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9. 1. 11.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사데교회 : 죽어있음 - 갓멘에세이 113

사데 교회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서 트몰루스 산 북쪽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 사데에 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클레멘트가 이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고, 2세기경 감독은 멜리톤이었다고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2. 29.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경배는 특별한 장소에서(예루살렘, 영 안에서) - 갓멘에세이 112

요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한 일을 두고 온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아침 부흥 책자 진도에 따라 아침에 경배 장소를 말한 신명기 12장 5절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니까 아무 곳에서나 그분께 경배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2장 전체 말씀을 읽어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반복해서 본인이 선택하신 특정 장소에 가서 그분을 경배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분이 그대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 사는 모든 날 동안 지켜 준행해야 할 율례와 규례는 이러합니다.”(신 1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계십니다.

오직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선택하실 곳인 그분의 처소를 찾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신 12:5).

구약의 실행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자신들이 선택한 곳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 그분의 이름을 두신 곳, 그분의 처소, 그분의 제단이 있는 곳에서 십일조와 제물과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경배해야 했습니다(신 12:5-6).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특정된 것처럼, 경배의 중심지가 유일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경배의 중심지가 유일해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가 지켜지고, 여로보함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람의 선호 때문에 일어나는 분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라고 노래하여, 여호와의 거처 혹은 그분의 이름을 두실 곳이 시온(Zion) 즉 오늘날의 예루살렘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남자)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1년에 세 차례(무교절, 칠칠절, 장막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대다수 견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실행의 흔적은 심지어 신약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발견됩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요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 2:13).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여러분은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4:20).

그렇다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왜 이렇듯 특정 장소로 그분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는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시편 133편 내용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달콤한 하나를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여로보함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를 깨고 분열을 조장하는 쪽에서는 이런 요구가 매우 거북스러웠을 것입니다. 분열의 책임이 예루살렘 외에 경배 장소를 만든 쪽에 있음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의 적용

경배 장소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즉 ‘물리적인 어떤 특정 장소’(예루살렘, 혹은 예배당)에 가는 것에서 영적인 어떤 조건을 충족하는 문제로 바뀐 것은, 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입니다(요 4:19-24). 즉 주 예수님은 그 대화 중에,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데”서 “여러분이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언제 성취되었고, 또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첫째, 그 답변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해야 합니다”(24절)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도들의 경배가 가능하게 된 시점은, 생명 주는 영(고전 15:45)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신 사건(요 3:6)인,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땅에 출현하게 된 그 때부터 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돌아볼 때, 과거에 단지 예배당에 다니고, 머리로만 성경을 읽고(또 설교를 듣고), 내 안에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때, 즉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내 영이 살아난 체험을 하기 전에는 위 말씀이 가리키는 참된 경배는 저와는 무관했습니다. 그러나 영이 거듭난 후인 지금은, 영 안에서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 즉 거듭난 영을 사용하여 그분을 누리고 체험하는 것, 혹은 예배 중에 영을 사용하여 말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또 자주 체험합니다(물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음).

둘째, “왜냐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마 18:20)라는 말씀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엄밀히 말하면 특정 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임재와 하나 된 상태로 모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 혹은 제단 위에서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생명이 거절되는 전제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합니다.

셋째, 참된 신약교회의 모임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한 떡’이 상징하는 것처럼, 주님의 몸의 하나를 전람해야 합니다(고전 10:17). 이것은 주로 1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는 요즘과 달리, 한 떡과 한 잔이 놓인 주님의 상(Lord’s table) 집회가 신약 교회의 모임의 중심이 되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행 20:7, 2:42).

요약하면, 아버지께서 찾고 계시는 “참된 경배자들”(요 4:23)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정 지점을 차지하고 거기서 경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대신에 거듭난 영 안에서 가나안 땅의 실재이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골 1:12, 2:6-7, 엡 3:8)를 삶 속에서 체험하고 누려서 얻은 그 실재를 가지고 와서 하나의 터 위에서 전람하는 사람들의 경배입니다. 이들은 초기 교회에서 그러했듯이, 꼭 단일 모임 장소(예배당)에 다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행 2:46).

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모두 긍휼을 입어 당신이 찾고 계시는 “참된 경배자들”로 발견되게 하옵소서! 자기 소견대로 경배하는 헛된 경배에서 구원받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2. 21.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시몬 베드로 - 갓멘에세이 111

1892년에 간행된 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시집에 수록된 낙엽[落葉]이라는 시에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문구와 함께 시몬이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낙엽’ 혹은 ‘가을’이라는 개념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베드로후서 1장 1절을 읽다가 발견한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라는 말과 함께 놓임으로써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우리와 함께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할당받은 이들에게 편지합니다.

신약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는 ‘시몬 베드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옛 이름인 시몬은 출생으로 말미암은 옛사람을 가리키고, 주님께서 주신 새 이름인 베드로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합해져 있는데, 이것은 옛사람 시몬이 새사람 베드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말씀에서 “시몬 베드로”라는 부분을 소리내어 읽었을 때, 그동안 알아왔던 베드로와 관련된 구절들이 전해주는 명암이 있던 베드로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제 안에 떠올랐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일생(밝은 면) : 베드로의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절대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사람을 얻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성경은 그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변화 산’에 가셨을 때나 겟세마네에 가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 외 2명을 특별히 챙기셨습니다. 그 이후의 베드로의 생생한 활동기록은 다음에서 보듯이 사도행전 전반부(1-12장)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설교하던 장면에서 그는 매우 돋보였습니다(행 2:14-41). 

그 후 그는 “모태로부터 서지 못하게 된 어떤 이”를 벌떡 일어나 걷게 했고, 공회에 붙잡혀가 심문을 당할 때도 당당했고, 거짓말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베드로의 말에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갔으며, 중풍병으로 팔 년 동안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쳤고, 심지어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보자기 환상 사건’이후,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 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던 기존의 실행에 비춰볼 때 파격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헤롯 왕 때에 “네 패의 군인들”(모두 16명)의 감시하에 옥에 갇혀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사건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 이후로는 사도행전이라는 주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대신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행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의 일생(어두운 면) : 그는 자주 덤벙댔습니다.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하다가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빠져들지를 않나, 위 변화 산 위에서는 뜬금없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다가 “아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마 17:5),  타의에 의해 제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모두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라던 그의 맹세는 결국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그대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입니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처참하게 결말이 났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그가 “붙잡고 한쪽으로 가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님을 책망”한 사건은 믿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그의 이러한 무모함과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한편 그는 위선을 행하다가 사역의 ‘후배’일 수도 있는 사도 바울에게 면전에서 책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관련 각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믿음에 있어서 매우 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통에 관해 매우 분명한 이상을 하늘에서 받았고, 앞장서서 그것을 실행했다. 그러나 이방인 믿는 이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떠난 것은 얼마나 약한 것이며 퇴보한 것인가! 그가 사도들 가운데서 인도 직분을 잃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목양:  위에서 살펴본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하나로서 특별한 분깃이 있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공존하는 믿는 이들인 우리 각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부침이 극심했던 베드로가 어떤 계기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아름다운 마감을 하게 된 것인가를 묵상할 때, 주님은 문득 다음 두 가지 사건을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그에 대한 중보기도입니다.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베드로를 요구할 때 주님은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간구하셨고”, “그대가 다시 돌아오거든, 그대의 형제들을 견고하게 하십시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전히 주님을 믿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뒤로 물러나 디베랴 바닷가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를 주님께서 목양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때 주님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도 잡게 해 주셨고(6절), 생선과 떡으로 아침도 차려 주셨고(9, 13절), 여전히 믿고 목양을 부탁하셨습니다(15-17절).

한국 사회는 소위 ‘승자독식’ 사회인 것 같습니다. 한 번 경쟁에서 밀리거나 어떤 일로 실패를 맛본 사람은 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노정에는 위 시몬 베드로처럼 주님의 주권 아래 안배된 성공과 실패가 있으며, 그 자체가 생명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읽은 <부흥의 법칙>이라는 책을 보면, 아가서에는 최소한 여섯 번의 <시작과 과정과 끝과 멈춤(pause)>이 있습니다. 특히 이 ‘멈춤’의 시기에 위 베드로가 맛보았던 주님의 목양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깊이 느낍니다.

오 우리의 혼의 목자이신 주님! 

우리 모두를 목양하여 주사, 우리도 다른 이들을 목양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2. 14.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승리의 브이(V) 자 - 갓멘에세이 110번

1.
승리를 손가락 두개로 브이 자를 만들어 형상화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 내내 주님의 승천을 추구하면서 이 V 자가 제 안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궤적을 이어서 생각해보면 영어로 V 자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은 원래 하늘에 계셨지만 성육신을 통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죽음을 통해 가장 낮은 곳 음부로 가셨다가 땅으로 부활하셨고 이제 가장 높은 삼층천으로 오르셨습니다.

이러한 궤적이야 말로 십자가의 수치를 뒤짚을 만한 승리의 행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하늘에 오르신 후 하시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계시는 것 외에 다음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그분이 신성뿐 아니라 인성에 있어서도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주님(Lord)이시고 또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고 말합니다.

이번 주 내내 예수께서 제 삶 속에서 참된 주님 대접을 받고 계신가 하는 것에 대해서 묵상하고 돌이킴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보좌에 머물며 중보기도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자신을 이 땅에 있는 교회 즉 성도들안에 충만케 하셔서 교회를 하늘로 올리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엡1:22, 23).

이 부분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적지 않은 분들에게는 닫힌 진리입니다. 

즉 성경은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몸을 <승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이라고 말하나이것을 주목하거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이  두 번째 V 자(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도들 안에 채워지심과 그 결과 성도들이 점점 땅에서부터 하늘(하늘들의 영역)로 들려 올려지는 것)를 체험한다면.. 

그 사람은 두 개의 브이 자 즉 V V가 이어져 만들어진 W 즉 승리(Win)의 이기는 자입니다. 

고전 15:47-49도 하늘에서 나오신 그리스도께서 흙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지닌 우리를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만드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브이'(V) 자와 '더뷸류'(VV) 자라는 평범한 영어 알파벳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2. 7. 03:14

지방교회 에세이 - 재산 불리기 - 갓멘에세이 109번

1. 레위기 25장의 희년은 원래 소유지로 돌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소유지'란 이런 저런 이유로 팔아먹었던 자기 명의였던 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희년 개념을 신약에서 적용할 때는 더 이상 '물질적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땅은 무엇인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9. 00:05

지방교회 에세이 -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 갓멘에세이 108번

1. 저는 한 때 기도 많이 (오래)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계기로  기도하는 시간의 많고 적음도 중요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가하는 기도의 내용도 고려해야 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3.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그맛에 삽니다 - 갓멘에세이 107번

1. 벌써 올해 달력도 달랑 한 장만 남게 되었군요. 

이 때쯤 되면 자연스럽게 살아온 한 해를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지난 시간들이 늘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후회스럽지만도 않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16.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할말 안 할말 - 갓멘에세이 106번

오늘 아침에 디도서 일부를 읽었습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도 디도서는 야고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앞뒤를 조금 뒤적여야 찾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오늘 아침에 딤전, 후서 디도서 이렇게 함께 묶어 정리해 두었습니다

(사실 이 셋은 목회서신 이라는 이름으로 한 묶음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바울이 "참된 아들이 된 디도"(딛1:4)라고 했으니 그 역시 디모데처럼 그 당시 그렇게 많은 나이를 먹은 것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8.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관상기도와 생명의 길 - 갓멘에세이 105번

1. 이번 주 중에 어느 전도사 한분이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책을 너무 좋아하고 그쪽 교회 분들과 성경공부를 하기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50대 중후반은 되어 보이는 여자 전도사님인데 지금은 남편과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미국 교회를 나가고 했습니다. 

90년 대 초반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금 사역을 했었답니다. 

워치만니 형제님의 ‘열두 광주리 가득히’를 보고 새벽에 가서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말씀이 너무 좋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곤 했다며 옛날을 회상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1.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성경교사의 도움을 받는 유익, 갓멘에세이 105번

1.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사막길을 여행 중 빌립의 방문을 받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 53:7-8 을 읽던 중이었는데, 빌립이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행8:30-31)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 집회에 가서 다른 이의 공급에 의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