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냥 표면적인 내용이 다가오고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때 이 단계에서는 말씀 자체가 전달하는 것 외에 자신의 관념과 선입관이 덧 칠해져 들어와 본문이 전달하는 내용을 순수하게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을 여러번 천천히 읽다 보면 그 본문의 내용이 말하는 요점이 눈에 들어오고 그것이 의미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그치지 말고 조금 더 전진된 방식으로 성경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라는 시45:2 말씀 중에서 전반부인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만을 깊이 먹었던 저의 체험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저는 우선 "사람이 낳은 아들가운데 왕은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는 새 번역 성경 본문을 통해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아름다움'을 예표한다는 인식이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낳은 아들 중 한 사람'을 노래한 것임으로 개역 본문보다 그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하!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구나...그런데 '아름답다' 라는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선 영어성경이 쓴 단어를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미국 표준역, 킹 제임스 역, 다아비 역, 회복 역이 모두 'beautiful'이 아닌 'fair '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보다 가장 아름답다는 그분의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을 가리킬까 하고 묵상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회복역 관주'를 통해 아가서 5:10-16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도구가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어 더 풍성하게 말씀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케 합니다.
3. 저는 아가서 5장을 펴고 사람인 그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같고, 머리털은 ...눈은...뺨은...입술은...손은...다리는...형상은...입은...
한 단어 한 말씀이 다 주옥같고 풍성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 사랑은 '눈부시게 희고'라는 단어 하나만 제대로 추구하고 누려도 너무나 풍성합니다. '희고 붉다'는 말은 그분이 순수하시고 생명과 능력이 충만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천만인 중에 뛰어난 분이신데..
요 12:32에 의하면 주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12:32에 가면 또 이 구절을 깊이 누릴 수 있는 풍성한 각주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가서 5장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에 관한 각 방면을 그것도 신구약을 넘나 들며 깊이 추구하고 누리려면 하루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저는 <왕이신 그분의 아름다움> 즉 'fair' 라는 한 단어를 파고 들어 누리는 법을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4. 저는 예전에 에베소서를 읽다가 사도 바울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고...글쎄 그리스도가 풍성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측량할 수 없는' 이라는 말 씩이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왜냐하면
제가 그 당시 아는 그리스도는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저의 성경을 읽고 추구하는 방법과 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충대충, 자기 취향따라, 임의로 단정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고..마치 칡뿌리를 입에 넣고 씹긴 씹는데...쓴맛이 날 때쯤 다 먹었다고 퉤~ 하고 뱉어 버리고 또 다른 부분을 찢어 입어 넣고 씹고..버리고 했을 뿐 참된 칡맛을 느낄 때
까지 씹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칡뿌리 맛에 대한 저의 기억은 그저 '쓴 맛' 뿐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진리를 추구할 때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듯 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아침에 아래 베드로전서 1장 10-12절 말씀을 먹으면서, “은혜”라는 단어가 더 새롭게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습니다”(갈2:21).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5:4)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거나,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얻을 은혜에 대하여 예언한 신언자들이 이 구원에 관하여 부지런히 찾고 살펴보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을 미리 증언하신 것이 어느 때 어떠한 시기를 가리키는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신언자들은 자신들이 전파한 이러한 것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
천사들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보기를 갈망합니다.”
위 말씀에는 네 부류가 등장합니다. 즉 구약의 신언자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신약 사도들, 천사들, 그리고 은혜 혹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우리 신약의 믿는 이들입니다.
또한 구약의 신언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살펴본 것”, 신약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 천사들도 자세히 보기를 갈망했던 “이러한 것들”은 다 같은 내용입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거쳐 신약의 믿는 이인 우리에게 도달한 ”여러분이 얻을 은혜” 곧 “이 구원”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통과해야 했고, 천사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신언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는지를 묵상해 볼 때, 우리가 소위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매일 매일 족한 은혜를 누리고 있음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위 본문은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메시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에 관하여, 먼저 구약의 신언자들이 예언했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장차 고난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22편 1절, 6-8,절 12-18절, 이사야 53장 2-10절, 12절, 다니엘서 9장 26절, 스가랴 12장 10절, 13장 6-7절 등에서 묘사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16편8-10절, 22편 21-22절, 118편 22-24절, 110편 1, 4절, 118편 26절, 스가랴 14장4-5절, 시편24편 7-10절, 72편 8-11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신언자들은 위와 같은 내용을 자신들의 입으로 예언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또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신약의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을 뿐”입니다(벧전1:12).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된다는 것”(마16:21)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너무나 엉뚱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며 주님을 책망했고, 세베대의 아내는 곧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께 자신의 두 아들의 출세를 청탁했고, 다른 열 제자는 그런 두 형제에게 분개했습니다.
한편 우리에게 은혜로 오시기까지 거치셔야만 했던 이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문제는 부활 후에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잠시 더 머무시던 때에 아래와 같이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심으로 조금 더 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에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한 것, 곧 모세의 율법과 신언서와 시편에 나에 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생각을 열어 주시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일의 증인들입니다(눅24:44-48).
그 결과 신약의 초기 증인들이었던 사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실재를 체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능력이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즉 생명 주는 영 안에 녹아 있음을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또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신 주 예수님을 우리 존재 안으로 영접하는 것이요, 완전한 구원은 이 은혜가 우리의 영으로부터 혼으로 또 몸으로까지 적셔지고 확대되는 것임을 알기까지는 제게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오,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몸을 내밀고 목을 길게 빼고” “자세히 보기를 갈망”한 그 실재를 우리는 지금 직접 체험하고 누리고 있다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벧전1:5).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매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다만 이 은혜를 얻고 누리는 것뿐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 되신 그분을 버리는 것이요,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렘2:13)!
묵상이 이 대목에 이를 때 제 안에 다음과 같은 찬송가 가사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은혜에 대한 참된 정의는/ 아들 안에 주신 하나님 자신/ 은혜는 어떤 사물 아니요/ 내 분깃 되신 하나님 자신(376) 주님과 함께 죽고 사니/ 내가 할 일이 무엇이랴/ 허공을 치듯 분투 않고/ 새 생명 좇아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364).
오 주 예수님,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던 그 은혜”(딤후1:9)!
어제는 그 동안 사도행전을 쭈욱 읽어 온 터라 19장을 그것도 '소란' 이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은으로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먹고 사는 지방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라고 말함으로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며..." 그 도시를 온통 소란스럽게" 하는 전후 사정을 적은 대목입니다.
우리는 19장 끝부분인 "이렇게 말하고, 그는 그 집회를 해산시켰다" 라는 구절까지 읽었지만 처음엔 마땅히 기도에 도움이 될만한 요절이 잡혀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란의 극치를 이룬 대목들 중 한 곳인 32절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쳐대니,모인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으며, 대부분은 자기들이 무엇때문에 모였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위 구절을 먹을 때 여기서 무슨 빛을 얻겠나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체들과 함께 반복해서 먹을 때 조금씩 만져지는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하며 외쳐 대지만 선악지식이나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 많은 때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고, 모임의 근본 목적을 망각할 때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믿는 이들 간에도 부부 간의 대화에서, 봉사 집회로 모일 때, 심지어 기도하러 모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명의 흐름을 벗어날 때 그 모든 주장들 말들은 다 무엇인가...한참 무엇인가를 고집하며 말하다 보면 깊은속에서 너(너희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음성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입으로는 한 마디 안 해도 생각 속에서 '외쳐대는' 경우도 있고 그 현장에 안 가더라도 그 모임에서 결정된 소식을 듣고 이러니 저러니 '외쳐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침들은...그것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기여하지 않는 것이라면...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면...듣는 사람을 어둠에서 돌이켜 빛가운데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면...
군중심리에 이끌려 몰려나와 이렇게 저렇게 외쳐대나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고 모르는 저 군중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빛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먹되, 그 안에서 생명과 빛(요1:4)과 씻는 물(엡5:26)과 젖(벧전2:2)을 얻기까지 계속 그 말씀 안에 머문다면...내용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먹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손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범주에서는...어떻게든 자꾸 노출되고 대중에게 각인되어야 여러 가지 기회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눈 도장'이라는 말도 생겨 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든 '튀어야 ' 살아 남는다 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인 교회의 범주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교회라고는 하나 세상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런 영역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 자신의 충만인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때 앞서서 봉사를 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은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 무리의 동료들이 비슷한 시기에 교회생활을 시작했는데...지금은 자기 외에 대부분은 어떤 위치에 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소외 되었거나, 자신이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예전에는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서 아무도 관심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 때...그런 외적인 상황이 자신의 내면의 영적 실재를 악화시킬까요...
비록 인간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참기 어려운 기간일 수 있으나 영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저는 며칠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감옥에 갇힌 세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후 결례의식을 행하다 일어난 소동 이후 전개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긴장과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오고, 공회가 열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결사대가 생기고, 밤 9시에 병력이 바울을 호위하여 약 60킬로(150리)를 이동시키고, 유대인들이 변호사를 대동하여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고, 총독이 말씀을 듣고자 하니 바울은 의와 심판을 강론하고
이렇게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여, 더 자주 그를 불러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해가 지난 후에 보르기오 베스도가..."(행24:26-27).
위 구절에서 짧게 언급된 '두 해가 지난 후' 라는 부분이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신약경륜을 수행하던 바울사도에게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낭비요 큰 제약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역 성경은 27절의 각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두 해 동안 사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사도는 이 땅에서의 주님이 움직임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그가 로마에서 상소하는 동안에 썼던 그의 서신들, 즉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가장 비밀하고 깊고 풍성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서신들이 역대로 교회에 가져다 준 공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한 동역자 형제님이 주님을 오랫동안 전 시간으로 섬기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공급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리가 본 이상이 객관적인 현실을 통해 시험받을 때 ...를 잘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꿈을 꾼 후, 그가 직면한 상황 특히 감옥에 갇힌 가운데서도 요셉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는 모습...
특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40:8)의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이와 과련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스리지 못하면 나와서도 어렵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그 다음 요점은 감추인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고...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의 2년 감옥 생활, 요셉의 감옥 생활,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20년 감옥생활은...하나로 엮어져 제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생활은 영광의 때만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지체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잊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따로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기회가 아닌 땅에 묻혀 썩어 자신의 생명의 성숙과 다른 지체들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