 원칙은 안식년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갖지만, 레위기 25장에서는 안식년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오순절은 하루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의 해를 갖는다.
여덟 번의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고, 여덟 배의 안식이 되는 안식 위에 안식을 더한 희년을 완성하는 오십 년(8절 참조)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나님의 안식의 충만함이 지극히 풍성함을 의미한다.
이 오십 년 기간의 첫 번째 해와 마지막 해는 여덟 번째 해이며, 숫자 8은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것은 희년이 전적으로 부활에서 온 것이며, 부활로 온 것이며, 부활 안에서 온 것이며, 부활과 함께 온 것임을 가리킨다.
희년은 안식에 안식을 더한 문제, 즉 부활 위에 부활을 더한 것을 의미하는 여덟 배의 안식이다. 이 여덟 배의 안식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나님의 안식의 충만함이 지극히 풍성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한 안식이 아니라 만족을 주는 안식이다.
어릴 때 '그림자 놀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밤에 희미한 조명을 배경으로 벽을 향하여 각종 손 모양을 해 보이면 손 모양의 그림자가 개도 만들고 닭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주로 그림자를 쳐다보며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러나 게 중엔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손재주 좋은 형들의 손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며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달 밤에 그림자 밟기 라는 것도 했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그림자를 쫒아가서 밟는 놀이입니다. 이긴 사람은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그림자를 안 밟히려고 하고 술래(진 사람)는 그림자를 밟고 술래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쫒아다닙니다.
위 두 가지는 다 실물이 움직이는대로 그림자가 따라 한다는 것이 공통된 현상입니다. 성경은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림자에 해당되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의 실재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다른 말로 허상입니다. 있는 것 같으나 막상 잡으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 높은 지위를 맛보았으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헛된 것을 대치할만한 실재 또는 참 실물을 발견하고 소유하지 않은 한 '헛된 바람을 잡는 것 같은' 그림자 밟기 놀이는 여러 세대를 이어서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임종시 인생의 헛됨을 토로하는 어른들을 보면서도 자신도 그런 같은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뭔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다른 일에는 그리도 똑똑한 그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그림자들을 좇는 허무한 인생을 살리가 없습니다(엡2:1-3, 4:17-18).
신약 서신서에서 '그림자'(shadow)를 언급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골2:17, 히8:5, 10:1) 저는 그 중에서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다음 부분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which are the shadow of the things to come)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6-19).
위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 아닌 종교적인 의식들'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눈에 보이는 의식들이 그림자다 이렇게 뭉뜽거려 말하지 않고, 먹고 마심, 절기, 월삭 등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또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회심한 주의 제자들이 구약의 율법이 요구하는 각종 의식과 관련하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그런 밖의 행위들은 안의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바울은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레위기 11장을 보면 먹을 수 있는 생물들 리스트가 주욱 열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참된 먹거리는 그 그림자들의 실재인 주님 자신입니다. 신약 도처에서 주님을 먹고 성령을 마시는 언급과 사상들이 발견됩니다.
만일 누가 레위기 말씀을 지키려고 토끼나 사반 고기는 안 먹고, 새김질하는 소고기는 먹으면서 정작 요한 복음 6장과 고전12장이 말하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생수이신 성령을 먹고 마시는 것은 소홀히 한다면 그는 그림자를 주목하고 실재는 놓치는 종교인인 확률이 높습니다.
또는 레위기 23장이 말하는 각종 '절기'와 이에 더하여 소위 교회력에 있는 사순절이니 고난주간이니 하며 특정 날을 지키면서 그 실재인 주님을 맛봄으로 인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면 그 역시 그림자는 중요시하되 그 실재를 놓친 자입니다.
'월삭'(new moon)(민28:11)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어둠가운데 있다가 빛이신 주님으로 돌이켜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이 오늘 날 월삭을 참되게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레23:3)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장로교 모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의 자녀였던 한 형제님은 주일성수하려고 그 다음 주 월요일이 중요한 시험이라도 주징 자정을 넘기지 전까지는 시험 공부를 할수 없었다고 간증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안식교단 이외에도 안식일 준수(주일성수?) 교리가 적지 않은 분들에게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일 준수는 그분이 쉬신 것처럼(창2:3) 우리도 육체의 열심과 노력을 그치고 영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주는 참된 영적 실재는 바로 완성과 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한 영됨을 누릴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육신 안에서는 '한 손 마른 자'를 고치기도 하고 배고프면 밀이삭을 잘라 먹어도 가합니다.
오랫만에 휴가를 맞이하여 낮잠도 자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실컷 쉬어 보지만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좀이 쑤시고 지루해지며 도리어 안식이 깨지는 경우를 우린 경험합니다. 참된 안식은 안식일의 실재이신 주님 안에서만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골 2:17이 말하는 그림자와 실재를 바로 푸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글 제목이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임으로 실제적인 몇 가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1. 안식교가 주장하는 안식일 준수
물론 구약 성경에 안식일 준수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규례들은 참으로 그림자일 뿐이며 신약의 성도들도 지켜야 할 실재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위 본문 위에서 보듯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때 우리들의 죄와 죄들을 처리하셨을 뿐 아니라 안식일 준수를 포함한 모든 의문에 쓴 증서들을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Blotting out the hand-writing of ordinances)(14절).
만일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안식일 준수(내지는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불의하다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료하신 주님이 먼저 불의한 자로 정죄 되어야 마땅합니다(마12:9-14).
그러나 주님 자신은 영원토록 의로우신 분 이십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며 불의가 없으십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인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면 안식일외의 다른 모든 율법들도 엄격하게 지켜야 마땅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3:10). 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고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임을 말합니다.
2. 신약 교회가 소위 교회력을 지키는 일
언제부터인가 개신교 안에도 교회력이니 사순절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교회력 개념 안에는 전통적인 의식인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오순절 등도 포함이 됩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교회력'이라는 검색어를 쳐 넣어서 나온 다음과 같은 자료는 오늘 날 '특정한 날을 지키는' 소위 골2:16 본문의 변종이 얼마나 신약 성도들 안에 만연되어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 다. (교회력 구글 검색)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것이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림자에 해당될 뿐입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실재를 놓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대적의 고차원적인 수법입니다. 즉 엉뚱한 것에 세월을 낭비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목치 못하게 하는 전략입니다(엡5:16 -21).
위와 같이 성경이 '그림자'라고 판단한 것들을 붙들고 귀히 여기는 분들은 최소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딤전 1:4)에 대해서 선명한 이해가 크게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입니까?
본문 문맥을 따라 설명하자면 골2:19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마디와 힘줄에 해당되는 지체들이 다른 성도들을 공급하고 연합케 하여 그들 각자 안에 하나님의 증가로 인한 생명의 성장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 안에서의 하나님의 증가(원문 참조)는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바로 이 몸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엡1:23).
이러한 진리인식이 분명하다면 결코 그림자에 불과한 '대강절'이니 '사순절'이니 하는 절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생명의 성숙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라는 하나님의 갈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실재는 없는 그림자 밟기 놀이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 모두의 마음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기뻐하심이 무엇인지 참되게 보게 하시고 모든 그림자에서 돌이켜 실재이신 주님자신만을 주목케 하소서!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0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소유하기 위해 그분의 체험 안에서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며 그분을 따르고 배우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는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완전히 외적으로 그분을 모방할 것을 가르친다. 15세기 토마스 아 캠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외적인 삶을 모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의 신학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모방하고, 그분께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약의 어떤 구절들은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서들 안에서 주 예수님은 종종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고했다(고전 11:1). 그러한 구절들은 외견상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성경 교사들이 믿고 있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그분을 외적인 본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갈 2:20).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를 그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가르침 받았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결심했어도, 그들은 결국 성질을 내고야 만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실패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강한 의지로 성공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가르침의 실행일 뿐이다.
그런데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신서들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권하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한다. 위에 언급한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고백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도 그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라고 간증했다.
우리가 결혼 생활에서 주의할 것은 다투려는 유혹이 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을 때는 부부싸움을 하려는 유혹이 온다 해도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다투지 않을 것이다. 배우자와 다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대신,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
새 신자들이 외적인 방식으로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흉내를 내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단지 그리스도를 사는 것만을 알 뿐이라고 간증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오 주 예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과 대화하기 시작하며, 그분과 교통하기 시작하며 그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먹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살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다면, 마귀의 어떠한 유혹을 받는다 할지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귀와 모든 귀신들을 패배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으로 사는 생활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종교와 다르며 공자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것과도 다르다.
내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학교에 다니는 나의 누님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어느 날 누님은 나에게 어떤 성경 교사에 대해 알려 주었는데 그는 매우 인내가 있었고, 항상 손에 성경을 가지고 천천히 걸으며, 종종 멈추어 하늘을 보거나 성경을 보곤 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을 때 그렇게 해 보려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흉내를 내는 「원숭이」와 같았다. 나는 빠른 사람으로서 느리고 인내하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는 포기했다. 그러다가 나는 속 생명 무리들과 접촉했고, 그들의 어떤 가르침을 통하여 빛 비춤을 받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밖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대신 우리는 그분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살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이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누릴 필요가 있다. 이것이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또 한 번 승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