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는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서 트몰루스 산 북쪽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 사데에 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클레멘트가 이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고, 2세기경 감독은 멜리톤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데 교회에 대해,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 죽어 있고”, “너의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넬슨 다비는 (Bible Truth Publishers)에서 이 사데 교회가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훗날 개신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빛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죽어 있는 상태”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지를 알고자 그분을 앙망했습니다. 이 영적 사망의 문제는 꼭 사데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믿는이들 모두가 현재 매 순간 직면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마16:18).
사데에 있는 교회의 전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다(계 3:1).
이 ‘죽음’(사망)을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묵상해 볼 때, 한국어는 다 같은 죽음이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다른 유형의 죽음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이 사망의 문제에 대해서 온전히 빛 비춤 받게 하옵소서!
1) 불신자와 죽음: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하자, 주님은 그에게, “죽은 사람이 자기네의 죽은 사람을 장사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통상적인 죽음의 의미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가 영적으로는 물론 육적으로도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지상 사역 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불신자는 주님 보시기에 죽은 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전파는 단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만이 아니라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내용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 되심까지 포함해야 합니다(롬 5:10).
2) 믿는이와 소극적인 의미의 죽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부름받은 성도가 된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낸 로마서에서 이미 성도가 되었어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즉 그는 로마서 8장에서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6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도 그들의 혼의 일부인 생각을 육체의 일들에 둘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여전히 영적으로 사망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데 교회가 처한 죽음은 이와 같은 상태의 죽음에 해당합니다.
3) 믿는이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죽음 : 아래 성경 말씀은 믿는 이들이 이미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은 위 사례와 달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매우 적극적인 죽음이고 이미 성취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초보적인 교훈에서 떠났다.”(골 2:20),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그 가운데 살 수 있겠습니까?”(롬 6:2),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4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도 믿습니다”(8절),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 여기십시오”(11절),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 3:3).
4) 믿는이가 자신을 능동적으로 죽음에 넘김: 성경은 또한 우리가 위에서처럼 주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믿고, 그러한 영적 사실을 삶 속에 능동적으로 적용하라고 아래와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여러분의 육체의 각 부분을 죽음에 넘기십시오. 곧 음행과 부정과 나쁜 정욕과 악한 욕정, 그리고 탐욕입니다”(골 3:5).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위와 같은 죽음 관련 성경 본문들을 묵상해 볼 때, 사데 교회가 죽어 있다는 말씀은 1) 번 즉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죽음(영적, 육적)과는 무관하지만, 그들이 3) 번과 4) 번의 죽음의 실재를 놓친 결과, 2) 번에 해당하는 영적인 죽음 안에 빠져 있다는 점이 말씀을 통해 명쾌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이러한 영적 사망(죽음)을 이길 수 있을 것인지를 주님께 간절히 구할 때 다음 두 가지가 마음 안에 깊이 남게 되었습니다.
첫째,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옛 존재 안에는 없습니다. 오직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는 … 살아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그분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자신과 깊이 연합할 때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 해석과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지만,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요 5:39-40)는 주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영적으로 사는 가장 쉬운 길은 그분 자신을 말씀으로 ‘먹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각종 떡으로 계시하신 후에,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57절).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이 구절의 ‘먹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이 유기적으로 우리 몸 안에 흡수되도록,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
요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한 일을 두고 온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아침 부흥 책자 진도에 따라 아침에 경배 장소를 말한 신명기 12장 5절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니까 아무 곳에서나 그분께 경배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2장 전체 말씀을 읽어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반복해서 본인이 선택하신 특정 장소에 가서 그분을 경배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분이 그대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 사는 모든 날 동안 지켜 준행해야 할 율례와 규례는 이러합니다.”(신 1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계십니다.
오직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선택하실 곳인 그분의 처소를 찾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신 12:5).
구약의 실행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자신들이 선택한 곳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 그분의 이름을 두신 곳, 그분의 처소, 그분의 제단이 있는 곳에서 십일조와 제물과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경배해야 했습니다(신 12:5-6).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특정된 것처럼, 경배의 중심지가 유일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경배의 중심지가 유일해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가 지켜지고, 여로보함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람의 선호 때문에 일어나는 분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라고 노래하여, 여호와의 거처 혹은 그분의 이름을 두실 곳이 시온(Zion) 즉 오늘날의 예루살렘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남자)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1년에 세 차례(무교절, 칠칠절, 장막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대다수 견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실행의 흔적은 심지어 신약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발견됩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요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 2:13).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여러분은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4:20).
그렇다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왜 이렇듯 특정 장소로 그분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는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것은 시편 133편 내용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달콤한 하나를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여로보함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를 깨고 분열을 조장하는 쪽에서는 이런 요구가 매우 거북스러웠을 것입니다. 분열의 책임이 예루살렘 외에 경배 장소를 만든 쪽에 있음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의 적용
경배 장소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즉 ‘물리적인 어떤 특정 장소’(예루살렘, 혹은 예배당)에 가는 것에서 영적인 어떤 조건을 충족하는 문제로 바뀐 것은, 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입니다(요 4:19-24). 즉 주 예수님은 그 대화 중에,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데”서 “여러분이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언제 성취되었고, 또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첫째, 그 답변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해야 합니다”(24절)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 성도들의 경배가 가능하게 된 시점은, 생명 주는 영(고전 15:45)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신 사건(요 3:6)인,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 땅에 출현하게 된 그 때부터 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돌아볼 때, 과거에 단지 예배당에 다니고, 머리로만 성경을 읽고(또 설교를 듣고), 내 안에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때, 즉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내 영이 살아난 체험을 하기 전에는 위 말씀이 가리키는 참된 경배는 저와는 무관했습니다. 그러나 영이 거듭난 후인 지금은, 영 안에서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 즉 거듭난 영을 사용하여 그분을 누리고 체험하는 것, 혹은 예배 중에 영을 사용하여 말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또 자주 체험합니다(물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음).
둘째, “왜냐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마 18:20)라는 말씀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엄밀히 말하면 특정 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임재와 하나 된 상태로 모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 혹은 제단 위에서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생명이 거절되는 전제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합니다.
셋째, 참된 신약교회의 모임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한 떡’이 상징하는 것처럼, 주님의 몸의 하나를 전람해야 합니다(고전 10:17). 이것은 주로 1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는 요즘과 달리, 한 떡과 한 잔이 놓인 주님의 상(Lord’s table) 집회가 신약 교회의 모임의 중심이 되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행 20:7, 2:42).
요약하면, 아버지께서 찾고 계시는 “참된 경배자들”(요 4:23)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정 지점을 차지하고 거기서 경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대신에 거듭난 영 안에서 가나안 땅의 실재이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골 1:12, 2:6-7, 엡 3:8)를 삶 속에서 체험하고 누려서 얻은 그 실재를 가지고 와서 하나의 터 위에서 전람하는 사람들의 경배입니다. 이들은 초기 교회에서 그러했듯이, 꼭 단일 모임 장소(예배당)에 다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행 2:46).
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모두 긍휼을 입어 당신이 찾고 계시는 “참된 경배자들”로 발견되게 하옵소서! 자기 소견대로 경배하는 헛된 경배에서 구원받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1892년에 간행된 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시집에 수록된 낙엽[落葉]이라는 시에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문구와 함께 시몬이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낙엽’ 혹은 ‘가을’이라는 개념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베드로후서 1장 1절을 읽다가 발견한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라는 말과 함께 놓임으로써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우리와 함께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할당받은 이들에게 편지합니다.
신약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는 ‘시몬 베드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옛 이름인 시몬은 출생으로 말미암은 옛사람을 가리키고, 주님께서 주신 새 이름인 베드로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합해져 있는데, 이것은 옛사람 시몬이 새사람 베드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말씀에서 “시몬 베드로”라는 부분을 소리내어 읽었을 때, 그동안 알아왔던 베드로와 관련된 구절들이 전해주는 명암이 있던 베드로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제 안에 떠올랐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일생(밝은 면) : 베드로의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절대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사람을 얻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성경은 그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변화 산’에 가셨을 때나 겟세마네에 가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 외 2명을 특별히 챙기셨습니다. 그 이후의 베드로의 생생한 활동기록은 다음에서 보듯이 사도행전 전반부(1-12장)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설교하던 장면에서 그는 매우 돋보였습니다(행 2:14-41).
그 후 그는 “모태로부터 서지 못하게 된 어떤 이”를 벌떡 일어나 걷게 했고, 공회에 붙잡혀가 심문을 당할 때도 당당했고, 거짓말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베드로의 말에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갔으며, 중풍병으로 팔 년 동안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쳤고, 심지어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보자기 환상 사건’이후,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 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던 기존의 실행에 비춰볼 때 파격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헤롯 왕 때에 “네 패의 군인들”(모두 16명)의 감시하에 옥에 갇혀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사건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 이후로는 사도행전이라는 주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대신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행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의 일생(어두운 면) : 그는 자주 덤벙댔습니다.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하다가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빠져들지를 않나, 위 변화 산 위에서는 뜬금없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다가 “아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마 17:5), 타의에 의해 제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모두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라던 그의 맹세는 결국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그대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입니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처참하게 결말이 났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그가 “붙잡고 한쪽으로 가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님을 책망”한 사건은 믿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그의 이러한 무모함과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한편 그는 위선을 행하다가 사역의 ‘후배’일 수도 있는 사도 바울에게 면전에서 책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관련 각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믿음에 있어서 매우 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통에 관해 매우 분명한 이상을 하늘에서 받았고, 앞장서서 그것을 실행했다. 그러나 이방인 믿는 이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떠난 것은 얼마나 약한 것이며 퇴보한 것인가! 그가 사도들 가운데서 인도 직분을 잃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목양: 위에서 살펴본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하나로서 특별한 분깃이 있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공존하는 믿는 이들인 우리 각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부침이 극심했던 베드로가 어떤 계기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아름다운 마감을 하게 된 것인가를 묵상할 때, 주님은 문득 다음 두 가지 사건을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그에 대한 중보기도입니다.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베드로를 요구할 때 주님은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간구하셨고”, “그대가 다시 돌아오거든, 그대의 형제들을 견고하게 하십시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전히 주님을 믿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뒤로 물러나 디베랴 바닷가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를 주님께서 목양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때 주님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도 잡게 해 주셨고(6절), 생선과 떡으로 아침도 차려 주셨고(9, 13절), 여전히 믿고 목양을 부탁하셨습니다(15-17절).
한국 사회는 소위 ‘승자독식’ 사회인 것 같습니다. 한 번 경쟁에서 밀리거나 어떤 일로 실패를 맛본 사람은 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노정에는 위 시몬 베드로처럼 주님의 주권 아래 안배된 성공과 실패가 있으며, 그 자체가 생명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읽은 <부흥의 법칙>이라는 책을 보면, 아가서에는 최소한 여섯 번의 <시작과 과정과 끝과 멈춤(pause)>이 있습니다. 특히 이 ‘멈춤’의 시기에 위 베드로가 맛보았던 주님의 목양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깊이 느낍니다.
그러나 이 희년 개념을 신약에서 적용할 때는 더 이상 '물질적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 우리의 유업이라고 한, 우리가 믿을 때 우리 영 안에 모셔 들인 하나님자신 또는 '약속의 성령'(엡1:13)이십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 믿고 주님을 자기 영 안에 모셔 들인 사람들은 혼의 방황을 끝내고 깊은 영 안의 음성에 순종하고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 자기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유업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보다는 '재산(유업) 불리는 것'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체험상 이 유업이 증가하면 희년의 실재가 증가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레드 메첼이라는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순절 배경을 가진 분인데 워치만 니 당시에 상해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왜 자기 주변에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은 그토록 실망스러운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누구에게 섣불리 묻지도 못하고 혼자만 괴로워하다가 1943년 2월에 워치만 니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해답을 얻게되었습니다.
어떤 능력이 아니라 지금 그 영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을 인격으로 삼아 사는 문제를 본 것입니다. (금세기의 선견자 워치만니, 한국복음서원, 153쪽 참조).
이와 다른 경우인데, 영적 서적도 많이 읽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으나 정작 그 삶의 간증은 그렇게 '재산 많은 모습' 또는 '참 희년의 누림' 안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1994년 무렵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전보다 더 많은 영적지식을 가진 그 자체가 '재산을 불린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로부터 '유산 많이 가진 사람'의 넉넉함과 여유가 배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영적 지식 많은 것이 참 유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소위 영적인 은사가 많은 것, 그리고 영적 지식이 많은 자체가 우리가 지금 희년과 관련하여 말하는 그 '소유'는 아닙니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는 읽었지만 그것을 참되게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3. 어느 날 눈이 열려서 보니 제 안에 축적된 유산인 그리스도가 너무나 부족한 것을 보았습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게 했던 그런 것들이 제 존재를 통과한 저의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머릿 속에만 있는 지식인 것을 보고 주님 앞에 낮아지는 체험을 가졌습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그후 '참된 재산 불리기'는 내주하시는 주님자신(골1:27)이 제 안에서 증가되시거나, 성경 본문 말씀 자체가 제 안에서 세력을 얻으시는 것임을 빛가운데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에 큰 도움을 준 말씀은 엡5:26, 눅8:15입니다.
쉽게 말해서 진짜 재산이 불려진 것은 아침에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여 얻은 그 말씀,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이런 저런 환경을 통과할 때 내 자아가 부인되는 체험과 말씀의 요소가 안에서 제 존재 안에서 증가되는 체험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동안 메시지 읽어서 알게 된 지식 자체가 재산 불어난 것인 줄로 착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이 왔을 때 이길 힘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런 메시지는 성경본문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보조도구일 뿐, 결국 그런 도움을 통해 이해된 성경본문을 굳게 붙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역의 메시지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그 구체적인 문맥에 따른 건강한 해석을 제공함으로 제가 자신의 관념을 따라 성경을 읽는 덫에 걸리지 않게 해 주었고, 말씀을 더 깊은 인식을 가지고 먹고 묵상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4.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저의 마음중심을 빼앗지는 못합니다. 오직,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제대로 붙들고 그 안에서 빛과 생명을 얻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다른 것에 시간을 낭비할 만큼 그렇게 많은 날들이 남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침에 그렇게 집중하여 읽고 누리고 외운 말씀을 하루를 살면서 되씹어 먹고 또 그 말씀으로 인하여 환경의 어려움과 유혹을 이기는 삶을 충실히 하루하루 사는 것...
이것이 제가 알고 지금 실행하고 재산 불리는 비법입니다.
밖의 세상만 불경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현실도 점점 더 팍팍 해지고 있어서 '(영적) 재산 불리기'도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실히 고수하는 것이 후회없이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계기로 기도하는 시간의 많고 적음도 중요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가하는 기도의 내용도 고려해야 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기도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고, 기도에 관한 말씀과 신앙 서적도 좀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포함하여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기도인지에 대해서 딱이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와 오늘 아침에 이 문제에 대해서 묵상하던 중 주님이 정리된 그림을 보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2. 지난 주에 본문 묵상과 회복역 각주를 통해 "끊임 없이 기도하십시오"(살전5:17)라는 말씀은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문제임을 보았습니다(엡6:18)
이것은 전구 안에 전류가 계속 흐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려면, 우리에게 강한 영이 필요하고,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함도 보았습니다(롬12:12, 골4:2)
3. 오늘 아침에 다시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눅11:1)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으로 주신 소위 '주기도문'의 다음 네 방면이, 결국 <주님과 교통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풍성을 흡수하고 또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임을 보았습니다.
1) 아버지 이름이 거룩케 되고, 왕국이 임하며, 뜻이 땅에서 이뤄짐(하나님) : 우리가 주님과 교통 안에 머물 때 이뤄임.
2)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자신): 먹는 문제가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할 때가 너무 많으니 이 문제를 기도로 가져가고 믿음으로 살아 교통을 지속시키도록 함.
3) 우리에게 죄 빚진 사람들 용서함으로 우리 죄빚도 용서받기를 구함(관계성): 인간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 지은 것이나 용서 안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끊어지게 하고 결국 기도 생활을 약화시킴.
4) 유혹에 안 빠지고 악한 자에게서 구출되기를 간구함(대적):
오늘 아침 묵상에서 밝아진 것은 위 네 방면이 우리의 매일의 기도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라는 것입니다.
맨 처음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이 유지됨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뒤의 세 가지는 이러한 기도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게 훼방 할수 있는 세 가지 덫(물질, 관계성, 사탄)입니다.
그 어느 방향에서 온 훼방이든지 방해받지 않고, 기도 즉 우리 영 안에서 주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아버지 이름은 거룩히 여겨지고, 왕국은 임하고,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기도할 때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기로 했습니다.
어찌하든 계속 생명 길 안에서 전진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예전에는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공연히 가슴이 시렸습니다.
추스르기 힘든 허무감에 존재의 중심이 삭아내려 휘청거릴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고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의 긍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된 후 그 해 마다 찾아오던 고질병은 진작에 치료가 되었습니다.
늘 제 자리를 도는 듯 했던 인생에 방향성이 생긴 것입니다.
2. 어제는 몇 분 지체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시건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과 어떻게 하는지를 말해주는 성경 두 곳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에베소서 1장 4-5절이고, 또 하나는 같은 책 5장 26절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회복역을 펴서 그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어...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없게.." (엡1:4)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교회를 깨끗이 하여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엡5:26).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택하사 거룩하고 흠이없게 하시기 위해 우릴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해가 저물고 또 시간이 흘러 새 해가 와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일을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말씀 안에 있는 물을 최선을 다해서 우리 존재 안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위 인용문에서 언급된 '거룩하고'는 죄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이 우리 존재 안에서 증가되시는 것입니다. '깨끗이 하여'는 바로 다음 구절의 '점이나 주름이 없는 것' 또는 '흠이 없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해 우리 안에 더해졌던 것이 씻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시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수 있을지를 참으로 알고자 하여 간절히 기도하신 분들에겐 이 몇 마디가 기도 응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속으로 '뭐야 이거, 다 아는 이야기 아냐!'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그냥 ' 말씀'이라고 하지않고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3.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분 앞에 나아가 말씀을 읽고, 먹고, 기도하고, 암기함으로 그 말씀 안에서 나온 물이 우리의 온 존재를 씻어내고 거룩하게 하는 이 한 가지는, 결코 양보할 수도 중단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이요 제 인생의 의미입니다.
1. 이번 주 중에 어느 전도사 한분이 워치만니, 위트니스리 책을 너무 좋아하고 그쪽 교회 분들과 성경공부를 하기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50대 중후반은 되어 보이는 여자 전도사님인데 지금은 남편과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미국 교회를 나가고 했습니다.
90년 대 초반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금 사역을 했었답니다.
워치만니 형제님의 ‘열두 광주리 가득히’를 보고 새벽에 가서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말씀이 너무 좋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곤 했다며 옛날을 회상했습니다.
니 형제님 책에서 은사와 능력은 장난감이라는 말을 읽었지만 그 당시는 수긍이 안 되었었는데...세월이 흐르고 나니 지금은 말이 이해가 된다고...병고치는 기도를 온 힘을 다하여 해주고 병이 나아도 정작 자신의 생명의 성숙에는 별 도움이 안 되더라고...
요즘들어 갈수록 환경이 몰려오고 힘에 부쳐서 최근에는 관상기도를 해야 할 것인지 생각 중이었답니다.
워치만니도 마담기용이나 속생명파 사람들을 언급한 부분이 있던데 관상기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며...그냥 마음과 생각을 비우고 멍하니 있으면 그 안에 마귀와 귀신이 역사할 수 있다.
워치만니는 그런 것을 경계했다.. 기도할 때 말씀이나 찬송가사를 내용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내용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고 유지함이 중요하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성경공부를 하기로 하고 신약성경 회복역을 소개하자 관주가 너무 좋다고...그 자리에서 즉시 한권을 구입했습니다
2.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좋은 환경 기쁜 환경만 있는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이 오면 그 환경을 헤쳐 나갈 생각을 주로 하기 마련인데...
만일 그것뿐이라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환경이 마치파도처럼 밀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가정도 최근에 어떤 환경을 통과하면서 다시금 확증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환경은 반드시 그 뒤에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의 옛사람을 허물고 우리 안에 새사람의 인격을 확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환경이 속히 해결되기만을 기도하지 않고 이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라고 기도하고 자신의 존재를 그분을 향하여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속 존재가 그분의 다루시는 손길을 통해 폭로되고 잘려지며 깊은 죽음을 통과한 후 한 단계 더 전진된 부활 생명을 누리게 될때...큰 산처럼 버티고 있던 환경은 어느새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어지거나..설사 밖의 환경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도 그것이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3. 그분은 창세 전에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없는 존재로 만드사 아들의 영광이 우릴 통해 나타나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엡1:4-5). 우리가 당하는 이런 저런 환경들은 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협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지나가고 또 해결되기를 기도할 수 있으되, 더욱 간절히 그분의 말씀 앞에 나아가 어느 말씀이든 그 말씀과 하나되고 그 말씀 안에서 나오는 씻는 물로 우리 존재를 씻는 일, 또는 그 말씀 안에서 나오는 환한 빛으로 우리의 존재가 폭로되고 처리되는 일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주부터 그 전도사님을 만나면 함께 말씀 앞으로 가서 거룩케 하는 물과 영광의 빛에 의지하여 우리의 옛사람과 자아가 죽음에 넘겨지고 속 존재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더 깊이 맛보는 일을 할까 합니다.
1.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사막길을 여행 중 빌립의 방문을 받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 53:7-8 을 읽던 중이었는데, 빌립이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행8:30-31)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 집회에 가서 다른 이의 공급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경우도 그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냥 나는 성경을 매일 읽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때도 많습니다. 성경의 ‘형성사‘를 쓴 박창환님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같이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5쪽).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성경 지식만으로써는 신자의 생활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되, 때로는 "우리를 지도해 주는" 좀 더 노련한 성경교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가까이 없다면 그런 분들이 쓴 책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2. 어제 오늘 제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필요가 있어서 어제 아침에 몇분 지체들과 함께 시편 45편을 읽었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구절 읽었는데, 예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왕비가 우리고 두 개의 옷이 갖는 의미가 깊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그런지 그 대목은 눈에 쏙 들어오는데 다른 부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PDA 에 있는 영어회복역 각주 도움을 받으며 한번 더 읽자 시편 45편의 골격이 딱 잡히는 희한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즉 시편 45편 1-8은 왕(king)에 대하여 9-15는 왕비(Queen)에 대하여, 16-17은 왕의 아들들(Sons)에 대한 언급을 한다는 간략한 문단 나누기 조언이 그런 도움을 준 것입니다.
더구나 왕은 신약 사복음서에서 계시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왕비는 서신서의 교회를, 왕들은 계시록의 이기는자의 예표라는 설명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시편기자는 1-8절에서 왕을 네 개의 중요 단어로 노래했는데 그것들은 (왕의) 아름다움(2절), 승리(3-5절), 왕국(6-7절), 미덕들(8절)입니다.
3. 위와 같은 기본 이해를 가지고 지체들과 다시 시편 45편을 읽고 1절을 PSRP 했는데 너무나 풍성했습니다.
특히 좀더 공을 들여 읽고 기도하고 외운 구절은 참으로 감칠맛이 났습니다.
"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흐르니, 내가 왕에 관해 노래를 지어 바치겠네.."
오 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 흐르니.. 주여 오늘도 저의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 흐르게 하소서!.
주여 저로 왕에 대하여 더 알게 하소서! 당신을 노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읽고 또 기도하면서 시편은 생명의 책 기도의 책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거기다가 또 시편 45편 관련 교회찬송은 또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에도 1절 만을 되풀이해서 읽고 그것으로 기도했습니다.
"왕후는 오빌의 금을 꾸미고 우편에서/내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들있네/
영광스러운 교회가 왕후요 배필이되/모든 성도여 이 모두 우리의 영화로다(782).
이처럼 그동안 주님이 역사적 교회 안에 믿음의 선진들에게 열어 보여주신 모든 풍성들을 마음을 열고 겸손히 받고, 그것에 더하여 매일 성경말씀을 직접 수고함으로 경작할 때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은 부요하며 견고한 믿음 위에 설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안에는 누구도 독불 장군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