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8. 16:45

 

(웟치만 니 (Watchman Nee)의 청년시절의 모습)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에야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어머님은 분명한 구원을 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십 칠 세 때 구원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죄에서 구출되는가의 문제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또한 나의 종신 사업과 연관되어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동시에 나는 그분을 주로 영접해야 했다. 그분은 나를 죄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건지셔야  했다. 그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 놓고 구원만 원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한다면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지 않자니 또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인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러한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면으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구주(救主)를 보았다. 한 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주님의 보혈로 나를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또 한 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 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애 일생 중에 첫 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세 명이 과거 나의 동급생이었다. 그중 이광희 형제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얼마나 특이하게 행동하는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학생이었는지를 간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면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주 학교 규칙을 어기는 학생이었고, 좋은 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천부적인 총명을 주셔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등을 했으며 나의 작문은 자주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그때 나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기 장래를 위해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내가 겸손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세상으로 나갔다면 아마도 큰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내 동급생들이 이 일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후 네게 많은 새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이전 나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나의 장래는 이미 끝장나고 포기되었다.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주 어려웠다. 이는 내게 많은 사상과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은 그날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구원받음과 부르심 받아 주님을 섬기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내가 부르심 받은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장래를 한 번 정함으로 영원히 정하였다. 나는 나를 구원하심은 한 면에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 한 면에서는 그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은 한 면에서 나로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하셨고, 다른 면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역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전도(傳道)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장할수록 내 눈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요 가장 비천한 일로 보였다. 그 당시 전도사는 대개가 유럽과 미주의 목사들에 의해 고용된 일꾼들로서 목사의 눈치를 살폈으며 매달 월급은 팔 구 불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전도할 뜻이 조금도 없었고 나는 전도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전에 하찮고 비천하게 여겼던 전도의 직무를 택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1936년 10월 18일 공개적으로 교회 안에서 한 간증)

* 웟치만 니(Watchman Nee)에 대한 그의 동역자였던 위트리스 리(Witness Lee)의 간략한 소개

1900년에 중국 본토에 북청 사변이 발생하였고 이 사변에서 유럽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많은 선교사들과 다수의 중국인들이 순교당했다. 사탄의 의도는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핍박은 서방세계에 있는 믿는 이들을 일깨워 그들로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부담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북청사변 후에 전도자들은 복음에 매우 능력이 있었고 그들의 전파는 중국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에게까지 미쳤다. 1920년을 전후로 하여 복음은 많은 학교에까지 깊이 스며들었으며,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국의 많은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주님께 얻어진 바 되었다.

 

이 특출한 학생들 가운데 "니쑤주" (영어 이름은 헨리 니)라는 사람이 바로 "윗치만 니"이다. 니쑤주는 제3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주에 있는 성공회의 삼일 서원(三一書院)에서 공부하였다. 이 서원은 2년제 대학으로서 영어와 중국어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가 주님의 위임을 수행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일으켜진 후, 영어 이름은 "윗치만 니" (Watchman Nee: 파수꾼이라는 뜻임)로, 중국어 이름은 "니토생" (징치는 자의 징 치는 소리를 나타냄)으로 바꾸었다. 그는 새롭게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을 어두운 밤에 일어나 징 소리를 발하는 징치는 자로 여겼다.

 

주님의 풍성한 긍휼과 은혜로 인해 그는 결국 이 시대의 독특한 은사가 되었다. 웟치만 니 형제는 주님이 이 땅에서의 그분의 회복의 움직임을 위해 중국뿐 아니라 온 땅을 위해 그분의 몸에게 주신 사람이다. 끝.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6. 18:02

 

진정한 배움은 어떤 장소에 가서 은밀히 영적인 수양을 하여 당신 자신이 진보가 있다고 느낀 후에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자신이 어느 단계에 이르기까지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일을 한다면, 기다릴수록 더 아무것도 없게 된다. 우리는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배우고 얻는 것이지 무엇을 얻은 다음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참소하는 느낌을 상관하지 말고 필사적일수 있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서 뭔가가 계속 새어 나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기다릴 수 없다. 일단 기다리면 더욱더 느슨해지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히 다루어야 한다. 역대로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은 다 엄격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에서는 결코 경솔하고 주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위트니스 리 형제도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쉽게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필사적일 수 있으며 자기를 사랑치 않는 형제이다. 그는 자주 '사람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생각해 낸 것과 말한 것을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고, 이 길이 통하지 않으면 가서 다른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필사적이고 어떤 말을 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이러한 형제들을 따라 필사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기를 권한다. 기다리지 말라. 기다릴수록 공허함만 더할 뿐이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4. 08:20

 

인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인도할 자격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훈련을 하고 자기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는 사람에게 주님은 축복하신다.

사역하는 사람의 속에 있는 역량이 밖으로 나오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만일 억지로 과장 할 때는 흘러나오는 것이 적게되며 이러한 상태는 다 주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니다. 속이 풍성할 때는 억지로 하지않아도 무엇이든지 다 흘러나오게 된다. 오직 우리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어야 하며,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형제의 뜻을 듣고 그 안에 있는 성령의 음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사역자들과 장로들은 형제 자매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들에게 말 할 기회를 주고 부드럽게 부서져서 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의 문제가 부서지지 않은 데 있다. 부서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엇이 부서지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부서지고 나면 어떤 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말씀에대해서도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가 잘 안다고 하지 않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잘 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게 된다. 함부로 권위를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도 않게 된다. 또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일에 신중하게 된다. 부서진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더이상 자기를 분석하지 않는다.

집회에서나 교회생활 가운데서 너무 긴장하지 않기를 배우라. 교회의 일에서 "자기 혼자"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일을 형제 자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결정하도록 하라. "자기 혼자" 한 일은 대부분 착오를 낳는다. 형제들에게 맡겨 주고 나눠 주는 것을 배우라.

하나님의 영은 교회 가운데서 억지로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그는 기름부음의 공급을 해주시지 않으므로 성도들은 피로와 권태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영이 강할 때는 10분 내에 그것을 뚫고 청중을 제압할 수 있지만, 영이 약하면 "큰 소리"로 "위협하는 말"을 하고 "많은 시간" 전해도 그것으로 형제자매를 도울 수 없고 오히려 해를 입히게 된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말씀을 전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의 영이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말씀의 내용은 평상시의 생각을 거절하고, 천한 말씨를 거절하고, 유치한 비유를 거절하며, 사람들의 유치함을 지나치게 들먹거리는 것을 버려야 한다.

사역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배우는 것이 적고, 아는 것이 적고, 부서지는 것이 적으면 결정을 옳게 내릴 수 없고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너무 급하게 확신을 갖고 일하지 말고 두려우며 떨며 일을 해야 한다. 절대로 영적인 것을 쉽게 보지 말라. 마음 속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자기의 판단을 믿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니며, 자기가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다 그른 것이 아니다. 겸손을 배우는 데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린다.그러므로 지금은 그렇게 확신 있게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라.

자기의 판단이 정확한 데 이르기 전에 사람들에게 듣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주님이 우리의 몸에서 역사하여 생각이 처리되고, 자신이 부서질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권위를 가질 수 있다. 권위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그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주님의 뜻과 마음이 없을 때에는 권위도 없게 된다. 끝.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3. 22:36

고린도 후서 3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문자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영께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의문 문자는 기록된 구약이다. 그러나 구약은 비록 성경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대할 때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이 성경의 말씀은 의문 문자에 불과하다. 의문 문자의 의미는 전에 한번 성령이 역사한 적이 있는 것을 후에 다시 한번 사용하지만 성령은 만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문 문자이다.

어떠 사람은 일년 삼백육십 오 일 동안 로마서를 읽고서 객관적인 방면의 교리는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성령의 말씀하심과 감동이 하루도 없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의문 문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 일찍 성경을 읽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데 단지 관례대로 하는 것이라면 의문 안으로 떨어진 것이다. 비록 외적으로 영적인 껍질은 있지만 속의 영은 조금도 만지지 못하기 때문에 의문인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자신 안에서 먼저 영적인 느낌을 만져야 한다.

어떤 형제에게 말씀과 영이 있었다면 내가 그 형제의 말을 들을 때도 틀림없이 말씀과 영을 얻어야 한다. 오직 영적인 기관만이 영적인 것들을 실제화할 수 있다.그 형제가 읽은 객관적인 문자에다 영을 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주관적으로 나는 반드시 생각으로 그의 말을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영으로 이 형제가 말한 말씀 배후에 있는 영을 만져야 한다.

어떤 형제가 말씀을 전할 때, 나는 먼저 그의 성경 해석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또 비유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주의하지 않고 다만 나의 영을 사용하여 그의 영을 만진다. 영이 흘러 나왔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한편의 말씀이 사람을 공급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말하는 사람의 영이 흘러 나오는가의 여부에 있으며, 사람의 영을 만졌는가의 여부에 있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크고 조리가 있으며 생각이 좋다고 하더라도 영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문자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 중의 일은 반드시 영이 그 안에 있어야 하며, 단지 일만 잘하고 절차만 옳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홍콩교회가 대북의 봉사하는 방법을 전부 모방하여 그대로 한다 하더라도 영이 없으면 의문일 따름이다. 내가 교회 안에서 수년 간 염려한 것은 주로 죄의 문제가 아니라(물론 죄를 가벼이 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의문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많은 영적인 일이 외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안으로는 영적인 실제가 결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테복음 7장에서 주님은 심판대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주 열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이적을 행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열심으로 일하고 심지어 권위를 사용하여 귀신을 쫓으며 이적을 행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아니라 바로 과연 그 일들이 육체에서 난 것인가 아니면 영에서 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직 영적인 지각을 알고 만진 사람이 한 것만이 영에서 난 것이며 주님께 열납될 수 있다.

(Watchman N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