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9절~21절까지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활은 다섯 방면으로 묘사한다. 1) 다른 사람을 향하여(12:9-10,13,15-16), 2)하나님을 향하여(121:11), 3) 우리 자신을 향하여(12:12), 4) 박해자와 원수를 향하여(12:14, 17-21), 5)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12:17), 이 다섯 방면에서의 합당한 생활은 질이 뛰어나고 탁월한 생활이다. 드려진 몸과 변화된 혼과 불타는 영, 이 세 가지는 모두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는 데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교회생활에 우리의 몸을 드린 후에 우리는 혼 안에 있는 생각에서 나온 의견에 빠지기가 매우 쉬운데, 그 결과 교회생활에서 우리가 손상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특별히 혼의 생각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이 변화된 후에 우리는 쉽게 소극적이거나 잠자는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분발되고 격려받아 교회생활에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향하여 영 안에서 불타야 한다.
교회생활을 위하여 우리의 몸은 드려져야 하고, 우리의 혼은 변화되어야 하고, 우리의 영은 불타야 한다. 우리가 몸으로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나 우리의 생각은 낡은 관념과 사고와 전통으로 가득 차 있다면, 몸으로는 교회에 오지만 매우 골칫덩어리인 생각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몸이 드려지고 생각이 새롭게 된 후에 우리는 영이 불타야 한다. 몸은 교회생활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드려지고, 생각은 혼 안에서의 신진대사의 변화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워지고, 영은 불타야 하는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으면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기도: 우리 몸은 산제물로 드려지고, 우리 혼은 새롭게 변화되고, 우리 영은 불타게 하소서!
로마서 12:2 여러분은 1이 시대를 2본받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은 3생각이 새로워짐으로 4변화되어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5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6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우리 몸을 드린 후에 우리는 생각이 새로워져야 한다.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은 생각을 영에 둔(롬 8:6) 결과이며, 우리 혼이 변화되기 위한 기초이다. 우리 생각은 혼을 주도하는 부분인데, 생각이 새로워지는 만큼 우리의 의지와 감정 또한 자연히 새로워진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새로운 요소가 우리 존재 안에 더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적으로 신진대사적인 변화를 산출하여 우리를 교회생활의 실행인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에 합당하게 만든다. 12장부터 16장까지에 있는 모든 미덕과 승리도 또한 이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란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우리 존재의 각 부분에, 특별히 우리 혼 전체에 확산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내적이고 신진대사적인 과정이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요소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풍성을 우리 존재 안에 가져오시며, 우리의 낡고 타고난 요소는 점점 배출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고후 3:18). 즉 그분의 많은 형제들(롬 8:29)로서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데 합당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의 정점이다. 몸의 생활은 우리 몸을 드리고, 생각이 새로워지고, 앞 장들에 있는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실행한 결과이며 목표이다.
로마서 11:33 오, 하나님의 풍성과 지혜와 지식은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의 길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바울은 마치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기 위한 지도를 우리에게 준 것 같다. 하나님은 세 단계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과 지혜와 지식에 대해 그분께 드리는 찬양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찾아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안배하실 때,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셨다. 이 찬양과 로마서 끝부분인 16장 25절부터 27절까지에 있는 찬양은 근원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전자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성취를 목표로 한다. 후자는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비밀에서 시작하여 그 비밀의 성취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결과는 둘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지혜는 지식보다 더 깊고 더 높다. 지혜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타나고, 지식은 지혜로 시작한 일을 실지로 적용할 때 나타난다. 특별히 여기서 본 대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유일한 창시자이시다. 이 여러 장들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선택을 시작하실 때 사용하신 지혜와 그러한 선택을 수행해 가시는 지식은 우리가 최고로 찬양할 만하다.
기도: 과거 만물은 그분으로부터 나왔고, 현재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장래는 만물이 그분께 돌아갈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11:17 그러나 몇몇 가지들이 꺾어졌고, 야생올리브나무인 그대가 꺾어진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서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면,
접붙이는 것은 유기적인 연결을 산출한다(롬 6:5).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생명을 더 좋은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접붙이는 것은 두 생명을 하나로 연결시켜, 두 생명이 연합된 하나의 생명과 하나의 생활을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호세아 11장 1절을 인용한 마태복음 2장 15절에 있는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라는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참된 이스라엘은 하나의 실체이다. 이방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에 그들은 참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엡 3:8)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 된다. 이방 믿는 이들과 이스라엘은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요 15:1, 5)의 가지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유기체가 되었다. 야생올리브나무인 우리가 참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되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다. 접붙임은 생명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때 우리도 참올리브 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기도: 주님! 참올리브 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우리가 생명의 진액을 받아서 참올리브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제 삼 세대인 에노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이후로 계속되었다.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서, 오순절 날에 처음으로 베드로가 언급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비결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비결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놀라운 비결을 통하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과 그분의 모든 풍성을 누렸다(행 2:21).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성취하시고 도달하시고 획득하신 모든 것에 참여하고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고전1:2). 여기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다 풍성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이러한 풍성하신 주님을 누리며, 결과적으로 주님으로 충만 되어 주님을 표현한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주님을 부르면 즉시 구원을 받는다. 이름은 인격을 가리킨다. 예수는 주님의 이름이고, 그 영은 주님의 인격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영을 받는다.
그대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어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입으로 끊임없이 그분을 불러서 그분을 받아들여 우리의 빈 그릇을 그분의 풍성으로 채워야 한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사람을 향한 것이다. 두 가지 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구속받았지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활 안에 계신 그분의 생명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일, 즉 그분 안에서 행하신 큰 기적을 믿을 때만 우리는 구속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
주 예수님!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로마서10:7 혹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무저갱으로 내려가겠느냐?’라고 하지도 마라.” 이 말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겠다는 뜻입니다.
무저갱은 헬라어로 아비스(abyss)로 이 단어는 누가복음 8장 31절에서 귀신들의 거처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계시록에서는 메뚜기들이 나오는 장소를 가리키는데, 그들의 왕은 아볼루온(적그리스도)이다. 또한 11장 7절과 17장 8절에서는 적그리스도인 짐승이 올라올 장소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20장 1절, 3절에서는 사탄이 천 년 동안 갇혀 있는 장소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구약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에서는 이 단어를 창세기 1장 2절의 ‘깊음(deep)’을 번역하는 데 사용했다. 여기 7절에서는 이 단어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 전에 가셨던 장소를 가리키는데, 사도행전 2장 24절과 27절에 따르면 그 장소는 음부(Hades)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음부로 가셨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용법에 따르면 ‘무저갱(abyss)’이라는 단어는 항상 죽음의 영역과 사탄의 어둠의 세력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곳은 땅 아래 있는 부분이며(엡 4:9),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내려가셨다가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 안에서 올라오신 곳이다. 7절에서 모셔 올리겠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로마서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 우리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하나님의 원수는 이 놀라운 일들에 자극을 받아 온갖 고난과 재난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통과 재난을 넉넉히 이긴다(롬 8:37).
로마서는 처음부터 8장 끝까지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전반부를 다룬다.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이 구원의 근원인 하나님의 사랑, 즉 어떤 사람이나 문제나 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정도까지 구원받았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주영에 의해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루며, 이 구원의 최종 목표에 이르는 정도까지, 즉 비교할 수 없는 신성한 영광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는 정도까지 구원받았다.
기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