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9.05 05:00

창간특집 - (지방)교회를 전격 해부한다.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 존중 받을 가치 있다"

풀러 신학 대학 성명서 (2006. 1월 5일)

  풀러(Fuller) 신학 대학과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과 그 출판 기관인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LSM)는 최근에 지난 2 년 동안 해온 광범위한 대화를 마쳤습니다. 이 기간에 풀러 신학 대학은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에서 출판한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 니의 저서들을 특히 강조하는 지방 교회들의 주요 가르침들과 실행들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취한 이유는, 종종 이들 교회들에 관해 던져지는 여러 가지 많은 질문들과 비난들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고, 또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빛 안에서 이 두 사람이나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 측에서 이 대화에 참여한 분들은 총장이며 기독교 철학 교수인 Richard Mouw 박사와 신학부  학장이며 신학 및  윤리학 교수인 Howard Loewen 박사와 조직 신학 교수인 Veli-matti Karkkainen 박사입니다. 지방 교회들을 대표하여 참여한 분들은 Minoru Chen, Abraham Ho, Dan Towle 씨입니다. LSM을 대표하여 참여한 분들은 Ron Kangas, Benson Phillips, Chris Wilde, Andrew Yu 씨입니다. 

풀러 신학 대학이 내린 결론은, 지방 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풀러 신 학대학이 당면했던 첫 과제 중 하나는, 그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전형적으로 제시했던 지방 교회들의 사역의 모습이 지방 교회들의 사역의 가르침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가를 판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관하여 어떤 단체들 안에 생성된 인식과 그 두 사람의 저서들에서 발견된 사실상의 가르침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은 엄청나게 잘못 대표되었으며, 그 결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특히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로 분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오해되어 왔습니다. 성경과 교회사의 빛 안에서 공정하게 점검해 볼 때, 문제시 되었던 가르침들은 사실상 성경과 역사의 의미심장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종일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인도자들이나 (지방)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거친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우리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이 고수하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들 위에서 이들 교회들이 서 있는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신앙의 기본 교리들에 관한 동의가 분명하게 확립될 수 있다면, 비본질적인 가르침들에 관한 차후의 대화와 토론은 믿는 이들의 교통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출판물들을 읽어 보고 또 풀러 신학 대학 측과 그 교회들과 사역의 대표자들과 다섯 번에 걸쳐 직접 만나는 모임을 갖고 나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삼일성(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 성경, 구원, 교회의 하나와 합일, 그리스도의 몸 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과 간증에 관해서 우리는 그들이 논의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정통(正統)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비록 그들의 신앙 고백이 신조의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신앙 고백은 주요 신조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 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기를 기탄없이 권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진지하고 열려 있고 투명하고 제약이 없는 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풀러 신학 대학 측에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접근했던 몇 가지 주제들은 삼일성(삼위일체), 신성과 인성의 연합, 신화(神化), 양태론(樣態論), ‘지방’ 교회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실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들의 모임 밖에 있는 외부 믿는 이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야들 하나하나에 대해 탐색할 자유를 제한 없이 부여받았습니다. 매 경우에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가진 공공연한 인식이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믿는이들의 믿음과 실행뿐만 아니라 출판된 사실상의 가르침들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우리가 연관되었던 과정과 우리가 내린 전반적인 결론에 대한 전체적인 개관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제공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성명서에 이어서 몇 개월 후에는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주제들과 기타 중요한 주제들을 더 상세하게 다루는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대표자들은 그들에 관한 관심사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들을 요약된 형태로 진술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 측은 이미 상당한 연구와 대화를 거친 다음 그들을 이해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그들의 가르침들에 대한 논평을 제공할 것입니다.  

           작성일: 2006년 1월 5일
    
                                              

출처: http://www.forthetruth.or.kr/booklets16.htm (영어원문 포함)
참고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지방교회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http://local-church.tistory.com/134 (지방교회 - 지방교회란 무엇인가?)
http://local-church.tistory.com/111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http://local-church.tistory.com/137 (
지방교회 탐구 - 1 신앙고백 풀러신학교도 공식 지지)

지방교회의 신앙고백

1. ·우리는 성경을 완전하고 유일한 신성한 계시로 믿으며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한 분이시며 또한 영원히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고 이 셋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분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심을 믿습니다. 그 분은 또한 그 분의 신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처녀의 태 안에 잉태되시고, 땅위에서 참된 인생을 사셨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으며, 사흘 만에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영광 안에 계신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3. 우리는 그 분께서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속히 재림하시어 천년왕국과 영원 안에서 땅을 다스리실 것을 앙망합니다.

4. 우리는 삼위의 세 번째이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존재와 소유하신 모든 것이 아들에 의해 표현되시며 아들의 존재와 소유하신 모든 것이 성령으로 실재화 됩니다.

5. 우리는 더 나아가 인류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영광의 요구를 절대로 이룰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그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셨고 그 분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성령으로 구속된 이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그 분의 구원을 완결하시고 그들로 그 분의 자녀들이 되게 하십니다.

6. 이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이 시대에서는 그 분의 몸 안에서 매일의 구원을, 오는 시대와 영원 안에서는 영원한 구원을 누릴 것입니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그 분의 구원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지방)교회 신앙 항목들에 대한 요약 

(1) 성경에 관하여 
 우리의 신앙의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 (딤후 3:16 상)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아래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 우리는 또한 성경이 완성된 신성한 계시를 담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방면들은 성경에 근거를 두며, 성경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것을 넘어선 사람의 생각을 다 거절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완전한 구원과, 사람을 위한 그분의 계획 혹은 경륜에 관한 그분의 계시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참되고도 객관적인 선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정확성을 믿고, 그 무과실성을 견지한다. 

(2) 하나님에 관하여  
물론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저희의 신앙의 대상이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이시면서 삼일(triune)이심을 믿는다. 비록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는 하나,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딤전 2:5)이시지만 동시에 셋(마 28:19)으로 구별되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분은 영원히 아버지, 아들, 영이시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주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38절에서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이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 아들 또한 계신다. 똑같은 상호내재가 또한 아들과 그 영 사이, 그 영과 아버지 사이에도 존재한다. 삼일성의 셋 가운데서 아버지는 그분의 이름이 내포하는 바와 같이 신성한 삼일성의 근원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이시며, 그 영은 아들의 모든 어떠하심과 아들이 소유하신 모든 것의 실제화이다.
사도 바울은 삼일성의 셋을 믿는 이들의 체험과 관련지어 분명히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신약에 의하면 세 분 모두 - 아버지, 아들, 그 영-가 믿는 이들 안에 계신다(엡 4:6, 요 14:23, 골 1:27, 요 14:17).
참고로 항간에 우리가 양태론을 믿는다는 헛소문이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양태론은 이단이다. 양태론 자들은 신격의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동시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그 셋은 다만 신성한 본질의 일시적인 나타남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서 신격 안의 영원한 구별과 세 위격의 동시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삼일성에 대한 우리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본성을 교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 되신 삼일 하나님을 우리 안에 분배받는 데 있다.

(3)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주 안에서 가장 놀라운 분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호칭되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영원 과거에, 창세 전에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느 날 그분은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이다.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버리지 않고 처녀의 태속에 잉태되어, 아기로 나셔서, 이 땅에서 인생을 사셨고, 대속하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시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망에 매여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흘 후에 부활하셔서 생명주는 영(고전 15:45)이 되셨다. 그분의 신성의 능력이 사망을 삼키시고, 그분의 인성은 부활 하여 영화롭게 되셨다. 오늘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이시자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롬 8:10). 또한 그분은 승천하여 영광 안에 계시며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 여전히 사람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의 구원의 주시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히 2:10, 12:2)이시다.
지금 그분은 하늘에 앉아 그분의 하늘에 속한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고 계신다(행 5:31, 히 8:1-2, 롬 8:34). 우리는 그분이 곧 다시오실 것, 즉 하나님의 왕국을 가져 오셔서 천년왕국에서 온 땅을 통치하실 것(계 1:7, 11:15, 20:6)을 기다린다. 

(4) 성령(The Spirit)에 관하여
 우리는 삼일성의 셋째이신 성령이 동등하게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버지는 신성한 삼일성의 근원이시고, 그 영은 신성한 삼일성의 완결이시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과 아버지의 모든 어떠하심이 아들 안에 체현되었고, 아들의 모든 어떠하심이 그 영으로 실제화 되었다. 이러므로 그분은 실제의 영(요 15:26, 16:13, 요일 5:7)이라 불린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의 실제, 심지어 삼일 하나님의 실제가 성령이시다. 

(5) 인간에 관하여
인간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창1:26, 살전5: 23).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영이 죽고(엡2:1), 혼은 자아가 되고(마16:24), 몸은 육체가 되었음을 가리킨다(롬7: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값없이 의롭게 되고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때 사람은 원래의 창조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롬3:24, 5:10). 그것은 사람의 죽었던 영이 거듭나고(요3:6), 혼이 변화를 받으며(롬12;2, 벧전1:9),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형되어(3;21) 영원토록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분의 권위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6)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 이 완전한 구원은 우리의 온 존재인 영과 혼과 몸을 포함한다.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과, 영광의 무거운 요구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셨고, 우리를 그분과 화목케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구속된 자들을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분의 영 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 모든 사실을 믿고 주님을 영접할 때 거듭나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믿는 이들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매일의 구원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사람의 영은 거듭났고 혼은 변화되고 있으며 몸은 변형될 것이다. 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믿음과, 기도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사람이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견고함 모두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7) 교회에 관하여
그리스도 안의 모든 참된 믿는 이들로 구성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엡1:22-23, 골1:24) 우주적으로 하나이고(엡4:14),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인 지방교회는 지방적으로 하나이다. 즉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가 있다(계1:11).
여기서 말하는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 즉 지방교회의 의미는 예루살렘 교회(행13:1), 안디옥 교회(행13:10), 고린도 교회(고전1:2) 처럼 특정 지방에 거주하는 참되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그 교회 구성원들로 하는 지역교회를 가리킨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는다. 비록 우리가 다른 기독교 교단들과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주님께 신실함으로 우리는 주의 간증을 위하여 교회의 유일한 입장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치를 좁고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영으로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받으셨듯이 모든 믿는 이들을 받는다. 

(8) 종말에 관하여
우리는 장차 이 세상 왕국에 종말이 오고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할 것을 믿는다(계11:15). 우리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얻으시며,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이기는 성도들이 천년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복에 참여할 것을 믿는다.

창간특집 - 지방교회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 존중 받을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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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24 05:00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마태복음 1장 1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 1:14)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많은 분들에게 성육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크리스마스일 것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구주가 나신 날, 공휴일 그리고 선물 주고받는 날...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면 곤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이면에는 더 깊고 비밀스런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점점 더 알아 갈수록 성육신을 통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계획을 더 깊이 감상하며 그분을 경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처녀 마리아와 성령님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으로부터 '온전한 신성'을 처녀 마리아로부터 '완전한 인성'을 취하신 '온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complete God perfect Man)이십니다. 인류역사상 이런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비밀스런 성육신을 통해, 

신학교리도표-웨인하우스

1. 자신이 입으신 육신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모셔와 '신성과 인성의 기묘한 연합'을 이루셨습니다(웨인 하우스, 신학교리도표, 생명의 말씀사, 1995년, 59-62쪽 참조).  

2. '그분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장소인 속죄소(힐라스테리언) (롬 3:25 원문)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 사람'이시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단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1) 예수님은 '진짜육신'이 아니라는 이단(인성부인, 가현설). 

2) 예수님은 사람의 영은 없고 몸과 혼만 사람과 같다는 이단(완전한 인성부인) 

3)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는 이단(신성부인, 여호와의 증인들) 

4) 아들 하나님(2격)만 육신을 입었음으로, 아버지는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안 계신다는 이단 (완전한 신성부인(삼신론) 특히 이러한 유형은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아들과 '분리'되어 하늘 저 멀리에만 계신다고 믿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입니다. 이러한 이단사상은 구원론, 내세론에 가서도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상 많은 희생을 치르고 세워진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아버지, 아들, 성령)의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하시고(coexisting), 서로 안에 계시며(coinherence),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으신다(distinguish not separated)는 것입니다. 

성경도 육신 입은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요 14:10-11, 20, 8:16,29)하심으로 이러한 신학을 뒷받침합니다. 즉 1/3하나님만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 즉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를 입으신 것입니다(골 2:9, 딤전 3:16, KJV). 성경은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안에 계시고, 아버지도 땅위의 아들 안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하늘 보좌에 계신다고 말합니다(요 1:18 동사시제를 주목, 요 14:10, 마 6:9). 우리는 심오한 진리인 삼위일체를 다룰 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무리하게 체계화 할때 이단사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늘 상호 내재하시는 아버지와 성령님과도 서로 안에 계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영(요 11:33), 사람의 혼(마 26:38), 사람의 몸(요 19:34)을 가지신 '완전한 사람' 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고, 성경이 계시하는 정통 기독론입니다. 그분은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려고 보좌로부터 이 땅까지 흘러오신 것입니다(요 10:10, 4:10, 14).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20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1)


1. 저는 여러 체험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비밀들을 사도들에게는 열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만졌습니다(고전2:7-10). '맏아들이신 주님'을 아는 것은 이렇듯 신랑 되신 그분의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제한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신약의 결론 - 그리스도

(골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설명할 때 '측량할 수 없는''(the unsearchable riches)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엡3:8). 그는 또 '그리스도와 교회'가 큰 비밀(a great mystery)이라고 말합니다(엡5:32). 신실한 성경 교사들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710쪽 분량)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400개 이상의 명칭을 신구약에서 찾아내어 각각에 대해 풍성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이 출판한 찬송가 집에는 단 한 장(388장)의 가사에서 주, 생명, 능력, 지혜, 공의, 성결, 구속, 평안, 기쁨, 소망, 안식, 빛과 길 등 그리스도에 대한 70 가지 이상의 방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에 있어 위대한 비밀임으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데 온 일생을 쏟아 부었습니다(엡3:18-19, 빌3:7-14).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안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구주 예수의 사랑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외에도 성경이 보여주는 비밀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방면들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고 사도들도 힘써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어떤 방면들을 말하면,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들의 '교리집 내용'에 없다며 받아들이려 하질 않습니다. 이런 태도들은 '작은 신발에 큰 발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려면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가 배운 교리,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을 성경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높이는 분들은 비밀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춘 분(벧전5:5),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분(고전2:9),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마음 눈이 밝아지길 간구 하는 분(엡1:17-18), 영 안에 있는 분(계1:0)이라야 풍성한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각 방면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비 된 분들에겐 이런 주제에 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큰 진보를 체험케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3)  교파와 주의회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교파에 계시다가 회복된 교회생활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전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밖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방면이 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쉽게 풀리고 "체험되는" 교회생활은 많은 지체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전에는 경험치 못했던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을 가져오는 주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the first-born)(롬8:29), 또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the last Adam became the life-giving Spirit)'(고전15:45) 라는 말씀에 대한 빛과 체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면, '보좌 앞의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이 땅 위의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한 머리요 몸이신 그리스도(행9:4, 엡1:22-23, 골1:18), 믿는 이 안과 보좌 위에 동시에 계시는 그리스도(롬8:10, 34),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인자(요1:51, 창28:12), 이 땅에 보내심 받았으나 여전히 하늘 아버지 품속에 계신 아들(요1:18),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 아들(요3:13절 KJV원문),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요7:39) 등의 난해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런 말씀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는 더 이상 난해구절들이 아니며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체험하는 친근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닮아 갈 원형이신 '맏아들'(롬8:29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빗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매 순간 주의 영을 바라봄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간(고후3:18)에 저 하늘 어디 천당 갈 꿈만 꾸며 헛된 일에 시간낭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라는 시험문제를 받아 놓고도 토끼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수험생은 시험종료 벨이 울리기 전에 빨리 바른 상황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진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 모두를 '맏아들' 또는 '생명 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16 05:00

"삼위일체론은 신학 전반의 초석이 되는 신학의 본질적 원리(principium essendi)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신학도 세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초석이 잘못 놓여졌을 때, 신학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위 내용은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 한국교계 권위자중 한 분인 차영배 박사의 개혁교의학-삼위일체론(총신대 출판부, 1986년) 서문 중 일부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비밀이요, 복잡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가르침들을 분별할 수 있고 또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정통 삼위일체론 :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구별은 되지만, 분리됨 없이, 영원토록 서로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생명 주는 영으로 믿는 사람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더 분배해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고 새 예루살렘을 완결해 가시는 것입니다. 위에 나온 정통 삼위일체론과 다르게 아래 사항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1. 양자론: 혹은 단일신론(Monarchianism) 이단입니다. 아버지 하나님만 인정하고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한 단계 낮게 평가하거나 아예 부인함으로 '하나님이 한분 뿐'이라는 말씀을 지키려는 무리들입니다. 아들 하나님의 여호와 되심을 부인하고, 성령 하나님을 하나의 power로 생각하는 여호와의 증인들(Arianism)이 이 범주에 속한 이단입니다. 

2. 양태론: 혹은 사벨리안주의(Sabelianism, 혹은 Modalistic Monarchianism) 이단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구별된 위격을 부인합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동일본질의 세형태, 세 에네르기가 한 단자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완전히 한 격위(Person), 삼위는 동질일 뿐 아니라 동격이다 등으로 주장했던 이단입니다.  

3. 삼신론: 잠재의식 속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을 구별될 뿐 아니라, 심지어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믿는 이단입니다. 아버지, 성령은 아니고 아들만 성육신 했다, 지상사역시의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셨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각각 한 영으로서 도합 '세 영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전 예장 통합측 사이비이단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개혁교의학-삼위일체론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하나님을 포함한 완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으며(골2:9), 지상 사역시의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시며(요14:10, 20), 하나님을 영으로 표현했지만 세 영들로 말한 곳은 한군데도 없습니다(요4:24). 심지어 최삼경 목사와같은 장로교도인 존 캘빈도 성부는 성자와 함께 동시에 한 성령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및 성자와 다른 신일 수 없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전적으로 계시기 때문에 옛 교부들은 삼위의 본질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용납지 아니했다"(차영배, 전게서, 229쪽)고 성경적으로 말함으로 정통 장로교인들과도 다른 최삼경 목사의 이단성을 선명히 드러내어 주고 있습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09 05:00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에서 보낸 해명서는 다음 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전용복 목사에게 보낸 항의서신입니다.
 

발신인: Daniel Towle 외 2 인,   1997. 9. 20
1330 North Placentia Avenue, Fullerton, CA 92831
Tel : 714-996-8196, Fax : 714-996-8195   

수신인 : 경남 울산 갈릴리 교회 전용복 목사님
Tel : 0522-35-9354, Fax : 0522-35-1191   

제목 : 지방교회에 대한 이단정죄 시정요구 및 토론 제의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지방)교회의 신앙과 실행이 왜곡되어 전달 또는 유포되는 것을 조사하여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전세계 (지방)교회들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자료수집과정에서 확보된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소책자와 원고들을 많은 고려 끝에 정식으로 처리하기로 결의했음을 통보드립니다('지방교회는 이단이 아닌가?' (1989, 진영문화사), '지방교회의 정체'(유사종교연구 합본 제3집, pp. 149-167), '지방교회의 정체'(1990, 교회교육연구원), '지방교회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월간 고신, 1988년 5월호, pp. 48-51).  

교리적인 오해와 왜곡을 다루기 전에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사님은 위 글들의 머리말에서 (지방)교회를 '오대양사건', '짐 존스의 인민사원사건'과 교묘히 연결시켜 마치 (지방)교회가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집단살인극이나 벌이는 단체인 것처럼 매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동일한 머리말에서 목사님은, (지방)교회가 '그 이단성을 교묘히 위장하여 순진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교인들에게 파고 들어오는' 악한 단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목사님은 진영문화사가 발행한 소책자의 결론( 27쪽)에서 '지방교회는 성경을 너무도 잘못 가르치고 파괴하는 이단이다'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요 정식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된 말들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러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목사님이 책임지셔야할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가 다른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단정짓는 두려운 일을 하려면 당연히 충분한 연구와 조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판단기준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리가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글을 검토해 볼 때, 우리는 목사님이 충분한 사실파악이나 판단기준의 공정성도 없이 자신의 단편적인 지식과 목사님의 교단이 지지하는 기준에 근거하여 함부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추후 진리토론시 다루되 간략하게 문제점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우리는 현재 목사님이 다루신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통합측 최 삼경 목사님과 월간 '교회와 신앙'을 통해 공개토론 중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참고하시면서 우리가 지적한 것들을 주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I. 하나님에 대한 교리 (삼위일체, 그리스도, 성령)

(1) 삼위일체 

목사님은 (지방)교회가 양태설을 주장한다고 단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양태설을 주장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태설을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목사님이 인용하신 위트니스 리의 '금등대'의 예에서도 분명히 아버지(금)와 아들(등대)과 그 영(일곱 등잔)의 '구분' 또는 '별개'의 위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목사님 책자에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지적된, '그리스도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말씀 그대로를 인용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성경말씀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상의 내용은 위트니스 리의 저서들에 잘 나타나 있고 (지방)교회 성도들에게는 상식에 속한 내용들입니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편, 35-41 쪽, 281-311 쪽, 진리의 변호와 확증, 9-23 쪽, 49-83 쪽, 월간 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97년 3월호, 97년 7월호). 이러한 성경적이며 정통적인 가르침을 양태설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태설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목사님이 지적하신 내용들은 결코 양태설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건대, 목사님이 사용하신 '삼위의 독립된 위격'이라는 말은 '분리된 삼위'의 의미로 쓰이면 삼신론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삼위일체와 같은 난해한 주제에 

신약의 결론 - 하나님

대한 위트니스 리의 신앙을 판단함에 있어 위트니스 리의 책자에 흩어져있는 내용들을 일부씩 떼어내는 식의 연구로는 부족합니다. 목사님은 이러한 연구를 위해 적어도 위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을 요약한 책인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1991)을 여러번 정독하셨어야 했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신 것과(고전 8:6), 세 구분되는 위격이 계신 것(마 28:19)과, 세 분 모두 영원하시고(사 9:6, 히 1:12, 히 9:14), 상호내재하시며(요 14:10, 20), 동시존재하시는 것(고후 13:13)을 믿습니다. 

(2) 그리스도 

 목사님은 (지방)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하셨을 때 그는 그의 두가지 본성을 혼합해 사람도 하나님도 아닌 존재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사람의 혼합체인 새로운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라고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도 사람도 아닌 존재'라는 말과 '새로운 본성'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말입니다. 따라서 목사님은 위트니스 리가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변호와 확증 - 위트니스 리

만일 이러한 문제가 위트니스 리가 그의 책에서 사용한 '밍글링'(mingling)이란 단어의 오해에서 온 것이라면 우리측이 상세히 반박한 '교회와 신앙' 97년 9월호(pp164-166)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결코 그리스도 안의 양성의 혼합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분(그리스도)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다. 그 분은 완전한 인성 뿐 아니라 온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 분 안의 두 본성은 혼돈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위트니스 리, 진리의 변호와 확증 96 쪽, 1996, 한국복음서원). 이러한 관점은 칼케돈 신조와 정확히 일치되는 정통적인 관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관하여 목사님은 '주님이 인성을 취하실 때 그 인성도 벌써 하나님의 아들의 한 속성이 된 것이며 거룩한 것이 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변화산에서 이미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필요가 있습니까? 또한 '내가 오늘(예수님의 부활시)' 너를 낳았다'(행 13:33)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문맥상 이 말씀이 성육신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3) 성령  

목사님은, '지방교회는 오직 성령의 인도만 강조할 뿐 회의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고 말하며 사도행전 15장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 28절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라고 말합니다. 즉, 외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하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가 없는 회의는 인간의 시기와 다툼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회의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회의는 성령의 임재가 가득하여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말할 수 있는 회의입니다.  

또한 목사님은, '좋은 사람이 되려하거나 여러분의 행위를 개선하려고 하지 말라' 는 말을 오해하셨습니다. 그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인간의 노력 또는 율법의 행위는 주님 앞에서 쓸모 없으며 오직 내적 기름부음 안에 거할 때 주님이 내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일한 페이지에서 위트니스 리는 주님의 역사로 자신이 어머니께 순종하는 사람이 된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인용하신 골로새서의 말씀은, 주님이 만유가 되신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생활을 개선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II. 인간에 대한 교리(신인연합, 삼분설, 죄)

(1) 신인의 혼합, 연합  

목사님이 '혼합'(mingling) '연합'(compounding)이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지적하신 부분은 위트니스 리가 출애굽기 30장의 관유에 포함된 향품에 대해 강해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표론 상 이 구절들에서 '관유'와 '네가지 향품'의 연합을 신성과 인성의 연합(compounding)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밍글링(mingling, 혼합)은 레위기 2장 4절에서 양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소제'(기름과 고운가루)를 만드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성경 용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성경에 연합의 사실은 있으나 혼합된다는 말씀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혼합된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성도의 신격화를 가리키며 이러한 주장은 너무도 참람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사님의 생각처럼 사람이 신격화 된다거나 하나님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영원히 창조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한 사람일 뿐이며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월간 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160-162 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사님은 위트니스 리가 고린도 전서 6장 17절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는 말씀 중에서 이 '한 영'이 '성령인지 사람의 영인지를 말하기 어렵다'고 한 말을 비판하며 이러한 표현이 너무도 참람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이 말씀에서 '한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 밝혀주시고, 왜 이것이 성도의 신격화를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2) 삼분설 

 초대 교회 교부시대로부터 시작된 이분설과 삼분설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각 교단은 좀더 현실적인 사안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목사님은, '삼분설이 헬라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셨으나 사실은 이분설도 헬라철학에서 나온 것이며 이분설이 '인간구조에 대한 통상적인 견해'라고 했으나 사실은 '장로교 신학의 견해'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분설은 루이스 벌콥의 견해요 그의 저서를 대부분 번역하여 자신의 가르침으로 사용하는 박 형룡 박사의 견해입니다. 목사님은 장로교단 외에 수많은 교단에서 삼분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삼분설을 지지하는 수 많은 교부들과 하나님의 종들을 언급할 수 있으나 지면관계로 생략하겠습니다. 또한 영과 혼과 마음의 각 부분들에 대한 가르침도 정확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서 보이는 '영혼'은 원문에 의거해서 '혼' 또는 '영'으로 번역되어야 맞습니다. 헬라어나 영어는 '영'과 '혼'이 각각 다른 단어이며 또한 '영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나 영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목사님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창세기 강해 - 위트니스 리

우리는 목사님이 영지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시는지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는 '물질은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이고, 위트니스 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선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 후 부패되었다'고 주장함에도 목사님은 이것을 영지주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영지주의자도 아니고 인간의 전인적 타락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몸은 육체가 되었고 혼은 부패되었으며 영은 죽었다고 함으로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선명하게 가르칩니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강해 보급판, 한국복음서원, pp. 257-271, 사람의 영, p.47, 월간 교회와 신앙, 97년 9월호 참조).  

(3) 죄 

목사님은, "죄는 사람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타락의 원인측면에서만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Sin) 또는 악이 인격의 형태로 사람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사람들)에 들어왔다(롬 5:12상)'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이 다만 죄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롬 5:10)요 '마귀의 자녀'(요일 3:9)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생명과 본성이 마귀의 자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성경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 밖의 공중에서 역사하는 인격으로서의 사단을 부인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 교회와 신앙 97년 9월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므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 사단을 처리하셨습니다(히 2:14). 이러한 말씀이 목사님 표현처럼 '참으로 괴상한 망언'이라면 목사님은 히브리서 2장 14절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주님이 입으신 육신은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매달은 놋뱀으로 예표되었습니다(요 3:14-15). 이 예표에서 장대는 십자가를, 뱀은 사단을, 놋뱀은 육신을 가졌으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즉 그분은 죄가 없으셨으며 다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 만을 입으신 것입니다(롬 8:3). 이러한 진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곧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쫒겨나리라...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1-33)는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III. 구원에 관한 교리

 목사님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혼합(연합)되지 않았다... 우리 속에 들어와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따라 어떻게 '주와 합(연합)하는 자가 되며(고전 6:17),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며(벧후 1:4),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습니까(갈 4:19)?  

IV. 성경에 관한 교리 

 목사님은 (지방)교회가 예수님을 강조한 나머지 성경을 경시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인용하신 저서의 문맥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트니스 리가 언급한 '낡은 성경적 지식을 따르지 말라... 오직 예수뿐이다' 등의 의미는 '율법의 마침' 또는 '구약의 모든 예표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의미이지 결코 성경을 경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이신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구약의 예표를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실물인 자가 앞에 서 있는데 그 사람의 사진만 붙잡고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사진 자체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있는 각종 원수들은 무엇입니까? 천국에도 믿는 이들의 원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가나안 땅의 풍성한 산물들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을 예표하며 각종 원수들은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우리의 육신과 세상을 상징합니다.  

V. 교회에 대한 교리

(1) 지방교회만 유일한 참 교회라고 주장한다. 

 목사님은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말을 오해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즉, '교회(사람들)'라는 단어와 '집회소(건물)'이라는 단어를 혼돈했기 때문에 '하루에 수천 명씩 회개하는데 과연 한 집회소에서만 모였을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라는 단어는 '부르심 받아 나온 무리들(사람)'이라는 뜻이며, 집회소(건물)는 교회가 모이는 장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집회소는 여러 개일 수 있으나 그 지방에 있는 교회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저런 교파가 일체 없고 오직 그 지방의 명칭을 따른 교회만 있습니다. 거듭난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므로 다만 '예루살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행 8:1). 그 외에도 많은 성경구절들이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진리를 증명합니다(행 13:1, 롬 1:7, 고전 1:2, 엡 1:1, 빌 1:1, 골 1:2). 거듭난 무리들이 어느 교파에 속해 있든지 하나님에겐 그들 모두가 그 지방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교파를 만드는 것은 분열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나누는 것입니다(고전 1:11-13). 바울은 분열을 강하게 책망했으며 이 일에 있어서 어떤 합리화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목사님과 같은 장로교 학자이신 이종성 박사와 '한국장로교회사'를 쓰신 김진복 교수님도 교회의 분열을 개탄스러워 하는 점에서 우리와 동일합니다.  

(2) 모든 조직, 제도, 직분, 규율, 사업을 부인한다. 

(지방)교회는 성경에 있는 모든 직분 곧,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 교사, 장로, 집사 등을 인정하지만 권위주의적인 계급질서를 가져오는 소위 '성직자-평신도 제도'는 주님이 미워하시므로(계 2:6) 우리도 미워합니다.

목사님은 현재 일반 기독교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신학교, 목사고시제도, 교회매매, 권위주의적 목사제도, 총회선거시의 정치 정략 등에 대한 분명한 성경근거를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3) 예배의 모든 형식, 규범을 무시한다.

목사님은, '인도자가 없이 아무나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배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목사님 표현처럼 '제멋대로 말하는' 예배는 성경에 없으나 고린도 전서 14장에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씩 하나씩 말할 수 있고(고전 14:31, 23) 화평의 하나님을 따라 찬송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예언하는 예배는 있습니다. 목사님이 지지하시는 주보 순서에 따른 예배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성경근거는 무엇입니까?

(4) 성례를 규모 없이 함부로 행한다.

성찬을 매주 나누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역자만 말씀과 성례집행을 할 수 있다는 목사님의 주장은 성경의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VI. 종말에 관한 교리

(1) 이기는 자들의 환난 전 휴거

계시록을 합당하게 해석하려면 우선 본문을 100 번 이상 정독한 후 계시록 전체의 조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그 특성상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사건의 시점도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어 볼 때, 개인의 주장은 있으나 성경근거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은 12장의 '사내아이'는 예수님을, '올려간다'는 말은 '부활과 승천'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사내아이'는 이기는 자를,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올려간다'는 말은 '휴거'를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해와 달과 별을 가진, 광야로 도망간 여자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며 둘째, 사내아이가 올려간 직후 하늘에서 사단이 내어 쫒겼으며 셋째, 본문의 말씀은 대 환란이 임박한 시점이므로 주님의 부활과 승천과는 시점 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이기는 자들로서 환난 전에 휴거되어 사단을 쫓아낼 자들입니다.

목사님은, 14장의 14만 4천이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고 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4절에서 그들은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모든 성도들이, 여자로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거나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가거나 입에 거짓말이 없거나 흠이 없는 자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믿는 이들의 징계

목사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잘못해도 결코 징계를 받지 않으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죽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첫째,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징계를 말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성도 중에서도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며, 구원을 얻기는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고 말하는 고린도 전서 3장 15절을 목사님은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또한 형제를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를 생각하라고 경고하는 로마서 14장 10-13절과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고린도 후서 5장 10절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주님을 영접한 후 불태워질 공력만 쌓고, 형제들을 함부로 판단하며, 악을 행한 믿는 이들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문맥에 의하면 한 달란트 받은 자도 '하나님의 종'이므로 구원받은 성도이며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만일 목사님 말씀대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지옥에 간다면 구원받은 사람도 지옥에 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영벌과 멸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VII. 결론

이상에서 간단히 본 바와 같이 목사님은 지방교회의 가르침을 자세히 연구하지도 않으신 채 함부로 이단으로 단정지어 인쇄 배포하심으로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셨습니다. 문서는 그 특성상 일단 인쇄되어 배포되면 내용의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그 효과가 반영구적입니다. 또한 사실에 대한 검증 없이 계속 재인용되어 거짓을 확산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위 책자들과 관련된 이러한 구체적인 피해사례들을 이미 수집하여 보관 중입니다. 우리는 목사님이 저술한 내용으로 인한 피해는 너무 지속적이고 심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주님 안에서 평강 가운데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 사항을 요구합니다;

첫째, 충분한 연구 없이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를 정죄 하는 일을 삼가 해 주십시오.

둘째, 이 편지에서 저희측이 개괄적으로 언급한 항목에 대한 목사님의 의견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셋째, 목사님의 글들로 인해 야기된 심각한 피해에 대한 목사님의 해명서를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 앞으로 보내 주십시오.

넷째, 이미 언급한 주제들에 대해 공개적인 지상토론을 제의합니다. 주제선정과 토론방법 등에 대해서는 목사님이 제안해 주시기 바랍니다(참고로 하나님, 인간, 구원, 성경, 교회, 종말론을 주제로 쌍방 각 6회씩의 원고를 한국 내 기독교 잡지 또는 교계신문에 연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서신에 대한 답장을 발신일로부터 14일 내에 팩스로 보내주시고 원본은 우편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도 진리를 사랑하시고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줄을 믿습니다. 상호간 오해와 갈등을 씻어내고 무엇이 밝은 진리인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저희의 건설적인 제안에 대한 목사님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Daniel Towle 외 2인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08 05:00

장로교 고신측(전용복 목사) 책자에 대한 항의서신 1

장로교 고신 교단은 1991년 전용복 목사의 거짓된 연구결과를 근거로 (지방)교회측을 이단시했습니다. 이에 (지방)교회측은 그것이 너무 근거 없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인내하며 수 년간 대응을 미루어 오다가 그것이 마치 검증된 사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인용되는 것을 보고 '97년 6월에 고신측 총회장에게, 그리고 9월에 전 용복 목사에게 각각 항의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그리고 98년 3월에 전 목사에게 답변을 촉구하는 서한을 재차 발송했습니다. 즉,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면 공개토론에 응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과문을 쓰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고신측의 총회장인 정 순행 목사는 유감을 표명하며 고신 교단 소속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정신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고 (지방)교회에 도전할 의도가 없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보내왔습니다.(다음 글 참조) 그리고 전 용복 목사는 총회장의 해명서로 마무리 짓고 싶고, 만일 토론을 하려면 1년간의 연구기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 토론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은 그러한 서신교환을 모은 것들입니다.이제 주님의 사랑과 빛 앞에서 더 이상 진실이 왜곡되지 않기를 원하고 왜곡되었던 진리를 바로 잡음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발신인 : Daniel Towle 외 2인, 1997. 6. 18
1330 North Placentia Avenue, Fullerton, CA 92831 U.S.A. 
Tel : 714-996-8190, Fax : 714-996-8195    

수신인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장 
참조 : 고신측 유사종교연구위원회 위원장, 간사 김 길배 목사님, 연구위원 전 용복 목사님 서울 서초구 반포동 58-10
전화 : 02-592-0433-4, 팩스: 02-592-5468 

제목: 고신측의 이단결정에 대한 항의 및 공개토론 제의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 저희의 신앙과 실행이 왜곡되게 전달 또는 유포되는 것을 조사하여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전세계 (지방)교회들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귀 교단이 1991년 10월 4일,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선언한 사실에 대해 정식 대응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우선, 우리는 귀 교단에서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결정하고, 발표한 '지방교회에 대한 부당한 이단결정'을 결코 인정하지 않음을 통보합니다. 둘째, 우리는 귀 교단이 이런 거짓된 결정을 공개적으로 철회할 것을 요구합니다. 셋째, 우리는 쟁점이 되는 진리의 각 항목에 대한 공개적인 지상토론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귀 교단의 (지방)교회에 대한 연구 내용을 분석해 본 결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구 내용은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거짓되고 명예훼손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 판단과 결론 도출 과정에서 많은 왜곡과 오해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귀 교단에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임하는 우리의 단호한 입장을 귀측이 인지하시도록 1980년도 초에 (지방)교회와 관련하여 미국에서 있었던 소송사건을 참고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1970년 말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경출판사인 토마스 넬슨사와 미국이단연구협회(SCP)는 사실이 아닌 내용들에 근거하여 (지방)교회의 신앙과 실행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글들을 출판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2-3 년에 걸쳐 그들과 대화하고 자료를 제공하며 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시정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부득이 그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년에 걸친 재판 결과 캘리포니아 고등법윈은, 그들의 글이 거짓이며 (지방)교회의 신앙과 실행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명예훼손임을 판결했습니다. 그러므로 법정은 1985년 6월 26일, SCP와 저자가 119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에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캘리포니아 고등법원 판결문 번호 540 585-9 참조). 또한 토마스 넬슨사는 법원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책(Mindbenders, 마인밴더스)을 미전국의 서점에서 회수하고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주요 일간지에 사과문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1983 년 4월 10일자).  ( 원본 - 영문 클릭 / 한글번역 클릭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간의 문제를 세상법정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귀 교단과 대화하여 이해의 폭을 넓혀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무시되고 방치된다면, 우리는 부득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결방안을 주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 교단이 (지방)교회에 대해 언급한 모든 주제들인 '하나님, 인간, 구원, 성경, 교회' 등에 대해 한국내의 공개된 지면을 통한 진리토론을 제안합니다(예를 들면, 귀 측의 월간지인 '월간 고신', '현대종교' 또는 '교회와 신앙' 등). 참고로, 우리는 현재 장로교 통합 측과 월간 '교회와 신앙'을 통하여 이러한 공개 토론을 진행 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방)교회측은 귀 교단과의 토론에 Daniel Towle과 조 동욱 목회자가 응할 것이며, 귀 측은 고신 계통의 목회자 또는 신학자 가운데 어느 분을 추천하셔도 좋습니다. 1991년도 이단 판정자료 연구자인 전 용복 목사님을 추천하셔도 좋습니다. 또한 토론시 다음의 자료들에서 (지방)교회에 관해 언급된 모든 항목들이 포함되고 검증되기를 희망합니다.  

 1. 유사종교연구집 제3집 149-167쪽(지방교회의 정체), 전 용복 목사
 2 '지방교회는 이단이 아닌가?', 도서출판 : 진영문화사, 1989년, 총27 쪽, 전 용복 목사
 3. '지방교회의 정체', 교회교육연구원, 1990년, 총34쪽, 전 용복 목사(1-3은 동일 내용임) 
 4. 월간 고신, 1988년 5월호, 48-51쪽(지방교회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전 용복 목사
 5. '이단사상연구(지방교회)' 김 요섭외 4인의 연구논문 (지도교수 : 이 환봉), 고신대학 신학과
 6.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Watchman Nee의 사상 비판(지방교회를 중심으로)' 1-156쪽(연구논문), 황 건철 목사 

한 그리스도인 단체가 다른 그리스도인 단체를 함부로 이단으로 매도하고 비판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일이며,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또한 이단판정의 기준과 내용도 마땅히 성경 말씀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쌍방의 진리 중 어느 편이 성경적인지를 모든 그리스도인들 앞에 밝힐 수 있는 기회인 이러한 토론제의를 귀 교단이 적극 수락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한 귀 교단의 답신을 본 서신의 발송일로부터 15일 이내에 팩스로 넣어 주시고 원본은 우편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 안에서, Daniel Towle 외 2인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07 05:00

장로교단 소속 성도님들께

장로교단 소속 성도님들께

그 동안 한국교계를쭈욱 지켜보면서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후,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과 수고로 지금은 약 9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60-70%가 장로교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샤머니즘과 우상과 불신자들로 충만하던 '영적 불모지'였던 이 나라에 이 정도의 복음이 전해진 데는 분명히 장로교인들의 기여도가 큽니다. 주님께 신실했던 장로교인들에게 그 날에 돌아갈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교파 소속 성도들의 수고도 있었지요.  

하나 뿐인 목숨은 누구에게나 다 소중합니다. 그 소중한 목숨을 주님께 바쳐 순교한 주 기철, 손 양원 목사님 등등 수많은 장로교인들의 신앙심을 우리 모두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장로교파 안에는 신학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늘 말씀과 기도 안에서 믿는 자녀들을 키워 낸 수많은 어머니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잠을 떨쳐버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주님의 면전에 나아가 기도하며 찬송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성도들이 계십니다. 교파의 구분을 떠나 이러한 신실한 성도들의 헌신이 한국교회들이 지금까지 간증을 지켜온 뿌리요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다수의 "숫자", 신실한 성도들의 신앙체험, 소위 한국교계를 대표한다는 분들 중에서의 영향력, 크고 작은 행사와 운동에 있어서 '장로교단'의 핵심적인 역할 때문에 "한국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단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한국장로교단"이 "정통교회"를 자처하며 수많은 '사이비 이단'(?)을 만들어 내는 주체의 위치에 서 온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제 깊은 속엔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이 지극히 싫어하시는 '교만'의 자리(벧전5:5)에까지 나아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다 고유의 특징과 한계가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특징입니다(롬12장, 고전12장). 그럼에도 "장로교인들의 신학과 교리와 실행이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단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교만입니다(실제로 장로교단이 이단이라고 하면 한국 교회 내에서 이단이 되는 것이 그 동안의 관례였고, 이단 정죄에 있어 '한기총'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임).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1.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까진 '장로교파'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사는 1세기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이 천주교에 반기를 들고, 다른 노선을 '공식표명'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혹자는 '장로교의 교리'는 그 이전부터 성경에 있어왔다고 항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성경엔 '장로교단(파)'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몸인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한 장로교 소속 학자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이 글을 쓰신 분은 장신대학원 출신의 한국복음신학연구원 학장인 손병호 박사임). 

오늘의 한국 장로교 정치제도 이대로 좋은가?

 "장로교회가 아무리 성서적이고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민주적이어도 장로교회가 모든 교회의 근원이나 근본은 아닌 것이다. 모든 교회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장로교회는 하나의 교파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제로 하는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선재로 하는 교회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교갱협, 오늘의 한국장로교 정치제도 이대로 좋은가, 도서출판 엠마오, 1998, 112-113쪽) 


  2. '교인숫자'로만 따질 일이 아닙니다. 
교인 숫자에 있어서 "한국장로교단"의 상대적 우세는 한국 특유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전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국가인 미국의 경우 1억이 넘는 전체인구 중에서 재미 한인과 순수 미국인을 합친 전체 장로교인 숫자가 400만 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한편 침례교인들은 2천 5백만 명이 넘고, 루터 교인들도 800만 명이 넘습니다. 이런 통계를 볼 때, 장로교인들의 숫자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의 장로교단 자체의 분열 현상, 성도들의 거듭남의 확신 정도 등을 따져가기 시작하면 그 숫자는 얼마나 줄어들 것인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장로교단의 외형적인 숫자가 많기 때문에, '장로교단'이 당연히 세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변하는 "정통교회'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3. 장로교의 신학(캘빈 신학)이 성경의 모든 계시를 다 포함하 고 있지는 않습니다. 
장로교 신학 안에 하나님의 주권, 은혜, 언약, 속죄, 성도의 견인 등 많은 진리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론',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 '요한계시록 강해'(칼빈은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음)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다고 보입니다. 즉 '사람 밖에 계신 하나님'(객관적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을지는 모르나, 사도 바울이 강조한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주관적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한국 장로교인들"에겐 미 개척분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계 내에서 일어난 '이단시비'의 상당부분이 이러한 장로교신학의 한계 때문에 빚어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장로교 신학의 한계 안에서 다른 교단의 신학을 바라볼 때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일치하지 않아서 이단이라면 피차에 다 이단이 되어 온 땅에 이단만 충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불완전한 '장로교 신학'은 이단판별의 절대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절대기준이라면 그 결정이 상황에 따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장로교측의 태도는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한 예로, 저간의 배경에 대해 많은 말이 있긴 하지만, 외견상 조 용기 목사의 신학을 처음에는 '사이비'로 정죄 했다가, 나중엔 오순절신학의 특수성으로 인정하여 '사이비성'을 풀어준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4. '한국장로교단'은 세계 장로교단과 크게 다를 만큼 빗나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순히 장로교단이 아닌 '한국장로교'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한국장로교단'엔 통상 장로교교리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와 실행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한국 고유의 배경(샤머니즘, 기복신앙, 유교적 권위주의...)이 섞인 부분도 있고, 장로교단을 인도하는 분들의 신학적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한국의 토착적인 요소에 독일계통의 신학, 화란 계통의 신학, 미국계통의 신학적 배경이 큰 편차를 보이며 한국 장로교단에 투영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총신대학원 정 일웅 교수가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구조변혁'이란 제목으로 쓴 글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갱신과 성령

"원래 장로교회는 지역을 전제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개 교회를 세우는 '지역중심의 교회제도'(Local Church Style)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교회는 이제 지역교회로서의 성격은 거의 사라진 형편에 처하여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의 제도와 행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치를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다.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세계 장로교회와 그 동질성을 확인하기가 힘들 정도로 바뀌어졌다... 실제로 한국사회에 현존하는 "한국장로교회"는 수십에 이르는 군소 교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회가 분열된 관계에서 서로가 경쟁 아닌 경쟁의 상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파중심의 교회구조는 현재 한국교회가 지닌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오늘에 와서 또 하나 우리 한국 교회 모두의 실제적인 고민은 하나님이 한 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성령도 하나이신 성경적 이해를 따를 때, 지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들로서의 "한국장로교회"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한국교회문제연구소,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령, 1995, 한국로고스연구원, 69,71쪽). 

  5. 장로교단 자체 내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단"시 된 교단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종교 게시판의 글들을 보면, 기장 측이 예장 측을 이단시했고, 기장 출신의 대표적인 목사님들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한 쪽이 '통합교단측'을 이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장로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윤리적, 도덕적인 약점들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6. 타 교단 소속 단체나 개인들이 책자들을 통해 '장로교신학'(캘빈 신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

장로교인들에게 '캘빈신학' 또는 이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신조', '기독교강요'는 성경 다음으로(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성경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교의 신학적 뿌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실제로 예장 합동 측이 '이단'으로 선언한 말씀보존학회는 적어도 두 권의 장로교 신학을 바판하는 책자를 내었습니다. 하나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이재명, 말보회, 1996년, 약 500쪽의 방대한 분량임)이고,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의 바른 이해-칼빈주의는 이단교리이다'입니다. 장로교단과 '말씀보존학회'(침례교단을 배경으로한)가 서로 이단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결교 계통의 비판 책자도 있습니다. 즉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심상용 목사가 쓴 "칼빈주의 예정론, 왜 철회되어야만 하는가?"(말씀의 샘터사, 765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칼빈주의 예정론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칼빈주의 예정론(이에 기초하여 세워 진 장로교)은 교회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있습니다. 물론 캘빈 신학을 비판하는 해외자료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경의 진리이외의 '모든 신학'(장로교신학을 포함)은 다 상대적이며, "절대 기준"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장로교인들(특히 이단 판정을 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듣고 배워 익숙한 신학이 '절대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 교회들 안에서 '장로교단'의 위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기준'이 될 수는 없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한국교계 내에서 볼 수 있는 분열과 정죄와 세상과의 타협과... 이런 것들은 사탄을 기쁘게 하고, 주님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신실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까? 국내 그리스도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인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한국교회들(장로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원하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도 버리셨던 공의의 하나님(마21"23,43)이 '장로교인들'도 제켜 놓을 수 있으시다 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은 '장로교단, 정통교단, 장자교단'에 속했으니 하나님의 심판대 앞(롬14:10)에서도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잠에서 깨어나도록 도와 줘야 합니다(엡5:14). 

  둘째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명"이며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을 수 있는지(빌3;8)를 알려달라고 주님께 간구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속도 중요하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생명'(Zoe)을 살고(빌1:21, 골3:4), 생명(요11:25, 요일5:11-12)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생명공급이 없는 전도, 생명공급 없는 양육과 성경공부(요5:39-40), 생명공급 없는 설교, 생명공급 없는 각종 봉사와 활동이 '나무와 짚과 풀'로 태워질 수 있음(고전3;12)을 우리 모두는 경고 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이 시대에 성령이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도록 서로 격려하고 일깨워야 합니다. 어차피 어둠이 짙었고, 은밀한 죄와 현란한 세상과 고집 센 자아를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붙잡는 '크리스천들'이 있는 한, 모든 믿는 이들이 이 시대에 생명의 성숙에 이르지는 못할 것임을 주님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일곱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계2:7, 11,17, 26, 3:5, 12, 21)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기는 자인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되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넷째로, 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더 낮추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참된 지체들을 향하여 마음을 더 열고, 더 넓혀야 합니다(고후 6:11-13). 하나님이 받으신 지체들은 다 받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롬14:4).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의 시작 때처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범하지 말라(마15:3)는 주님의 경고가 '현재의 한국 장로교단' 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마음을 상한 분이 있으시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기를 바라며...


주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갈망과 탄식의 마음을 조금 만진, 그리스도의 몸의 한 작은 지체 드림.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26 05:00


1976년 10월 11일

Mr. Robert Passantino
Research Associate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Walter R. Martin, Director
Box 500
San Juan Capistrano, CA 92675

친애하는 로버트씨께:

최근에 우리가 가졌던 토론과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제목의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귀하의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대답과 분석에 앞서 우리가 가졌던 세 시간에 걸친 대화에 대해 진술하고자합니다.

다음의 사항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대화를 가졌던 상황은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귀하가 전에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는 것과 귀하가 월터 마틴의 동료 연구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귀하 또한 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제가 어떤 입장에서 글을 쓰는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제 자신에 대하여 조금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장로교 계열의 대학과 드류 신학대학(School of Theology of Drew University)을 졸업했습니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 감리교단에서 사역을 했었고 1958년에 교리적인 이유로 감독교회의 신도(Episcopalina)가 되었고 그 교단에서 성직자 안수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감독교회 성직자 인명부를 찾아보면 제 이름이 교회법에 의거해 스포케인(Spokane) 관구에 거주하는 높은 직위의 목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난 12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t) 신부님의 간증을 통해 저는 1962년에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움직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수 년 동안 소위 “오순절 부흥”(Pentecostal Revival)이라 불리는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1968년 말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긍휼로 말미암아 제 눈이 열려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최근의 움직임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온전히 주의 회복에 드려졌습니다.

이제 귀하의 소책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내가 볼 때 귀하의 소책자는 (1)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고 (2) 개인이나 단체를 평가하는 귀하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3) 이 소책자의 본론은 두 가지 요점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a) 교회에서 가르치는 삼일성의 교리와 (b)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모순들이 그것입니다. (4) 그리고 귀하께서는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했습니다.

귀하께서 편지로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달라고 요청하셨으므로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첫 답변은 욥기 35장 16절 하반절과 38장 2절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말의 주된 용도 중의 하나는 진리를 전달하고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진리와 빛은 지식에 근거합니다. 지식이 없이는 말만 많아지고 어두움의 그림자만 드리울 뿐입니다. 이것이 귀하의 소책자에 대해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그 소책자는 “말을 많이 하고” “이치를 어둡게 합니다.” 진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그 소책자는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괜한 비난이 아닙니다. 귀하의 소책자의 내용 중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 대중들에게 제시되었지만 명백히 거짓말이며 부정확하고 왜곡되었고 비방이며 거짓말인 부분에 대해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그 한 예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위트니스 리와 힌두교를 비교하는 것은 진리와 거리가 멉니다. 귀하께서 실상을 파악할 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귀하께서 우리에 관한 진실을 철저히 아는 것은 귀하 자신과 독자들에 대한 귀하의 의무입니다. 또한 제가 귀하의 글에서 받은 인상을 쓰는 목적이 귀하를 정죄하기 위함도 아니고 우리를 변명하기 위함도 아님을 확실히 하고싶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귀하가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한 실상을 더 명확히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에서입니다.

표지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그림은 누구를 묘사합니까? 위트니스 리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그 그림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까? 조롱이 당신이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입니까? 로버트씨, 귀하는 독자가 이 소책자를 열어보기도 전에 그 표지를 통하여 귀하의 태도를 들어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귀하의 책자를 받았을 때 표지를 보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문제를 조롱하는 형태로 제시해야만 하는 사람은 진실의 대변자로서의 자격에서 한참 미달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소책자 자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책 전체에 걸쳐 모든 왜곡된 것들에 대해 반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거의 단어 하나 하나 마다 반론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구절을 제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한다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를 인용하겠습니다. 먼저 귀하가 말하길:

지방교회는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위트니스 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건너왔고 한때 크리스챤 신비주의자인 워치만 니의 제자였으며 동양에서 이미 몇몇 교회를 시작했었다. 대부분의 지방교회 신도들은 복음주의 교회들로부터 나왔다. 지금 이 집단의 신도 수는 미국 전역과 해외에 걸쳐 수 천명에 이른다. “본부”는 캘리포니아의 아나하임 교회(the Church of Anaheim)에 있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들을 방문하지 않을 때에 아나하임 교회에 참석하며 그곳에서 가르친다.

  1. 교회의 간증은 하나님에 의해 1922년 중국에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통하여 그의 고향인 푸차우(Foochow)에서 세워졌습니다.

  2. 위트니스 리는 20년이 넘도록 워치만 니의 동역자였습니다.

  3. 귀하는 워치만 니를 “크리스찬 신비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웹스터 사전은 “신비주의”에 대해 “신비스러운(occult) 혹은 비밀스러운(esoteric) 종교; 비밀스럽고(mysterious) 불가사의한(enigmatic)”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워치만 니는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대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주요 서점치고 그의 책을 팔지 않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문자그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사역으로부터 도움을 얻고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수식어를 그에게 사용했습니다.

  4. 저는 지방교회의 대부분의 지체들이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나왔는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저의 경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그들이 일단 지방교회에 있으면 복음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제 이해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나하임 교회(the church in Anaheim)와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이 함께 출판한 “간단한 소개(A Simple Presentation)”라는 책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1. 우리는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가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완전하고 신성한 계시인 것을 믿는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등하게 존재함을 믿는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속주와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성육신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믿는다.

    4. 우리는 참 사람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삼십 삼 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사셨음을 믿는다.

    5.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

    6.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기 위해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믿는다.

    7. 우리는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셨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만유의 주로 삼으셨음을 믿는다.

    8.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분의 택하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몸 안으로 침례 받게 하셨음을 믿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운행하시면서 죄인들을 회개케 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거듭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들 안에 거하면서 생명을 자라게 하고 그분 자신의 충만한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을 믿는다.

    9.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체들을 맞이하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얻으시며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10. 우리는 이기는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복에 참예할 것을 믿는다.

  5. “본부”는 귀하의 용어입니다. 그것은 귀하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본부”나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말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6. 귀하는 “아나하임의 교회(the Chruch of Anaheim)”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귀하에게는 작은 문제일지 모르나 우리는 결코 어떤 도시의 교회(the church of any city)라고 하지 않고 대신 아나하임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Anaheim)나 시애틀에 있는 교회(the churc in Seattle)라고 합니다. 이것은 귀하의 책자에서 아주 많이 발견되는 부정확성의 한 예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의(of)”라는 단어에는 14가지 의미가 있고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근원” 혹은 “유래”입니다. 이 의미에 따르면 교회가 아나하임“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거나 교회의 근원이나 유래가 아나하임이라는 것입니다. “~안에(in)”라는 단어는 특별히 “경계가 있는 장소의 안쪽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범위의 면에서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이것이 바로 헌팅턴비취(Huntington Beach)에 있는 교회나 아나하임에 있는 교회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교회의 근원과 유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교회의 위치와 경계, 범위는 도시에 따른 것입니다 (계 1:11).

귀하는 “교파건 이단이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집단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라고 했습니다.

  1. 멜로디랜드 신학교(Melodyland School of Theology)의 총장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오순절의 실제(The Penteostal Reality)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다음 인용은 100-101쪽에 있는 6장 “거룩한 삼일성”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제 논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신조(信條)와 교리의 진상을 살펴서 성경 말씀 자체로 되돌아가려고 해왔다...그러나 사실상 성경에는 삼일성의 교리가 없다. “삼일성”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안에 삼일성”이라는 말도 찾아볼 수 없으며 구원받기 위해 이것을 믿을 필요성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교리를 위한 원 재료(raw materials)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많이 언급하고있는 한편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교리(삼위일체 신학을 함축)의 재료로서의 성경의 기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삼일성 혹은 삼일로 믿는 것이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사람들을 사색하게 하고 추상적으로 이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붙잡아야할 교리나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살아야할 삶의 문제이다.

  2. “교파 혹은 이단”이란 단어들은 교회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교파는 분열이고 이단은 믿음이나 실행에 있어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분열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우리의 입장은 교회의 입장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입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교리”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위한 기본적 자격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지만 사람이 거듭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하고(엡 5:17)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합니다”(골1:9). 더 나아가 로마서 12장 1-2절은 사람이 그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그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은 합당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사람의 생각은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입장이 있고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합당한 환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엡5:17) 위치와 상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단순히 합당한 교리, 심지어는 하나님에 관한 합당한 교리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2. 위트니스 리의 ‘생명의 체험’이라는 제목의 책 159-165쪽을 인용하겠습니다.

생명의 체험

사실상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직업이나 결혼과 같은 사소한 일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다. 그들은 이 구절을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작아 보이게 하고 과소평가한다. 우리가 신중한 태도로 신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뜻을 연구한다면 이것이 위대하고 고원(高遠)한 문제를 지적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장 17절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평범한 구절 같아 보이지만 에베소서의 문맥은 이 구절의 심오함을 드러낸다. 에베소서는 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책이다. 이 서신의 많은 단어와 원칙들이 하나님과 영원에 대해 말하고있다. 그러므로 거기서 언급된 하나님의 뜻은 단지 평범하고 하찮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에베소서 5장은 앞의 장들에 기초를 두고있다. 1장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말하고(9절) 3장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을 말하고있다(11절). 이 구절은 모두 매우 위대한 것들을 언급한다. 그 다음 5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앞에 언급된 위대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언급된 다른 구절들인 골로새서 1장 9절, 로마서 12장 1-5절, 히브리서 10장 7절과 히브리서 13장 20-21절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여 우리에게도달하는데 영원에서 현재로, 하늘에서 땅으로 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뜻은 대단히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과거의 관념과 얼마나 다른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의 관념을 바꿔주시기를 기도한다.

위트니스 리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정말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고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계획의 성취라는 세 가지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분의 아들의 비밀스러운 신부가 될 단체적인 사람을 갈망하신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지방에서 무엇을 하시는 지도 알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만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의 직업으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업을 할 때나 가르칠 때나 무엇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한다. 우리의 온 삶과 활동은 모두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만질 수 있는 입장과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의 모든 일들에 대한 그분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분명해질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갈망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여기에 제시된 것처럼 깊고 철저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귀하는 “거룩한 삼일성에 대하여 지방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교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삼위 양식론(양태론, monarchianistic modalism)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의 가르침의 결과 주후 3세기에 생겨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양태론”은 서머나에서 노에투스(Noetus)라는 사람에 의해 2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전개되었습니다. 3세기에 사벨리우스가 이를 취하여 가르쳤는데 그 이래로 그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 것입니다.

  2. 교회가 가르친 교리는 “양태론”이 아닙니다. 양태론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연속되는 상태 즉 처음엔 아버지, 두 번째는 아들, 마지막으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태론적 관념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양태론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이 쓴 “성경의 빛 비춤으로 드러나고 반박된 거짓 비방”이라는 소책자에 매우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성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성경은 마태복음 3장 16, 17절에서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4장 16, 17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시에 존재함을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공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도 분명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에베소서 3장 14-1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믿는 우리는 따라서 우리를 양태론과 연결시키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거부합니다.

우리는 또한 귀하가 인용한 어거스틴(Augustine)의 글에 반영되어 있는 삼신론(trithesism)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거부합니다.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세 분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의하면 주는 영입니다. 멜로디랜드 신학교 총장은 그의 책 ‘성령의 시대’의 10-11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다...주는 또한 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 분인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tri)-일(unus)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분이며 영원히 세분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위트니스 리의 책 ‘삼일 하나님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29쪽에 매우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일 하나님은 한 분 안의 세 분(three-in-one)인 방면과 세 분 안의 한 분(one-in-three)인 방면이 있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으로 그분은 “나”이시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으로 그분은 “우리”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의 방면으로부터 “말씀은 하나님”이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한 분 안에 계신 세분의 방면으로 “주는 영이시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주의 영”(고후3:17)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분의 방면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고(요10:30, 14:7-11),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고(요1:1, 2) 아들은 아버지와 영광을 나누고(요17:5)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이고(요17:24)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요17:11, 21, 22)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한다(요14:23).

귀하는 귀하가 “경륜적인” 삼일성이라 부르는 것을 “내재적인” 삼일성과 비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이 내재적으로 삼일이심을 믿지 않는 것처럼 암시했습니다. 

하나님의경륜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시며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일하나님이 우리에게 체험적이고 경륜적이 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교리적으로 삼일성을 믿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단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 17쪽에서 위트니스 리는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체험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영 안에 있으며 영은 하나님의 전달로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항상 전달하고 있다. [할렐루야]

귀하는 “만일 삼일성 교리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월터 마틴의 정의-가 옳다면 양태론자들에게 몇몇 문제점들이 발생할 것이다. 어느 집단이 가르치는 양태론이든 그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나 약점은 신격을 구성하는 분들의 “주객관계(subject-object relationship)”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방)교회 안의 우리는 양태론자가 아니므로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하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주객관계”와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조잡한 범주를 적용하는지 의아합니다. 그런 관념을 어디에서 취하셨습니까? 그러한 관념을 어느 철학책이나 심리학책에서 발굴해 하나님의 말씀에다 강제로 적용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속박함으로써 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며 아무런 방해 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관념을 하나님의 말씀에 강요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간섭이 없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저는 듣기 원합니다.

[귀하는 말하길]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양태론자에 대해 몇몇 질문들이 생겨난다. 예수님이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는가?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냈는가? 예수의 침례 때는 예수가 성령의 나타나심을 흉내낸 것인가? 누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말했는가? 아버지가 “그를 들으라”고 했을 때 아들은 어디 있었는가? 아들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어디 있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렸던 위대한 기도인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는 거짓이란 말인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뜻에 양보했던 것은 환상인가? 다시 말하면 양태론자에게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더 이상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안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히 말하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제가 믿기로는 우리가 귀하보다도 더 성경을 믿습니다.

  1.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2.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 있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3. 예수의 침례당시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의 모양으로 아들 위에 내려왔고(마 3:16)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4. 아버지가 “저를 들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들은 변형산에 계셨고 아버지는 구름으로부터 말씀하셨습니다(마 17:5).

  5.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습니다.

  6.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눅 23:34)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입니다. 그 말들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의미합니다. 그 기도는 그분의 살인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7.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는 환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들로서 그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 대해 잘못 전함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성경말씀 그대로를 믿습니다.

지금까지 귀하가 인용하신 구절들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귀하는 우리의 글들 중에서 귀하의 비난을 지지할 만한 어떠한 것도 인용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귀하의 소책자를 읽는 정직한 독자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귀하의 말을 받아들일 만큼 잘 속는 사람들이 아닐 것입니다. 귀하가 몇몇 문장들을 인용했을 때 귀하는 서로 다른 두 책에서 짧은 네 개의 인용문을 맥락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인용했습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가 특별히 삼일하나님을 주제로 하여 쓴 책은 무시한 채 문제의 한 면에만 치중하여 참고자료을 인용했습니다. 네 인용문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물의 결코 마르지 않는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셨다.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곳에서(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그분자신을 나타내려고 오셨을 때 그분은 아들이다. 우리는 주님이 아들이고 그분이 또한 아버지임을 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이 영이시라는 것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주 그리스도가 영이시라는 것에 분명해야한다.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표현으로서 그분은 아들이다. 전달로서 그분은 영이시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표현이고 그 영은 전달, 교통이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다.

위의 모든 설명은 하나님의 한분 안의 세분으로서의 방면입니다. 왜 귀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또한 세분 안의 한분이심을 믿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은 인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위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 6쪽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 8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한 면으로는 “내가”라고 하셨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우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내가” “우리”이며 “우리가” “나”임을 증명한다. “나” 와 “우리”는 동일하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복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나”라고 하실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단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우리”라고 하실 것이다. 이것은 비밀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더욱이 창세기 1장 26절과 3장 22절과 11장 7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말씀 안에서 많은 경우 그분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정 이해하기 힘든 비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신격의 세 인격-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의 한 부분을 독립적으로 인용하여 제시하며 귀하는 그가 말한 것과 힌두교를 동일시했습니다. 로버트씨, 이 시점에서 저는 귀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이 살아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귀하가 교회와 힌두교를 동일시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방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힌두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교회의 삼일성을 힌두교의 삼일성에 대조한다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신격이 세 개의 주요 방면 또는 양태인 창조적, 보존적, 파괴적 방면으로 축약된다. 창조적인 방면으로는 브라마(Brahma)로 나타나며 보존적일 방면으로는 비쉬누(Vishnu)로 나타나고 파뢰자로서는 쉬바(Shiva)로 나타난다. 이 세 신격이 힌두의 삼일성을 조성한다.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복음주의적이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힌두교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악한 중상 모략입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귀하가 “모순”라고 말한 부분인 귀하의 소책자의 두 번째 주요 부분을 봅시다.

지방교회에 대한 두 번째 주제로서 우리 필진은 지방교회 운동의 창시자이자 우두머리인 이 선생의 가르침 안에 있는 모순들에 대한 자료가 필요함을 느꼈다. 

지방교회가 교회 소유의 출판사인 리빙스트림을 통해 출판했던 서적들을 조사하면서 우리는 이 선생의 많은 교리 중에서 어떤 것이 정확하게 이 선생을 대표하는지 찾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어떤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와 반대되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이 선생과 지방교회에 대해 공평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 그대로, 모순이 전부인 그대로를 정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경은 야고보서에서...“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자로다”라고 말한다(1:8).

로버트씨, 많은 문제가 귀하가 강조점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의 한 면이 강조될 때 말하여진 것이 그 일의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면이 강조될 때는 그것이 주된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가 강조될 때는 우리가 찬미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찬미가 강조될 때는 우리가 기도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건물의 앞면을 보여줄 때 귀하는 어떤 특정한 특징들을 지적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마치 귀하가 다른 세 면에도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의 뒷면을 설명할 때는 앞면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뒷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좋은 예가 성경에 있는 표면적 모순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향해 열려있던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문제의 다른 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강조는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은 종교의 어두움 가운데서 그의 시각을 되찾게 된 소경에 관하여 말합니다. 눈먼 종교적인 자들은 눈을 뜨게된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 고집 세고 눈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강조의 문제를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성경이나 위트니스 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출판은 일(사역)의 방면으로 행해집니다. “교회”와 “일”의(행 13:1-2) 성경적인 차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워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이란 책을 읽으면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해질 것입니다.

귀하는 우리가 실행하는 기도로 말씀 읽기가 성경과 모순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이 선생의 가르침은 종종 성경과 모순된다. 하나님에 대한 것 외에 다른 가르침들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주님과의 시간’이란 책 10-11쪽에서 이 선생은 “단지 말씀을 기도로 읽어라.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기도해라...성경의 어떤 장 어느 줄 어느 단어를 펴서 그 부분의 말씀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 방식과 리빙스트림에서 출판한 “기도로 말씀 읽기”를 따라서 “기도로 말씀 읽기”를 해보자. 누가복음 23장 21절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를 기도로 읽어보자. 이 구절을 기도로 읽는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예수님! 못박으소서! 할렐루야! 못박으로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인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에 “아멘”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6장 7절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한다.

이 비판에 대하여 세 가지를 언급하겠습니다.

  1. 위트니스 리의 인용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어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기도로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어떤 장이나 줄이나 단어를 펴고 그 부분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귀하는 누가복음 23장 21절 말씀을 기도로 읽는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우리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호흡, 헬라어 참조)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이라”를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호흡이라면 우리가 들이마쉬기 위함입니다. “네, 주님.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3. 귀하는 이것이 의미 없는 반복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반복은 중언 부언이지만 어떤 것은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은 심히 필요합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또 다른 모순으로 보이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해 이 선생은 (‘주님 만지는 간단한 길,’ 3-4쪽)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문이 닫혀있는 곳에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분이 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 닫힌 방 안에 들어가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성경은 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불멸의 영적 몸으로 들어갔다고 가르친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했다....하나님의 경륜 47쪽에서 이 선생은 반대로 말하고있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밤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오셨다. 모든 문이 닫혀있었지만 그분은 육체로 들어오시고 제자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단지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b)”라는 구절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것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4장 39절 역시 명백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두 문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위트니스 리가 둘 모두 참되다고 했을 때 그는 단지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가 성경과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모순을 찾습니다. 

성경과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는 지방교회의 교리에서 종종 모순된다. 이 선생은 ‘기도로 말씀 읽기’의 6-7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본성은 영이다...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체이다...이 책(성경)의 본성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별로 그리스도를 찾기’의 13쪽에서 이 선생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하라, 성경은 성경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중의 방면이 있습니다: 문자이며 또한 영인 방면이 그것입니다. 의문(letters, 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고후3:6). 요한복음 6장 63절에 따르면 말씀은 영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40절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상고할 수는 있었지만 생명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으로 올 때 그는 또한 반드시 주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단지 성경의 죽은 글자만을 만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만질 때 주님을 또한 만진다면 말씀이 영과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를 전하는지 말씀의 생명을 전하는지는 전하는 이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할 수 있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사역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지방교회 안의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2. 저는 귀하가 성경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한 문장만을 인용했던 ‘살아있는 별로 그리스도를 찾기’에서 전체 단락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12-13쪽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를 단순하게 신뢰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무엇인가를 놓칠 것이다. 말씀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단순하시지 않다. 구약에 선지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도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의미에서 “은밀”하다. 하나님은 그다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으시며 대단한 선전과 함께 오시지도 않는다. 어린 아기 예수도 은밀하게 오셨다. 만약 당신이 성경적인 면에서 율법적이라면 당신에게 하나님은 “은밀”하시다. 당신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나는 성경을 안다. 성경은 이렇고 이러한 것을 말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지식에게 기만당하게 될 것이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이리저리 알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았다. 당신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한다. 하지만 조심하라. 성경은 성경이고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글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언제 그분이 베들레헴에 계시고 언제 떠나시고 언제 돌아오시고 어디서 부활하시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이러한 방식으로 따라야 한다.

로버트씨, 저는 이것이 귀하께 적절한 말이라고 느낍니다. 귀하는 모든 것을 말씀의 문자로 시험하는 노선에 주로 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가 보듯이 일세기의 바리새인들 역시 구약의 말씀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주님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을 알았지만 베들레헴으로 그리스도를 보러가지 않았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오셨을 때 그들은 말씀의 문자를 확인하고서는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2)고 했습니다. 원칙면에서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하여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들이 귀하의 성경적 기준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속지 마십시오. 만약 귀하가 싸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날 이 땅위에서 하고 계신 일이라면 이것은 귀하와 귀하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교리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귀하는 “모순”을 발견하셨습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귀하의 표현에 따르면 “교리에 대한 구체적이고 우주적인 진술”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면서 “교리는 오직 분열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이 문장은 잘려서 인용되었습니다. 귀하는 이 문장조차도 전체를 인용하지 않고 잘려진 문장만으로 문맥을 설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말이라면서 다른 문장의 일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교리로부터 확실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진리의 변호자는 결코 고의적으로 상대방을 잘못 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경륜’ 23-24쪽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위트니스 리의 말의 문맥을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는 주님의 자녀 가운데 분열만을 일으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신 영을 따라 행하며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욱더 다투게 된다. 오늘 우리가 성령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모두 “아멘! 할렐루야”라고 한다. 그러나 내일 영원 보증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즉시 나뉠 것이며 이것은 곧 목표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목표에 온통 집중하기보다 문제만 일으키는 것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 안에 계신 아들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다. 

어떤 사람은 침례에 대해 논쟁한다. 예를 들어 일부는 물을 머리 위에 뿌리는 약세를 주장한다. 이것 역시 교리의 문제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즉 그리스도만을 붙잡아야 하며 오직 한 분 그리스도자신에 의해서만 붙잡혀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법과 성령에 의해 붙잡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어느 정도 교리를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교리가 아니라 성령 안에 살아 계신 한 분이다.

마지막으로 귀하가 소위 “모순”이라고 제시한 것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최근의 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193쪽에서 이 선생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사진을 신문에 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타락하고 세속적인 기독교 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오 형제여! 가능하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신문에 광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 이 선생과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아나하임, 헌팅턴비취, 샌디애고에 있는 교회들은 직접적으로 이 권면에 모순되게 행했다. 1975년 12월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신문 종교란에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결국 이 선생의 권면은 하나님의 계시라고들 함에도 불구하고 부서지기 쉬운 과자와 같음이 분명하다.

  1. 로스엔젤레스 신문에 실린 이 기사의 목적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면을 샀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광고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종교광고를 할 때 주로 따라오는 사진이나 개인적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타락하고 세속적인 기독교 종교”의 어떠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솔직하게 선포한 것으로 귀하와 같이 우리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대중의 생각에 집어넣어진 잘못된 인상들을 정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율법적인 생각은 언제나 그 영에게 당황할 것입니다. 율법적인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다시 한 번 주 예수님으로부터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를 원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요 7:8, 10). 그분은 처음에는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가셨습니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분의 말씀은 “부서지기 쉬운 과자”와 같습니까?

로버트씨에게 묻겠습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까?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정의와 사람의 생각의 범주와 무익한 “철학”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골 2:8)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까? 이사야서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구실을 대어 빠져나가지 않고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구절은 또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일관된 틀에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귀하의 생각이 아닙니다(사 55:9). 바울이 “간사한 유혹(체계화된 오류, systematized error)"(엡 4:14)이라 불렀던 것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체계화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과실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귀하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사람의 예화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을 때조차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인용한 후 귀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가끔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오류절무(誤謬絶無)를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심지어는 현실도 무시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미 자세히 말씀드린바 있는 귀하의 소책자의 증거를 근거로 해서 저는 이 이야기의 교훈이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바로 귀하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한 귀하의 생각이 옳다고 너무나 확신하는 바람에 코앞에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태복음 7장 2절의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제가 3절부터 5절까지를 바꾸어 말해도 괜찮다면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왜 위트니스 리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귀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까? 귀하의 소책자는 허위와 거짓말이 가득한데 왜 위트니스 리에게 “당신의 눈 속에 있는 과실과 부정확함을 빼라”고 합니까? 귀하는 먼저 귀하의 생각에 있는 무분별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교회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지식에 따르면 저는 그를 그 영에 아주 많이 의존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버트씨,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 볼 때 당신은 그러한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귀하의 소책자 끝에서 귀하는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 안에 있다면 떠나십시오!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에 가입하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상대론(relativism)” 때문에 성경적인 실제를 떠나지 마십시오.” 여기서 성경적인(biblical)과 상대론의 철자도 “Bibical"과 ”realativism"으로 잘못 씌어져 있습니다. 성경적인(biblical)의 철자는 계속해서 틀리게 씌어져있고 몇몇 문장의 구조는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혼란스럽습니다. 한 예가 귀하의 소책자의 6쪽에 있는 문장입니다. “만약 지방교회가 잘못된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만 가르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교사는 아닐 것이다(If the Local Church were only teaching the wrong doctrine of God, it would still not be a teacher of God.).”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귀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모르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진리를 대표한다고 하는 사람은 공개적인 출판물에서 부정확하거나 엄밀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진리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관한 귀하의 관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고 귀하의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 리서치 인스티튜트(Christian Research Institute)가 수행한 작업의 질을 보여주는 표본입니까? 귀하는 귀하의 비판을 지지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귀하가 마치 증거인 양 제시한 글들은 문맥과 상관없이 잘려져서 저자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귀하의 목적은 진실을 제시하지 않음으로 위트니스 리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독자들에게 편견을 갖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진실로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조사를 했습니까? 귀하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많지 않습니다.

귀하는 모순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을 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후에 귀하 자신의 꾸며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위트니스 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동안 개인적으로 그를 알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처럼 풍성하며 도움이 되는 말을 거절한 “괴악한 사람들”(baser sort, 행 17:5)의 범주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행17:11) “신사적”인 사람의 범주에 속해야만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후자에 포함시킬 수 있음이 너무 기쁩니다.

로버트씨 저는 아주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러한 비방과 꾸며낸 이야기들은 귀하의 생각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만약 귀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열어 진리의 빛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면 귀하는 귀하가 했던 말들을 철회하고 위트니스 리와 교회들과 귀하가 잘못된 인상을 준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 따르면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만약 사람의 공력이 불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4-15)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귀하의 공력이 시험을 통과할지 의심이 듭니다. 귀하가 귀하의 소책자를 작성하는데 사용했던 자료는 확실히 금과 은과 보석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짚입니다(고전 3:12).

귀하는 교회에 대항하여 수천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따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귀하가 그 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귀하는 무엇으로 자신을 변호하시겠습니까? 저는 주님이 귀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너는 ‘연구원’이었으면서 어째서 진리를 찾고 제시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내 백성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진리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퍼트렸느냐?”

로버트씨 제가 개인적인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갓난아이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체험이 있는 64살의 사람입니다. 저는 상당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기독교 사역을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도 상당히 정통합니다. 저는 1968년에 주의 회복의 진리를 보았고 그것을 보았을 때 저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아래 있은 후로 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제 목사직의 장래를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서 그것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뿐만이 아닙니다. 수 백명, 아니 수 천명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님에 대한 누림을 발견했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직 목사이거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입니다.

집회와 교통, 교회의 사역뿐만 아니라 위트니스 리의 책들 또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역은 40년이 넘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는 그 시간동안 많은 책들을 출판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공급해 왔습니다. 귀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확실히 그의 책들에는 귀하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돕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귀하에게 요청하고 제안하는 것은 월터 마틴씨에게 이것을 질문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지 않습니까? 왜 오직 잘못된 것들만 지적할 뿐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지 않습니까? 만약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나 틀렸다면 당신은 왜 더 좋은 것을 내놓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가 어느 부분에서 틀렸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더 좋은 어떤 것을 산출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사역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지적할 능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가치로서 말로 된 것이나 출판된 것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보양하심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귀하에 대해 염려하는 바입니다. 귀하는 몇몇 책들을 읽은 것 같지만 풍성은 놓쳤습니다. 맛있게 먹고 즐길 닭을 받고서도 귀하는 뼈만 찾고 있습니다. 귀하가 정직하다면 비록 귀하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위트니스 리의 책이 부요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할 것입니다. 귀하의 앞에 풍성한 음식들을 차려놓고는 어째서 목에 걸릴만한 것만 찾아내시는지... 귀하가 염려스럽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요한 누림을 체험하지 못한 귀하와 오렌지 카운티의 많은 사람들을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에게 그들이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마23:13).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귀하가 저처럼 실제적인 교회생활 안에서 실제 안의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길 바랍니다. 저는 귀하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분들에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한 말을 해드리기 원합니다: “와서 보라”. 나다나엘에게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 상당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반응인 “와서” “보라”는 그의 의심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와서 봄으로 나다나엘의 의심은 믿음의 선포로 바뀌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6-49).

왜 와서 보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 보십시오! 우리는 주일 아침 10시에 주일 집회를 하며 주일 저녁 6시엔 만찬 집회를 갖습니다. 또한 화요일 7:30 기도집회와 금요일 7:30 사역집회와 토요일 7:00 중고등부 집회가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 포드 (Gene Ford) 드림

ⓒ 1976 Living Stream Ministry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25 05:00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 80년대 꽤 인기있던 한 설교가는 하와를 ‘교회의 예표’라고 하여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은 일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우화적 해석이요 정당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장로교회도 성경이 아담을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하는데는 동의한다. 왜냐면 로마서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5:14)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담의 범죄로 인류가 타락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대표성도 인정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하시고, 로마서 5장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이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7, 18절)고 하셨다. 

 ◇ 하와를 교회의 예표라고 하는 근거는 에베소서 5장 22~32절의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한데서 찾고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하시고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다. 여기에서 곧 그리스도의 아내로서의 교회는 아담의 배필로서의 하와의 위치와 같다는 것이다. 더우기 하와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오고, 교회는 흠없고 온전하사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오직 아무런 흠도 티도 없고, 죄 없으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만이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교회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 하와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고, 하와의 생명의 근원이 아담의 몸인 것처럼 교회의 생명의 근거도 그리스도의 몸이다.  

◇ 그런데 장로교회는 하와가 타락의 상징인데 타락한 하와를 교회의 예표라고 하는 것은 교회도 타락한다는 뜻이냐며 대단히 단세포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와는 죄가 아직 세상에 오기 전에 아담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흠없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시고” 안식하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인한 교회를 얻었기에 그 교회로 하여금 마귀의 일을 멸하고 세상을 정복하며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것이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인간들이 불완전한 교회로 만들고 있다.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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