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D.L. 무디가 젊었을 때 그는 누군가가
“한 사람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점유하시도록 한다면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즉시 반응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해 그분의 길을 그처럼 멀리까지 전진시킬 수 있으셨던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 교통을 받아 주님께 “주 예수님, 제가 아직 젊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어떤 것에도 고정되거나 정착되거나 점유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새로운 움직임을 위해 당신께 전적으로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최근 움직이심을 위해 제게 오셔서 저를 점유하시고 취하시며 소유하소서.” 라고 말하기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시대를 전환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책망받은 한 가지인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님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그냥 사랑도 아니고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오 주님, 저의 우둔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당신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그 마음을 만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계 2:4).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련 성경 구절과 참고 자료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후서 : 물론 성경에 에베소후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신약 사도들로부터 두 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쓴 에베소서이고(엡 1:1),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계시록 2장 1-7절입니다(계 2: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일곱 서신중 첫 번째 서신은 ‘에베소후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J. N. 다비(Darby)는 “신약 안에 있는 ‘후서’는 모두 교회의 황폐함을 말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두 6장으로 된 에베소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졌으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어 가고 있었고, 사랑 안에서 행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그들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 …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면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주님께 강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통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모든 일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훗날 가장 근본적인 이 항목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부와 신랑에게 사랑의 무게감 :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은 한 가지’만 책망받고 그 외의 여러 가지에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으니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가 또한 주님의 사랑스러운 신부임을 생각한다면, 둘 사이의 사랑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하고, 사랑의 느낌이 있어야 하며, 그분에 대한 신혼 때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헌신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주여 저는 제가 처음 당신을 사랑한 것같이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과 저는 신혼 때와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말한 신혼 때의 사랑이다.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여 그들과 주님 사이에 그 신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당신은 그분께 “주여,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는 당신이 기뻐하는 바를 알기 원합니다. 당신의 명령이 아닌 곧 당신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주님의 종은 주님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만약 아가서에서 나오는 술람미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된 구절에 대한 추가적인 묵상 : 주님 앞에서 이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부분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11절은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을 잡는 섬김을 말하고, 15-16절은 나 곧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데, 후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은 위에서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 에스겔 44장에서의 두 종류의 섬김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노예가 밭에서 돌아와서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너는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시중을 들어라”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신약에서의 사례와 유사합니다. 복음전파와 목양은 귀한 것이지만,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또 그런 섬김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어야 합니다.
3)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행 13:1-2). 이 말씀 역시 주님을 위하여(for)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섬김(to)을 말씀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러한 친밀한 섬김의 결과임을 알게 합니다.
요약하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한 어떤 것이 이보다 우선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자백하고,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생명나무로 먹음으로써, 그와 연합되는 “처음 행위(첫째가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어떤 영적인 봉사가 주님 자신보다 더 우리 존재를 사로잡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가 참된 위기요 즉시 회개해야 할 순간임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불의한 일로 주님께 책망받은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상태 때문에 책망받은 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오 주님, 당신을 위한 어떤 봉사가 주님 자신을 대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더 깊이 연합하는 일이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국 트럼프와 북한 김정은의 회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이 회담을 최대한으로 선전하고 있다. 회담이 끝나고 북한은 ”70년간 첨예하게 대립해오던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끝장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확고한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양국 수뇌가 세기의 만남과 회담을 진행했다.“는 식으로 TV 방송을 반복해서 방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먼저 북한의 핵이 무서워서 김정은에게 회담을 요청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세계정세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이는 물질세계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구약시대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물질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였다. 다니엘은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무역 등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볼 수 있다. 만약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소위 그 방면에 전문가들은 한 마디씩 하겠지만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만 알고,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한다. 보이는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그 영역이 다르다.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우주가운데는 세 가지 의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지요, 둘째는 사탄의 의지요, 셋째는 사람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의지인 사탄의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탄의 의지를 알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첫 번째 창조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1잘 2절은 “그러나 땅이 황폐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을 품고 계셨다.”한다.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실 때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욥기 38장 7절은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그 때는 땅의 기초를 놓을 때를 말한다(욥38:4). 1장 2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한 것은 1절과 2절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을 보면 이 사건이 사탄의 반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장 루시퍼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보고 교만해져서 “뭇별들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말하면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이다(사14:13).
사탄의 의지
하나님은 반역한 천사장과 악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추방시켰고, 하늘들과 땅을 심판하셨다. 그 결과 땅은 황폐하고 공허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모든 천사들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었다. 첫 번째 창조의 주인공은 천사들이다. 천사들의 으뜸인 천사장은 교만 때문에 악한 의도를 품게 되었는데 그 악한 의도가 사탄의 의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에 더하여 추가로 사탄의 의지가 있게 된 것이다. 우주가운데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천사장의 반역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사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고 있다. 모든 영적 전쟁의 근원은 두 의지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사탄의 의지가 신성한 의지에 대항하여 일어나기 전에는 우주 안에 전쟁이 없었다. 우주 가운데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천사장의 배역에서 시작되었다. 그 배역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국가 사이에, 종족 사이에, 사회 계층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제 1차, 2차 세계 대전도 그 배후에 사탄의 반역에서 비롯되었다. 영적 세계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계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는다면 밖으로 시시각각 변화는 정세에 대하여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 배후에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오늘날의 다니엘이 되어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와의 전쟁은 교회와 사탄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 안에 혼란과 다툼과 냉담함이 있는 것은 그 원인이 타락한 사탄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탈취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가 충돌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세 번째 의지인 사람의 의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사탄을 처리해야 한다. 현시대는 바로 교회가 이 땅에서 주님의 승리를 실지적으로 실현하는 시기이다. 머리가 승리하셨기 때문에 몸 또한 승리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셨고, 부활생명으로 교회를 건축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승리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우주 안에 하나님의 왕국도 있고, 사탄의 왕국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언급한 영적 전쟁은 이 두 왕국간의 전쟁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에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함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교회의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싸우셨던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계시록 12장 10절,11절에 있는 것처럼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참소자에 대해서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로 마귀의 참소를 이겨야 한다. 그들은 또한 죽기까지 자기들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사탄의 입지는 우리 가운데 없어질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다. 사탄의 왕국은 사탄이 왕이고, 반역한 천사들이 부하들이고, 더러운 귀신들이 하인들이고, 사탄의 지시를 받는 타락한 사람들이 한 패거리들이다. 교회와 사탄과의 전쟁은 우리와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다. 우리는 사람 속에 있는 사탄은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사탄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는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사탄을 처리하지 않으시고, 피조물인 사람에 의하여 그를 처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적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소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고 하나님을 대표함으로 그분의 원수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하는 이중 목적을 완성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의도는 사람이
1)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정복하고
2) 사탄에게 강탈당한 땅을 회복하며
3)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마6:10,13). 따라서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악한 영들인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은 사탄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반역할 때 사탄을 따랐으며, 지금은 하늘들의 영역에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배역한 천사들이다. 오늘날 이 세상은 완전히 마귀의 어두운 통치아래 있고, 마귀는 악한 천사들을 통해 다스린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변하는 세상의 흐름보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예의 주시하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하나님 편에서 싸워야 한다. 아멘
로마서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 우리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하나님의 원수는 이 놀라운 일들에 자극을 받아 온갖 고난과 재난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통과 재난을 넉넉히 이긴다(롬 8:37).
로마서는 처음부터 8장 끝까지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전반부를 다룬다.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이 구원의 근원인 하나님의 사랑, 즉 어떤 사람이나 문제나 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정도까지 구원받았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주영에 의해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루며, 이 구원의 최종 목표에 이르는 정도까지, 즉 비교할 수 없는 신성한 영광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되는 정도까지 구원받았다.
기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