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20. 10. 15. 00:10

지방교회 칼럼 294회

이기는 이가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지방교회스토리 유튜브 : https://youtu.be/L-L2UkvgDPs


지방교회스토리 카카오TV : https://tv.kakao.com/v/413216666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20. 4. 29. 00:05

지방교회 생명이만나 270회

말하는 습관 


지방교회 이만나 유튜브 : https://youtu.be/j7ARO_biLUU


지방교회 이만나 카카오TV : https://tv.kakao.com/v/408585144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9. 3. 27. 00:15

찬양 399회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1.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신실함 나타내
내게 호흡 생명 주사
하나님 발견하게 해


날 사랑해 지명하여 부르시고
날 치료해 오른손으로 붙드시니
그의 사랑 그 신실하심
견고한 내 맘 녹이네


새롭게 헌신해 우릴 훈련하소서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
당신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네


2. 날 매혹해 그 사랑으로 날 격려하니
당신을 향하여 추구해
그러나 나 자아 인해
넘어져 실패하였네


날 거절해 돌이켜서 주를 보리
나의 힘이 아닌 오직 그 영을 인해
날 신실하게 하신 주님
그 사랑 더욱 강하네


3. 그 은사와 그 부르심은 변할 수 없어
그분은 모든 것 하시네
내게 힘과 은혜 주사
이 길을 달리게 하네


나의 꿈과 생명 장래 주께 드려
날 떠나지 않고 붙드시는 주님께
난 사랑의 맘 고백하리
주님을 진정 사랑해




지방교회 - 찬송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 00:00

지방교회 칼럼 - 레위기 라이프스터디 요약 13 - 포이멘칼럼 203번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57번, “안식년과 희년(2)”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 속죄일에 나팔소리가 퍼져 나감

25장 9절 “너는 일곱째 달이 되면 그달 초 열흘날에 숫양 뿔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희년이 속죄에 근거하여 완전한 자유가 온 백성들에게 선포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에 의해 성취되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8. 19. 13:05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
부흥의 분위기를 가져옴

우리가 주님을 먹고 마시며 누리는 것을 배울 때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영양 공급을 받아 왔고 자연스럽게 활기차고 건강하며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물질적인 세계에 있는 많은 것이 영적인 것들의 상징들이다

예를들면
빛은 우리의 빛이신 주님을  상징하고
음식과 음료는 우리의 음식과 음료이신 주님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생명은 영적인 생명을 상징한다
우리의 물질적인 생명은 먹는 것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고 또한 운동과 수고를 통해 건강을 얻어야 한다
영적인 생명은 한층 더 그러하다
우리가 주님을 먹음으로 그분의 자양분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살아나게 된 것과 같이 우리는 건강해지기 위해 영적인 훈련과 수고를 해야 한다

영적인 훈련 곧 생명의 훈련은 우리의 영적 `체조`이다 [딤전 4;7]
각처에 있는 교회들의 거의 모든  성도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 때문에 살아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영적 생명을 훈련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우리는 지역에서 갓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새 신자들을 온전하게 하는 교통과 기타 비슷한 일들을 해 주고 그들이 영적 `체조`를 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기름 부음의 느낌이나 그 영에 따라 행하는 것이나 혹은 주님과 교통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을 위한 영적 훈련이다

형제들은 이러한 일에 앞장서야 한다


지방교회
일자  1966년 12월 21일
장소  대만 타이베이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8. 15. 23:19

훈련의 필요성
우리 모두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 절대적이기 위해 여기에 있다

우리는 기꺼이 이렇게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주여 우리는 훈련받기를 원함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 법을 알기 원하며 필요한 모든 기술들을 익히기 원함니다``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돌보는가를 훈련해야 한다

주님의 표준에 달하는 모든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와 복음을 전파하는 자와 다른 이들을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대신하여 말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전파해야 하며 우리의 복음 전파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양육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다면 세상적인 사람들이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3. 05:00

이교에 물든 기독교-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 으로 가득한 기독교

이교에 물든 기독교

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으로 가득한 기독교

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함께 쓴 '이교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 '팩트'(fact)입니다.  물론, '팩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맥박이었다. 주님의 그들의 생명이었고,호흡이었고, 대화의 핵심이었다. 신약성서적 교회는 모든 것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놓았고, 또 최우선으로 놓았다. 

  2. 신약성서적 교회는 예배의 고정된 순서가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신자가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를 나누고,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고, 서로 덕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두가 참여하는 열린 모임을 했다. 거기에 구경꾼은 없었다. 모두가 참여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 교회 모임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몸 안에서 상호 간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함을 통해 주님이 밖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 모임은 종교적 "예배 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스럽고, 자발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충만한 비공식적인 모임이었다. 그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또 교회에 속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역 또는 은사 받은 사람을 위한 무대로 쓰이지 않았다. 

  3. 신약성서적 교회는 친밀한 공동체로 살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집합적인 예배와 덕을 세우려고 모였지만, 교회가 단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모이려고 존재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신자들은 나누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정기적인 모임 밖에서 서로 돌봤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바로 그 느낌대로 진짜 그렇게 살았다. 

  4.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 의식, 성직자, 그리고 신성한 건물이 없다고 알려진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종교였다.

교회가 생긴 다음처음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집에서 모였다. 특별한 경우 에는, 기독교 사역자들이 때때로 더 큰 장소를 사용했다. - 솔로몬의 행각 같은 곳(요 10:23; 행 3:11)과 두란노 서원(행 19:9) - 그러나 그들에겐 신성한 건물의 개념이나 건물에 큰 돈을 들이는 개념이 없었다. 또 건물을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성한 건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5. 신약성서적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카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교회는 교회를 개척하고 돌보는순회 사도적 일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꾼들을 특별한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일부였고, 교회를 섬겼다. (거꾸로 교회가 그들을 섬긴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다른 은사와 기능을 소유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사람들 위에 권위를 행사할 독점적인 권리를 갖고 계셨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장로의 역할과 목자의 역할이 단 두 가지 은사였다. 장로들과 목자들은 특정한 은사를 가진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직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 모임에서의 사역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교회의 지체들을 자연스럽게 돌보고 또 교회 전체를 감독하는 일을 하는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었다. 

  6. 신약성서적 교회에서의 의사결정은 교회 전체의 어깨에 달렸었다. 

순회 교회 개척자들은 때때로 지침을 주고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교회 전체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 지역에서 결정을 내렸다. 함께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따르는 교회의 책임이었다. 

  7. 신약성서적 교회는 조직적이지 않고 유기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직책을 주고, 프로그램을 짜고, 의식을 제정하고,상명하복식 계급이나 명령계통 구조를 조직해서 함께 묶은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였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랄 것이었고, 그 유전자(DNA)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사역과 기능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교회가 아름다운 여자, 곧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녀는 땅에서 나온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식민지였다. 

  8. 십일조는 신약성서적 교회의 관습이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재정을 교회 밖의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중의 가난한 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아울러 그들은 복음이 널리 퍼져서 다른 곳에도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도록 순회 교회 개척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죄책감이나 의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능력대로 드렸다. 목사/성직자의 사례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요, 사역자요, 몸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였다. 

  9.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을 때, 새로운 지위를 얻었음을 표하는 간증으로 즉시 그 사람들에게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주의 만찬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또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되었음을 재확인하는 지속적인 표현이었다. 주의 만찬은 교회가 기쁨과 잔치의 분위기로 함께 즐겼던 온전한 식사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식이나 특별한 제사가 결코 아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였다. 

  1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젊은 일꾼들을 훈련시키려고 성서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지 않았다. 

기독교 일꾼들은 교회생활의 토양에서나이 든 일꾼들에 의해 교육되고 훈련되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키우실 때 이 '현장에서'훈련하는 최초의 모델을 선보이셨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젊은 이방인 출신 일꾼들을 훈련할 때 그 모델을 복제했다. 

  11. 초기 그리스도들은 자신들을 여러 교파로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이해했고 그것을 모든 도시에서 눈에 띄게 표현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한 도시에 교회는 하나뿐이었다. (교회가 그 지역 전체에서 여러 다른 가정집에 흩어져서 모였겠지만) 만일 당신이 1세기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한 교회에 속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은 잘 지켜졌다. 그들을 나누는 것("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은 분파와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1:12을 참조)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 대장간, pp 311 - 314

출처:good news fellowship                          글쓴이:maple

이교에 물든 기독교
국내도서
저자 :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조지 바나(George Barna) / 이남하역
출판 : 대장간 2011.12.27
상세보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4. 13:25
성경말씀  

(막1:35)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시어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기도하고 계시니 

 오늘의 만나

 
 폴란드의 유명한 음악가 파더르프스키(Paderewski, 1860-194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일 하루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손이 뻣뻣해지는 것을 나 혼자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틀 동안 치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알게 되고, 사흘 동안 연습하지 않는다면 내 친구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 간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면 일반 청중들도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아침 부흥'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단지 하루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 자신이 알아차리고, 이틀 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가족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흘 간 아침 부흥을 하지 않는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온전케 하는 예화들(1)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4:00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여러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We thank God always concerning all of you, making mention of you in our prayers.)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또한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Remembering unceasingly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endurance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our God and Father;)
이 서신은 주후 54년경 바울이 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쓰여진 것입니다.(행18:1, 5)
(행18: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왔을 때에,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엄숙히 증언하였다.
바울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세 가지, 즉 믿음의 일(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을 알 수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일(역사)의 본성과 힘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의 본성과 힘이 믿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과 수고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일은 그다지 깊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고는 일보다 더 깊고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 이것이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사랑에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수고의 자극제요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은 결국에는 더 깊고 더 힘든 것, 즉 수고가 됩니다.
이러한 수고를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지속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사랑의 수고에 대한 적절한 예입니다.
어머니들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이 단지 일이 아닌 수고라는 것을 압니다.
출산 후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극진히 사랑할 것입니다.
얼마동안은 즐겁게 일하며 어린아이를 돌볼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일은 그녀를 압박하고 지치게 하는 수고가 됩니다.
주님이 이 젊은 어머니의 마음 속에 어린 아기에 대한 모성애를 간직하게 한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러한 사랑없이는 수년간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어린아이를 돌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먼저 믿음의 일이 있고, 이러한 일이 사랑의 수고가 됨을 설명해 줍니다.
소망은 인내의 근원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데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데서 오는 부담을 감당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정 생활에서는 물론 교회 생활에서도 우리 모두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훈련받고 교육받아 먼저는 일해야 하고, 다음에는 수고하고, 결국에는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는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가 인내하는 한 그에게는 사도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인내가 장로 직분의 최고 수준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는 인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성공적으로 돌보려면 인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내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돌본다는 것은 항상 상당한 고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장 3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내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이나 장차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생깁니다.
소망은 인내의 근원입니다.

창세기1

오 주예수님!  사랑해요.

우리가 생명안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더 믿음의 그리스도를 깨닫는것을 굳게 붙잡을것이며,

교회에서 어떤 사소한 일들로 분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관념을 버려야 할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에서 하나되고,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도 하나되며,

또 충분히 성장한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하려는 것입니다.(엡 4:13)

그렇게 될때에야 비로서,믿음의 역사안에 지체들과의 사랑의수고와 다시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교회생활에 기쁨으로 함께 할수 있을것입니다.아멘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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