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샬롬1 2018. 7. 6. 09:56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신성한 계시의 확산

사도행전 6장 7절은 [화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성장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신앙에 복종하니라] 고 말한다
[성장하여]라는 말은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 속에 심겨진 씨처럼 자라는 문제임을 가리킨다[막 4;14]
12장 24절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고 번성하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먈씀은 사실상 주님 자신이신데 왜냐하면 말씀은 주님은 담는 용기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했다는 것은 사실 주님이 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24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했을 뿐 아니라 번성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말씀은 스스로 자라거나 번성하지 않는다
그보다 말씀은 믿는이들과 함께 자라며 교회와 함께 번성한다
믿는이들이 성장할 때 그들 속에 있는 말씀도 성장한다
교회들이 번성할 때 말씀도 교회들 속에서 번성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하고 번성했다는 사실은 고대의 믿는이들과 교회들이 말씀으로 충만했으며 말씀과 하나였다는 것를 가리킨다
이는 악한 자를 대항하는 그분의 싸움에서 주님이 승리하셨다는 강한 표시이다
12장 24절에서 말씀의 성장과 번성은 베드로의 사역의 결과요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베드로의 사역이 승리로 끝맺었음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에서 그의 사역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하고 번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사역이 승리로 끝맺었음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에서 그의 사역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하고 번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사역의 영광스럽고 승리에 찬 끝맺음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땅 위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 세계에 이르게 된 주님의 움직이심에 대한 선포이다
오늘날의 많은 전파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별로 없다
말씀 대신에 이야기와 예화들이 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이와 같지 않아야 한다
오히러 우리는 신약 안의 말씀을 배울 필요가 잇다
우리는 신약을 연구해야 하며 그것으로 흠뻑 적셔져야 한다
만일 이런 식으로 신약으로 흠뻑 적셔진다면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할 때 말씀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어야 한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의 풍성한 말씀으로 득해야한다.
성도들은 이야기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견고하고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도움을 얻는다
복음을 확산시키러 나갈 때 우리는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왕국의 복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오직 신성한 말씀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을 담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
오로지 거룩한 말씀 신성한 말씀만이 하나님의 왕국이신 그리스도를 다른이들에게 전달해 주는 데 유용하다
말씀을 다른 사람들 안으로 뿌릴 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뿌리는 것이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말씀은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는 씨이고
씨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충만해서 그것을 다른이들 안으로 뿌려야 한다


[지방교회들]주의 회복안에 있는
신성한 계시로 조성됨과
이를 확산함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6. 05:00

찬송가 552 - 오 아름다운 날 - 지방교회들 찬송

찬송가 552 - 오 아름다운 날 - 지방교회들 찬송

1. 오 아름다운 날 즐거운 날 내 어이 잊으리오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나 주 예수님 만났네

다정하고 따뜻한 내 친구 내 마음 채우셨네 어두움 물리친 구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증거해

2. 성령이 내 맘을 주장하사 내 생활 변화되고 갈보리 십자가 그 사랑이 내 죄를 사하셨네

이전에 죄악된 내 생활은 모두 다 물러가고 놀라운 주 은혜 넘치게 주시니 주 이름 찬양하세


3. 세월은 흘러도 내 맘 속엔 희망은 변함 없고 하늘의 확실한 참 소망은 나 항상 갖고 있네

놀라운 그 축복 받은 날은 내 주님 알게 된 날 영원한 하늘의 고귀한 축복은 내 주님 알게 된 날

(후  렴)

하늘 영광 내 맘에 임했네 - 임했네 주 십자가로 나를 구했네 - 구했네

나 죄사함 받고 밤이 밝은 낮 되었네 하늘 영광 내 맘에 임했네 - 임했네

하늘 영광 내 맘에 임했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6. 05:00

생명이만나 333 - 나는 여호와 이다 - 지방교회들 이만나

생명이만나 333 - 나는 여호와 이다 - 지방교회들 이만나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나는...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뿐 그분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추가하도록 그분 자신이 무엇이라는 항목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6. 05:00

갓멘에세이 89 -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 - 지방교회들 에세이

갓멘에세이 89 -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 - 지방교회들 에세이

함께 사역했던 바울과 바나바와는 쉽게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과 베드로는 그동안 전혀 별개의 사도들로만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아래 말씀을 여러 번 읽고 관련 구절들을 찾아본 결과, 두 사도 사이에 접촉점이 의외로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2장의 책망 사건>을 알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바울을 가리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쓴 부분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 또한 자기가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들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무식하고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부분도 잘못 풀이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벧후 3:15-16).

제 기억으로는 자기가 쓴 서신에서 다른 사도의 서신을 거론한 것은 위 경우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자기보다 뒤에 사역을 시작했고, 심지어 책망하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던 바울을 베드로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른 것과 바울이 쓴 어떤 내용은 자기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백한 것은 같은 사도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관련 각주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각주2) 베드로가 이렇게 추천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신약의 믿음에 대해서 바울에게 면전에서 책망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갈 2:11-21). 

이것은 베드로가, 요한과 바울과 자기 자신과 같은 초기의 사도들이 비록 일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용어와 말하는 방식과 어떤 일에 대한 관점과 가르침을 제시하는 법은 서로 달랐을지라도, 그들이 동일하고 유일한 사역, 곧 신약의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담대하게 인정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로 베드로는 총 여덟 장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두 서신에서, 창세 전 영원 과거부터(벧전 1:2, 20) 영원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까지(벧후 3:1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각각 계시와 지혜를 받았지만, ‘새 하늘들과 새 땅’ 만 제외하면 바울 역시 베드로와 같은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위에서 바울을 거론한 것은 특별히 그가 모든 믿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인 징계와 심판을 언급한 대목에서였습니다. 

바울도 그 점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문득 그렇다면 바울과 베드로는 사역하는 동안에 언제 어떤 식의 만남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즉 바울이 회심 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후 삼 년 뒤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 동안 머물렀으나(갈 1:18)(여기서 <방문하다> (‘히스토레오’)는 “헬라어로 ‘친분을 맺기 위하여 방문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관련 각주). ”혈육과 의논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도 그릇된 것이다. 계시를 받은 후 합당한 시간에, 우리는 앞서 주님을 안 주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 이런 종류의 교통은 필요한 것이다”.

-(십사 년 후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기둥같이 여겨지는 야보고와 게바(베드로)와 요한도 나에게 주신 은혜를 알고서, 나와 바나바에게 교통의 악수를 하였습니다(갈 2:9).

-그러나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나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면전에서 그를 책망하였습니다(갈 2:11). (“신약에서 최소한 두 번 베드로가 소극적인 길로 앞장을 섰고 다른 이들이 그를 따랐던 것을 본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는 고기잡이하러 가는 데 앞장을 섰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위선을 행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LS, #6)).

-여러분이 각각 나는 바울에게, … 나는 게바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1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이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십니다(고전 3:22-23).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게바처럼, 아내인 자매를 동반하고 다닐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단 말입니까(고전 9:5)? 성경대로 제삼 일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 마지막으로는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전 15:4-8).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였다. … 그때 사도들과 장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그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선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다(행 15:6-7, 22).

이런 추구를 통해,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가 가르친 진리 내용은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서로를 알 기회들이 여러 번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고’ ‘갈라 선’(행 15:39)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사도이고 분량 있는 사역자라고 해도 다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름대로 업적이 생기고 지위를 얻게 되고, 심지어 따르는 사람들이 생긴 후에는(고전 1:12)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일이 초신자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 베드로후서를 쓸 때의 베드로는 바울 앞에서 위선 된 모습을 보였던 때보다는 더 변화되고 넓어진 사람이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엘 그레코가 그린 ‘베드로와 바울’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 직분”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 직분”을 받아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유일한 신약의 사역을 가르쳤고, 한 몸 안에서 한 교통을 추구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엘 그레코가 그린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렘브란
트 반 레인이 그린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는 그림 속에서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둘은 모두 네로 황제 시절, 비슷한 시기에 순교했습니다. 전언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방식으로 처형되었고, 바울 사도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논쟁 두 노인'

이처럼 다른 듯하면서 같은 베드로와 바울의 삶이, 한 몸 안에 있는 우리 많은 지체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각자의 타고난 기질은 다르지만, 신약의 사역에 신실하고, 한 몸을 존중하며, 자신을 비우고, 형제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또 말씀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이 아침에 “여러분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여러분 각 사람은 그 지체들입니다.”라는 말씀을 되새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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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발췌
1. EL GRECO 베드로와 바울(1587-92) oil on canvas,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에르미타주 박물관
http://www.andong-ch.org/webgallery/42833
2. 1628|패널에 유채물감|72×60㎝|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https://www.jejudo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