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19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3)


2. 신약교회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할 에클레시아 개념들

신약에서 교회 (Church)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물론 70인 역 구약에서도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에클레시아가 우리가 현재 토론하는 대상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염두에 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속성상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외시킵니다. 

 1) 이방인 폭도들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H.J 님이 용례 중 하나로 소개해 주신 사도행전 19장 32, 39, 41이 말하는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개념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부의 권세 아래 있는 무리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구약의 유대인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서두 글에서 언급되었던 케빈 길레스 책 345-346쪽에 의하면 70인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약 100번 나타났는데(이 단어의 대부분은 카할이라는 히브리어), 그중 시편 28:5와 에스겔 32:22-23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유대인은 이러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으로(롬2:28-29) 소위 표면적 유대인인 구약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모임은 에클레시아 이되 신약교회 개념(이면적 유대인)인 마태복음 16:18이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개념에서는 제외됩니다.

 3)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이 제외됨

위 책은 유대인이되 열왕기상, 역대상, 역대하 등에서 약 33번 쓰인 에클레시아는 특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 역시 신약교회의 예표와 그림자의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마태복음 16: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는 아닙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회심 전후의 사울과 바울의 모습에서 관찰되듯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일 뿐입니다. 즉 예배하는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통해 참된 신약교회의 구성원이 된후 그는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이되 그 신분과 그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었노라고 실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3:6). 그가 고린도후서 11:28에서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고 할때의 그 교회는 그가 회심 전에 몸 담았던 예배공동체인 이스라엘 개념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을 혼동할 때 그 사람의 교회론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이해에서 멀리 빗나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교회는 시점으로 볼 때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교회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들만을 염두에 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단수의 교회로서 복수의 교회들이 되는 성경적인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할 때 염두에 둔 교회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H.J 님은 위 제외된 모든 개념들을 다 포함한 신구약 전체에 나타난 '에클레시아'의 용례들을 다 교회개념으로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범위에 있어서도 단지 <특정 목적을 위하여 따로 불러 나와서 만들어진 모임> 즉 민회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 집에서 모이든 예배당에서 모이든 도시에서 모이든 다양한 범위의 모임 그 모두가 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에 다루겠지만 교회의 다른 특징들을 무시한 채 에클레시아라는 원어적 의미만을 중시함으로 본의 아니게 분열의 뒷문을 이론적으로 열어주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1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교회들을 다 포함한 하나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라는 식의 성경본문 왜곡으로 빗나갈 여지가 다분합니다. 이 점은 별도의 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14 05:00

지방교회에 대한 비난은 오해에서 온 것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지방교회 운영 원칙

 

‘목사’대신 ‘장로’사역자가 교회 관리 운영

거듭난 성도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

한국교회는 워치만 니지방교회로 알려져 있는 로칼처치(local church)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로 워치만 니의 신학사상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는 한국교회 외에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측은 한국교회에 왜곡 전달된 자신들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1. 오해 받고 있는 내용들 

첫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 신관에 대해 양태론을 믿는다는데 대해;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 신관의 양태론을 이단사상으로 오히려 정죄한다고 밝혔다. 지방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相互內在) 하시며, 영원히 동시존재하신다는 칼케톤 신조를 굳게 믿는다.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삼위의 동시 존재를 믿는 양태론’은 성립될 수 없음을 잘 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사야 9장6절에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처럼 본문자체가 존재론적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에서의 삼위 간의 동일시는 ‘존재’가 아닌 경륜적인 ‘기능상’의 동일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함께 이같은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을 가르친 것을 일부 인사들이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한다는데 대해;
이 말은 위트니스 리가 다른 근본주의 교사들의 동일한 해석에 동승하여 요한계시록 17장5절의 ‘큰 바벨론, 음녀’를 로마 천주교로 본 것을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는 기성 교회 안의 거듭난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사제도를 부인한다는데 대해;
지방교회도 개교회의 인도자로서 복수의 ‘장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세속 직업을 가진 경우도 있고, 기성 교회처럼 전 시간으로 교회만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기성 교회의 목회자 역할을 감당한다. 다만 지방교회는 이들을 ‘목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장로’라고 부를 뿐이다. 칼빈도 두 종류의 장로론을 가르쳤고, 장로교 헌법에도 ‘목사’를 ‘장로’ 반열에 두고 있다. 또한 초대교회는 주후 4세기 경까지 목회자를 ‘장로’로 호칭했다. 

넷째, 지방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데 대해;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특정 단체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되게 거듭난 교인들의 공동체이고, 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믿는다. 

다섯지방교회만 교회라고 한다는 데 대해;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우주교회’(마16:18)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가 거주하는 지역을 범위로 하는 해당 ‘지방교회’(local church)의 일원이다(행8:1, 계1:11). 예를들어 지방교회가 ‘서울교회’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2. 지방교회가 지향하는 것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치되, 특히 성경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고 실행하기를 힘쓴다. 지방교회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요11:25, 골3:4)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엡1:23) 건축하는 것(엡4:16, 마16:18)이 성경의 중심 진리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 최종 완성된 모습이 어린양의 신부인 새예루살렘이라고 한다(고후11:2, 계21:2, 9-10).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백 권의 저술들은 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내용으로 쓰여졌다. 지방교회는 또한 최대한 성경대로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그래서 침례(행8:36-39)를 선호하고, 또 매주 예배시간에 성만찬을 실행하고 있다(행20:7). 

  3. 지방교회의 특징 

지방교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에 관한 객관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의 그분의 몸’(엡1:23)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그러한 객관적 진리를 토대로 삼되 더 전진해서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와 그분에 대한 체험을 강조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27-29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본을 따른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성직자 제도의 폐해를 보고 만인제사장을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론에 비해 실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방교회는 에베소서 4장12절의 권면을 따라 성도들을 온전케 하길 힘씀으로 만인제사장 제도를 실제로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롬15:16), 모든 성도들이 목양하며(요21:15),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도록 격려해 왔다(고전14:1, 4, 23-26, 31).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며(엡4:4) 주님은 분열을 책망하신다고 믿는다(고전1:10-13). 따라서 가급적이면 분열의 요인들은 피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등 몸의 하나를 이루는데 필요한 미덕들을 더 소유하기를 힘쓴다(엡4:2-3참조). 

  4. 지방교회의 신앙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은 한국복음서원이 발행한 신약의 결론(총8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구속과 구원 등 핵심 신앙에 있어서 성경뿐 아니라, 성경에 따라 결의된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초대교부들의 정통 가르침과 교회 역사상 주께 쓰임 받았던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들을 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복음서원도 ‘2천년 교회사 순례’(214쪽)라는 책을 번역 발간한 바 있다. 따라서 주의 회복은 성경과 교부들과 역대의 주의 종들을 통해 계시된 건전한 가르침들을 이어 받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2 , 교회연합신문 562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652호_edit130130.pdf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11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4)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나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오시며,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을 수행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분명한 동일시를 발견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세 위격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이 믿는 이들 안에서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와 그 영이 부활 안에서 동일시되시는 것에 관해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아래의 발췌문은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령이시다. 성령 외에는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는 그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누구이신가?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 영은 누구이신가? 물론 성령이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님이시고, 그 영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을 그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The Spirit of Christ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는 <그리스도의 영> (The Spirit of Christ) 이라는 자신의 책 25장에서 “주 예수님은 높여지시어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주 영’이 되셨다.”라고 말했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 > ,영문판 14-15쪽 제자들 안으로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 내쉬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숨이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 즉 숨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의결론 - 성령

모든 과정을 완성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으며, 이 생명 주시는 영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분,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이신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들의 영적인 생명과 존재의 신성한 본질이 되셨다. <신약의 결론 성령>, 194-195쪽

위의 예문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오해한다면 이러한 글이야말로 그가 명백한 양태론자라는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일성에 대해 심도 있는 설명을 시도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우리가 받는 오해와 유사한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 (Irenaeus), 터툴리안 (Tertullian), 어거스틴 (Augustine)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근거 없이 그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기 위해 소위 ‘증거’로 출판한 책자들에서는 위트니스리의 그러한 균형잡힌 언급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그의 온전한 관점을 보여주는 두 예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3편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고후 3:17). 주님으로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다. 그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통치권과 머리의 권위와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고 계신다… 그분이 주님으로서 수행하시는 모든 것을 그분은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 95-96쪽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숨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물론 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인 내적이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번째 보혜사이신 그 영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숨이시다. 따라서 내적인 방면을 조망할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은 하나이시다. <요한복음 강해 속편 3권>, 273쪽

많은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에는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신약의 서신서들과 같이, 자신의 사역의 커다란 강조점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종종 생명 주시는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언급을 추가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위트니스 리 외에도 그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임스 던 (James D. G. Dunn) 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분은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분으로서 위트니스 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적인 존재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의 모형이다…요약하자면 45절 하반절은 이에 대한 증거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바울은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면서도 몸이 있는 그러한 존재의 형태로 새로운 인성의 본과 선구자이시라는 것을 [생명 주시는 영]에 대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기때문이다.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그들 모두가 체험한 생명 주시는 영은 다시 사신 예수, 마지막 아담이시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영적인 존재…또는 영적인 범위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바울에게 있어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며,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1, Christology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98], 164-165쪽)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관해 자주 인용한,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저명한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 (W. H. Griffith Thomas) 역시 이러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뛰어난 요약을 했습니다.

The Holy Spirit

이러한 진리의 양면 모두를 주의하며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영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위격의 특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그들의 임재는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것이다. (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1986; reprint of The Holy Spirit of God, 4th edition,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3] 144쪽)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이러한 인용문을 읽는다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웨트 (H. B. Swete) 도 동일한 사상을 아래와 같이 확증했습니다.

H. B. Swete

그 영은 그분의 일에 있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영이신 주 (the Lord the Spirit) 즉 그분의 영화롭게 된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London, New York: Macmillan, 1912] 306쪽)

 이 핵심적인 주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기 전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각주를 추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각주는 위트니스 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를 동일하게 인정한 저명한 주석가들인 마빈 빈센트 (Marvin Vincent), 헨리 알포드 (Henry Alford), 윌리스톤 워커 (Williston Walker) 의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에서 시작되는 이 부분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의 ‘주님’은 틀림없이 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고후 2:12, 14-15, 17, 3:3-4, 14, 16, 4:5). 이것은 성경에 있는 분명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강조한다. “3장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널리 퍼지게 하시고 활력 있게 하시는 그 영이시다. 우리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고 (고후 3:6) 새 언약의 사역에는 영광이 있다 (고후 3:8).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 요한복음 14장 16절, 18절과 비교해보라” (빈센트).

“3장 16절의 주님은 3장 6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다. 의미상, 여기서 언급된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영’은 바로 성령과 동일하시다…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알포드). “변화시키시고 내주하시는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님은 그 영이시다’” (윌리스톤 워커). <신약성경 회복역>, 고린도후서 3장 17절 각주2)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03 05:00

이교에 물든 기독교-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 으로 가득한 기독교

이교에 물든 기독교

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으로 가득한 기독교

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함께 쓴 '이교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 '팩트'(fact)입니다.  물론, '팩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맥박이었다. 주님의 그들의 생명이었고,호흡이었고, 대화의 핵심이었다. 신약성서적 교회는 모든 것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놓았고, 또 최우선으로 놓았다. 

  2. 신약성서적 교회는 예배의 고정된 순서가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신자가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를 나누고,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고, 서로 덕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두가 참여하는 열린 모임을 했다. 거기에 구경꾼은 없었다. 모두가 참여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 교회 모임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몸 안에서 상호 간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함을 통해 주님이 밖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 모임은 종교적 "예배 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스럽고, 자발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충만한 비공식적인 모임이었다. 그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또 교회에 속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역 또는 은사 받은 사람을 위한 무대로 쓰이지 않았다. 

  3. 신약성서적 교회는 친밀한 공동체로 살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집합적인 예배와 덕을 세우려고 모였지만, 교회가 단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모이려고 존재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신자들은 나누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정기적인 모임 밖에서 서로 돌봤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바로 그 느낌대로 진짜 그렇게 살았다. 

  4.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 의식, 성직자, 그리고 신성한 건물이 없다고 알려진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종교였다.

교회가 생긴 다음처음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집에서 모였다. 특별한 경우 에는, 기독교 사역자들이 때때로 더 큰 장소를 사용했다. - 솔로몬의 행각 같은 곳(요 10:23; 행 3:11)과 두란노 서원(행 19:9) - 그러나 그들에겐 신성한 건물의 개념이나 건물에 큰 돈을 들이는 개념이 없었다. 또 건물을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성한 건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5. 신약성서적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카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교회는 교회를 개척하고 돌보는순회 사도적 일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꾼들을 특별한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일부였고, 교회를 섬겼다. (거꾸로 교회가 그들을 섬긴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다른 은사와 기능을 소유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사람들 위에 권위를 행사할 독점적인 권리를 갖고 계셨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장로의 역할과 목자의 역할이 단 두 가지 은사였다. 장로들과 목자들은 특정한 은사를 가진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직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 모임에서의 사역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교회의 지체들을 자연스럽게 돌보고 또 교회 전체를 감독하는 일을 하는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었다. 

  6. 신약성서적 교회에서의 의사결정은 교회 전체의 어깨에 달렸었다. 

순회 교회 개척자들은 때때로 지침을 주고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교회 전체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 지역에서 결정을 내렸다. 함께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따르는 교회의 책임이었다. 

  7. 신약성서적 교회는 조직적이지 않고 유기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직책을 주고, 프로그램을 짜고, 의식을 제정하고,상명하복식 계급이나 명령계통 구조를 조직해서 함께 묶은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였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랄 것이었고, 그 유전자(DNA)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사역과 기능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교회가 아름다운 여자, 곧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녀는 땅에서 나온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식민지였다. 

  8. 십일조는 신약성서적 교회의 관습이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재정을 교회 밖의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중의 가난한 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아울러 그들은 복음이 널리 퍼져서 다른 곳에도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도록 순회 교회 개척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죄책감이나 의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능력대로 드렸다. 목사/성직자의 사례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요, 사역자요, 몸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였다. 

  9.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을 때, 새로운 지위를 얻었음을 표하는 간증으로 즉시 그 사람들에게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주의 만찬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또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되었음을 재확인하는 지속적인 표현이었다. 주의 만찬은 교회가 기쁨과 잔치의 분위기로 함께 즐겼던 온전한 식사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식이나 특별한 제사가 결코 아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였다. 

  1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젊은 일꾼들을 훈련시키려고 성서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지 않았다. 

기독교 일꾼들은 교회생활의 토양에서나이 든 일꾼들에 의해 교육되고 훈련되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키우실 때 이 '현장에서'훈련하는 최초의 모델을 선보이셨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젊은 이방인 출신 일꾼들을 훈련할 때 그 모델을 복제했다. 

  11. 초기 그리스도들은 자신들을 여러 교파로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이해했고 그것을 모든 도시에서 눈에 띄게 표현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한 도시에 교회는 하나뿐이었다. (교회가 그 지역 전체에서 여러 다른 가정집에 흩어져서 모였겠지만) 만일 당신이 1세기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한 교회에 속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은 잘 지켜졌다. 그들을 나누는 것("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은 분파와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1:12을 참조)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 대장간, pp 311 - 314

출처:good news fellowship                          글쓴이:maple

이교에 물든 기독교
국내도서
저자 :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조지 바나(George Barna) / 이남하역
출판 : 대장간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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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23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지방교회 자료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1)

- 시작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현실을 돌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godssalvation.chch.kr/aspects/regenerate.html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s://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6.20 11:54

 

성경말씀

(마6:7)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의 만나  

만일 우리가 합당하게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기도가 아닌 기도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역량도 주지 않으며 또한 우리의 기도 시간에 많은 헛된 말을 하게 합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기도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반 로버츠’가 하루는 그의 거실에서 몇 명의 사람들과 어떤 일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의 어떤 형제가 절반가량 기도했을 때 로버츠는 건너가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서, “형제여,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기도의 많은 말들은 다 사탄이 우리 안에서 육체를 선동하여 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매우 길지만 많은 것들이 실제적이지 않고 쓸모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도 시간에 늘 온 세상을 몇 바퀴 도는 데에 시간과 힘을 다 소모하여 버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아무런 기도의 응답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지방교회 생명 이만나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7 16:05

 

성경말씀

(요일4:7~8)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믿는이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의 표현이 된 사랑을 가지고 습관적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사도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신성한 출생인데, 이 출생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이 믿는이들 안으로 분배되었고, 이 생명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생명 능력을 줍니다. 이 신성한 출생은 형제 사랑의 기본 요인이며, 이 형제 사랑이 주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기 위한 더 높은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신성한 출생으로 받은 신성한 생명의 아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지도 않고 생명이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7 16:00

 

성경말씀

(계3:20~21)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이기고 나서 나의 아버지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나의 보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해 주겠다.

오늘의 만나

주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문은 교회의 문이지만 그 문은 개인적인 믿는이들에 의해 열려집니다. 주님은 전체 교회를 다루고 계시지만 주님의 다루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다루심은 객관적이지만 믿는이들이 영접하는 것은 주관적이어야 합니다. 21절에서 주님은 또한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이기고 나서 나의 아버지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나의 보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해 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타락한 회복된 교회의 미지근함과 자만심을 이기는 것과 필요한 항목들을 사는 것과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는 것은 장차 올 천년왕국에서 주님의 권위에 참여하는 이기는 자들에 대한 상이 될 것입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