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4. 30. 05:00

찬송가 487 - 기묘하신 나의 구주 - shulammite-son - 지방교회 찬송가


찬송가 487 - 기묘하신 나의 구주 - shulammite-son - 지방교회들 찬송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4. 30. 05:00

말씀과각주 298 - 로마서 6장 14절 - 지방교회 말씀


말씀과각주 298 - 로마서 6장 14절 - 지방교회 말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30. 00:13

 

신약성경에서 결혼생활을 말하면서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다루는 몇군데의 구절들에서 몇가지 공통된 원칙들을 발견했는데...남편들보다 아내들이 먼저 언급되고있다는 것과, 사용된 단어가 "순복" 또는 "복종"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아내들이 먼저 언급되었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보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쉽게 악한자의 유혹에 요동하고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종 또는 순복"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subject to"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자녀들과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는 엡6:1과,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다루는 엡6:5에서 언급된 "순종"(obey, be obedient to)이라는 단어와 분명한 구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순복"과 "순종"...이 두개의 비슷한 단어에 대한 합당한 인식이 성공적인 결혼생활 안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열쇠라고 느껴져서, 제가 가지고 있던 영영사전(Macmillan 2002년판으로써 비교적 인정받는 사전임)을 뒤져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각 단어들을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Subject : Under the authority and control of a government, country
*Submission : the action of accepting that someone has defeated you or has power over you
*Obey : to do what a law or person says you must do

다시 쉽게 우리말로 얘기해보자면....
순복(Submission)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마음가짐과 태도의 문제이며, 순종(Obey)은 외적인 행위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들에게 자기남편에게 "순복"할 것을 요구하셨지, "순종" 하라고 한것이 아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않는 남편이 세상적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할 때 아내된 자매들은 남편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순복의 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지않는 남편을 가진 한 자매가 있었는데, 남편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지않는 남편을 구원하기에 합당한가를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주의종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할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보, 당신이 좋아하시는 영화를 제가 함께 보는 것은 제 안에 계신 주님이 매우 불편해하십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영화관까지 모셔다 드린후 당신이 다보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 자매는 남편을 순종하지는 않았지만 순복의 영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도 자매의 남편이 이형제님의 이러한 교통에 도움을 받아 머지않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디도서 2:5과 벧전 3:1에서 우리는 분명한 또하나의 원칙을 볼수 있는데, 자매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지 못한다면, 그 지방교회에서 합당하게 가르쳐진 하나님의 말씀들이 악한자들에게 훼방을 받게 되며, 믿지않은 남편을 결코 얻을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아내된 자매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지식과 언변으로는 남편을 얻을수 없으나, 그 아내의 행위, 즉 남편을 순복하는 태도, 경외하는 태도를 가진 생활방식(The manner of life)에 의하여 얻어질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얻을수 있다가 아니라 얻어질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가족을 얻는 것이 쉽지않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남편을 순복하는 것은 무거운 머리가 몸위에 붙어 있고 많은 것들을 지시하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그 요구에 순종하며 머리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남편된 자들은 아내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요구하거나 이용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머리삼지 않는 남편을 머리삼고 순복한다는 것은 아내에게는 크나큰 고통이며 혹독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내 몸에 붙어있는 머리의 중량이 나에게 느껴진다면 하루라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이켜 볼때 상당기간동안 저도 이러한 잘못된 머리였음을 요즘들어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팔순이 훨씬 넘으신 시아버지과 함께 살고 있는 제 아내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사역안에서 공급되는 건강한 말씀에 의하여 조금씩 제자신이 합당한 남편으로 조정되어가고 있음을 인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끝.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9. 23:49

마태 복음 24-25장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는 다음과 같이 양측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는 최소한 세 가지 사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1) 두 남자 (두 여자)의 사례(마 24:32-44), 2) 두 종류의 노예 사례(마 24:45-51), 3) 열 처녀의 비유 사례 (마25:1-13) 가 그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분들은 이 사례들을 <믿는 이들과  불신자 구도>로 잘못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모든 유형은 모두 다 거듭난 믿는 이들을 가리키며, 불신자와는 무관합니다. 굳이 유형을 분류하자면 <깨어 있는 성도들과 그렇지 못한 성도들> 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신약성경 회복역과 그 각주들은 이 세 가지 사례들 중 소위 ‘깨어있지 못한 성도들’도 여전히 거듭난 믿는 이들임을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1) 땅에 남겨진 두 명도 구원받은 성도임

40 그 때에 두 남자가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 둡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주님께서 어느 날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2절 각주1, 깨어 있도록 >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와 ‘여러분의 주님’은 24장 40절과 41절에 있는 두 남자와 두 여자가 구원받은 믿는 이들이라는 것을 증명 한다. 주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지 않으실 것이며, 또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주인도 아니시다.

 

2) 악한 노예도 구원받은 성도임

48 그러나 그 악한 노예가 마음 속으로 ‘나의 주인이 더디 오실 것이다’ 라고 하며, 49 동료 노예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면, 50 예기치 않은 날, 알아채지 못하는 시각에 그 노예 주인이 와서, 51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48절 각주1, 악한 노예> 이 악한 노예는 구원받은 믿는 이인데, 이것은 (1) 그가 주님께 임명되었고(마24:45), (2) 그가 주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으며, (3) 그가 주님께서 오고 계셨다는 것을 믿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51절 각주 3, 벌을 내릴 것이니> 이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징계를 받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8절 각주 1참조.

 

3) 어리석은 다섯 처녀도 구원받은 성도임

마25:8 어리석은 처녀들이 현명한 처녀들에게 ‘우리의 등불이 꺼져 가니, 여러분의 기름을 좀 주십시오.’라고 하였지만…11 그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열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지만, 12 신랑이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나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8절 각주 1, 꺼져가니> ‘꺼져가니’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등이 켜져 있고 그 안에 기름이 조금 있었지만, 충분한 공급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지만, 온 존재가 적셔질 만큼 그분으로 충만되지 않았던 믿는 이들을 대표한다.

 

<12절 각주 1,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합니다’는 누가복음 13장 25절에서 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승인하지 않습니다’의 의미를 지닌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을 켜고 주님을 만나러 갔으며, 죽고 부활하여 휴거되었지만 성령 충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데는 늦었다. 이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결혼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이 시대적인 보상을 잃어버리지만, 영원한 구원은 잃지 않는다.

 

마태복음 25:1은 천국은 ..와 같으니 라고 말문을 열면서 열 처녀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위 본문에 의하면 비록 거듭났다고 해도 천년 왕국(혼인잔치)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을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나에게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갑니다'(마7:21)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으로도 재차 확증됩니다. 

 

(한국복음서원 발행 회복역신약성경 참조)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9. 21:58


1.천국과 하나님의 왕국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성경의 말씀과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는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남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3장3절과 5절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그영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왕국은 천국이라고 할 수 도 있다. 천국이라는 말은 마태만 사용한 용어인데 마태복음 4장17절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선포하셨고 마가복음에서는 이 상황을 "때가 찾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바꾸어 써도 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두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통치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왕국은 창세전의 영원과거와 열조들과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와 신약의 교회와 다가오는 천년왕국과 영원미래의 새예루살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천국은 하나님의 왕국의 특별한 부분으로서 오늘날의 교회와 오는 천년왕국의 하늘에 속한 부분만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약에서 특히 다른 세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한 부분인 천국은 또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4. 29. 06:00

찬송가 486 - Lord I Love You More And More Each Day - 지방교회 찬송가


찬송가 486 - Lord I Love You More And More Each Day - 지방교회 찬송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8. 22:25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공과는 절대로 방법이나 수완이나 기교나 꾀가 아니다. 총명한 사람,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치를 잘 따질 수 있는 사람 역시 교회를 섬길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슨 일에든지 방법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서진 사람이다. 주님을 섬기는 자의 모든 공과는 다 부서짐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그분의 양무리인 이스라엘 백성을 치리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먼저 그를 사십년간 광야에 두시어 그로 부서짐의 공과를 배우게 하셨다. 그러므로 민수기 12장에 와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함께 그를 훼방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여전히 모세를 위해 그가 온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간증하셨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한무리의 하나님의 백성을 치리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가 배운 유일한 공과는 바로 부서짐이었다. 하나님은 그라는 사람을 부서뜨리셨다.

사십세였을 때 그는 당시 문명 발상지인 애굽에서 학문을 배운 실로 수완있고 재간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수완도 재능도 그 애굽사람을 죽인 주먹도 소용없으며, 애굽사람을 때린 잔인한 방법도 소용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십년 동안 그를 광야에 두시고 그로 다만 하나의 공과 곧 부서짐의 공과를 배우게 하셨다. 어떤 지방에서든지, 어떤 지역집회에서든지 부서진 사람만이 교회를 섬길 수 있고 건축할 수 있다.


랜 세월이 지날 때, 시간은 하나의 시험이다. 당신의 지혜, 당신의 재간, 당신의 수완, 당신의 총명은 모두 시간의 시련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부서진 사람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치리하는 교회는 더욱 실제적인 분량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하는 사람의 공과가 바로 부서짐임을 기억하라. 이치를 따지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고 협상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교회 가운데서 이치를 잘 따지는 사람은 가장 치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가장 교섭을 잘 하는 사람은 가장 교회를 건축할 수 없는 사람이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서진 사람이다.

그가 이치를 따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서졌기에 따지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서졌기 때문에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민수기를 읽을 때 우리는 백이십세가 다 된 모세를 본다. 그는 사십 년간 애굽 왕궁에서 생활했고, 사십 년간 광야에서 목양을 통해 단련되었으며, 또 삼십팔 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매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나 그와 다툴 때마다 그는 끝내 수완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매번 문제가 발생 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이치를 따지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방법도, 논쟁도, 꾀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시게 했다. 그는 실지로 부서진 사람이었다. 형제들이여, 여기에 지혜있고 학문있고 재간있으나 부서진 한 사람을 보라. 교회는 이러한 사람의 손 안에서라야 참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사람의 손 안에서만이 참되게 건축될 수 있다.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더욱 부서질수록 교회는 더욱 건축될 것이다.


(위트니스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8. 16:45

 

(웟치만 니 (Watchman Nee)의 청년시절의 모습)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어머님이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소홀히 여겼다. 때문에 어머님이 두 딸을 낳은 후에야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어머님은 분명한 구원을 받지는 않았지만 주님께 간구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1920년, 십 칠 세 때 구원받았다. 구원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것은 어떻게 죄에서 구출되는가의 문제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또한 나의 종신 사업과 연관되어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동시에 나는 그분을 주로 영접해야 했다. 그분은 나를 죄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건지셔야  했다. 그때 나는 구원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한쪽에 제쳐 놓고 구원만 원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한다면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지 않자니 또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인 것을 보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러한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면으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구주(救主)를 보았다. 한 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주님의 보혈로 나를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음을 보았다. 또 한 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 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애 일생 중에 첫 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세 명이 과거 나의 동급생이었다. 그중 이광희 형제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얼마나 특이하게 행동하는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학생이었는지를 간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면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주 학교 규칙을 어기는 학생이었고, 좋은 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천부적인 총명을 주셔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등을 했으며 나의 작문은 자주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그때 나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기 장래를 위해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내가 겸손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세상으로 나갔다면 아마도 큰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내 동급생들이 이 일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후 네게 많은 새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이전 나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나의 장래는 이미 끝장나고 포기되었다.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주 어려웠다. 이는 내게 많은 사상과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은 그날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구원받음과 부르심 받아 주님을 섬기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내가 부르심 받은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장래를 한 번 정함으로 영원히 정하였다. 나는 나를 구원하심은 한 면에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 한 면에서는 그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은 한 면에서 나로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하셨고, 다른 면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역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전도(傳道)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장할수록 내 눈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요 가장 비천한 일로 보였다. 그 당시 전도사는 대개가 유럽과 미주의 목사들에 의해 고용된 일꾼들로서 목사의 눈치를 살폈으며 매달 월급은 팔 구 불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전도할 뜻이 조금도 없었고 나는 전도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전에 하찮고 비천하게 여겼던 전도의 직무를 택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1936년 10월 18일 공개적으로 교회 안에서 한 간증)

* 웟치만 니(Watchman Nee)에 대한 그의 동역자였던 위트리스 리(Witness Lee)의 간략한 소개

1900년에 중국 본토에 북청 사변이 발생하였고 이 사변에서 유럽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많은 선교사들과 다수의 중국인들이 순교당했다. 사탄의 의도는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핍박은 서방세계에 있는 믿는 이들을 일깨워 그들로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부담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북청사변 후에 전도자들은 복음에 매우 능력이 있었고 그들의 전파는 중국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에게까지 미쳤다. 1920년을 전후로 하여 복음은 많은 학교에까지 깊이 스며들었으며,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국의 많은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주님께 얻어진 바 되었다.

 

이 특출한 학생들 가운데 "니쑤주" (영어 이름은 헨리 니)라는 사람이 바로 "윗치만 니"이다. 니쑤주는 제3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주에 있는 성공회의 삼일 서원(三一書院)에서 공부하였다. 이 서원은 2년제 대학으로서 영어와 중국어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가 주님의 위임을 수행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일으켜진 후, 영어 이름은 "윗치만 니" (Watchman Nee: 파수꾼이라는 뜻임)로, 중국어 이름은 "니토생" (징치는 자의 징 치는 소리를 나타냄)으로 바꾸었다. 그는 새롭게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을 어두운 밤에 일어나 징 소리를 발하는 징치는 자로 여겼다.

 

주님의 풍성한 긍휼과 은혜로 인해 그는 결국 이 시대의 독특한 은사가 되었다. 웟치만 니 형제는 주님이 이 땅에서의 그분의 회복의 움직임을 위해 중국뿐 아니라 온 땅을 위해 그분의 몸에게 주신 사람이다. 끝.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4. 28. 10:01

두 폭의 그림

성경말씀

(히4:10~11)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그의 일을 마치고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의 본을 똑같이 따르다가 넘어지는 사람이 없도록,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두 명의 화가가 서로 ‘안식’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약속했습니다. 첫 번째 화가는 큰 호수를 그렸습니다. 고요한 풍경과 잔잔한 호수의 표면은 거울 같았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이 투명하게 물속에 비춰져 안식의 의미를 표현하는 그림이었습니다. 두 번째 화가는 커다란 폭포를 그렸습니다. 작은 관목 가지들이 폭포의 수면 위를 가리고 있고, 나뭇가지 위에는 물에 젖은 작은 새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새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참다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출처 : 온전케 하는 예화들2, 지방교회 생명 이만나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8. 05:48

 

 

 

 

 

 


    흐린 하늘

 

               생 울 타 리

 

 

 

흐린 하늘은

많은 씨방을 가졌다

물알갱이로 된 씨방들은

가끔 제 부피를 견디지 못한다

기류가 일렁일 때

얇아질대로 얇아진 껍질이

터지곤 한다

산화하는 물방울들

물의 씨앗들

텀벙

물상 안으로 튀며 뛰어든다

사물들은 가슴께가 간지럽다

윤곽들 흐려지며

경계가 무너지며

흐린 하늘이 스며

사물들 모두 물의 씨앗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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