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0. 05:00

말씀과각주 327 - 로마서 8장 34절 - 지방교회들 말씀

말씀과각주 327 - 로마서 8장 34절 - 지방교회들 말씀



로마서 8:34 누가 감히 유죄 판결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0.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3편 교리를 성경보다 중시하는 삼신론자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곳 토론 장도 우리 모두는 옛사람의 행위를 떠나 다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분께 받은 부담과 빛을 믿음으로 말해내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 토론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공통 대적인 사탄과 그로부터 나온 비 진리들은 폭로, 분별, 공개적으로 거절되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바로 알기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에 대한 투명한 이해가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본질적인 토론 내용과 무관한 오해들로 인해 이 토론이 방해받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본 토론은, 이인규님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성경본문 가르침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심과 동시에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안에도 구별됨을 상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심을 믿는 지방교회 입장과, 독립된 인격으로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것은 믿지만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계시지 않으며 만일 그렇게 주장하면 양태론이다 라는 최삼경 목사, 이00 감리교 권사와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어느 것이 이단적인 주장인지를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인규 님이 위트니스 리 책에서 잘못된 내용이라며 퍼다 올리고 임의로 판단한 이런 저런 내용들도 이 근본적인 한가지 차이점에 대해 어느 쪽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주장하는지를 분별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들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이나 토론 당사자들은 본 토론의 쟁점을 흩트릴 수 있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일들로 인해 혼잡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다만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말하기만을 간절히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또 한가지는 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위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들에 대해 이미 행해졌던 각종 토론 내용들을 제가 쓰는 글에 계속 참고할 것이며 또 때로는 그 자료들을 제 본인의 주장으로 가져다가 사용할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둡니다. 물론 그 자료들 안에는 월간 교회와 신앙의 지난 게시판, 지방교회 관찰 방에 올려진 내용들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박00님은 제 오랜 동역자임을 밝힙니다. 이 점에서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론적인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와 이인규님은 서로 판단기준이 다릅니다. 한 쪽이 제대로 된 30센티 자를 가지고 30센티 간격마다 표시해 놓은 것을 '잘못된 눈금을 가진 30센티'자를 가진 다른 사람이 재어 보더니 표시된 눈금들이 틀린다며 목소리 높여 외치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이 위트니스 리 책에서 가져온 본문들을 일일이 반박하는 일도 독자들을 위하여 필요하겠지만 사실은 "누구 자(기준)가 과연 표준인지"를 따져보는 일이 이 신론 토론의 근본핵심이며 시급한 과제입니다. 저는 앞으로 남은 토론에서 쌍방이 이 일에 집중하기를 참으로 원합니다. 

 이인규님은 1)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지극히 균형 있고 성경적인 말을 가져와서는 지방교회측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양자론을 주장하며, 네스토리안니즘을 주장한다고 그럴듯하게 말할 줄 아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이 분은 순진한 독자들이 정말 그렇게 믿도록 자신 스스로 내린 결론을 기정사실화하고 반복하여 말하는 순발력도 보여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상상이고 오해요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또한 제가 역사상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우그스티누스의 '상호내재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면 왜 보편적인 신학자가 아니고 특수한 사람의 이론을 내 세우느냐고 하시고, 한국교계에서 정통신학자의 범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박사학위 논문 포함)을 인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책은 없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인규님이 말하는 소위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가 매우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님의 정통교회 기준대로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라고 해야 한다'는 소위 정통교회 교단 소속인 장신대 김명용 교수는 이단입니다. 이00 님은 '니케아 신조= 정통교회 삼위일체론'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바로 그 점이 자신의 어려움인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이인규님의 삼위일체관은 니케아 신조의 장점인 '삼위의 독립된 구별'을 취하되 '독립된 삼위가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나'를 밝히지는 못한 니케아 신조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인규님의 삼위일체관은 '삼위의 독립된 위격'을 지나치게 붙잡음으로 '상호내재' 개념이 비 성경적이며 이단적인 사상이 된 경우입니다. 위 두 가지를 다 취해야 정통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간혹 위트니스 리 책에 언뜻 보면 삼위의 독립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이 보이는 것은 성경본문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이 성경 그대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삼위의 독립을 인정치 않는 양태론 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결국 요14:10-11을 말씀한 예수님 자신도 양태론 자로 정죄한 최삼경 목사처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학과 교리를 성경본문보다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들인 것입니다. 

 3) 게다가 니케아 신조와 관련해서 '인격이라는 단어는 성경용어가 아니고 신학자들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가지고도 지방교회는 니케아 신조 자체를 부인한다느니 지방교회측이 이중성이 있느니 없느니 라는 인신 공격적인 말까지 함부로 하고 계십니다. 니케아 신조는 이단들에 대항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실체'이심을 명문화하고 '또 우리는 성령을 믿사옵나이다' 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한 아버지, 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존재를 선포한 의의가 있습니다. 물론 지방교회측도 이것을 믿습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지방교회측을 교회역사에 무식한 양태론자들' 이라는 자신의 거짓되고 부당한 착각의 틀에 밀어 넣기 위해 계속 무리를 하고 계시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단지 인격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니케아 신조 내용이 맞고 우리도 인정하지만 그 한 신조가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모든 방면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며 니케아 신조는 진지한 삼위일체 논쟁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뿐이고 사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립된 삼위가 분리되지 않으신 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상호내재 개념(페리코레시스)은 니케아 신조 이후에 캅바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비로소 정립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대화조차 공감할 수 없는 토론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저는 다음 세 가지 항목들에 있어서 저와 이00 님 의 입장을 독자들의 입회 하에 집중 검증해 보기를 제안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항목들에 대한 양쪽의 입장을 들어보면 누가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말하며 누가 자신의 교리에 빠져서 결국 성경과 정통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단사상을 가진 자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신론 토론은 조기에 종결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삼위일체 진리에 있어서 다른 부분들은 쌍방이 서로 일치하나 다음 세 가지에 있어서 이견이 있습니다. 

  1. 경륜적인 방면에 있어서 삼위의 상호내재에 대한 관점의 차이  

반복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성경본문 가르침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심과 동시에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안에도 구별됨을 상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신다고 토론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00님은 존재에 있어서는 상호내재를 인정하지만 '상호관계적인 표현으로 볼 때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금방 간파했지만 독자들은 이인규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쌍방의 입장을 들어보고 비교해 보면 누가 성경대로 말하고 누가 이단사상을 고집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관찰방의 질문을 제 것으로 옮겨와서 이인규님께 재차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인규 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분은", 

1) '성부하나님만'이시다(성부고난설 이단사상) 

2)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은 채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시다. 이 때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심과 동시에 하늘보좌에도 계신다(저와 지방교회측의 주장). 

3) 아버지는 하늘에만 계시고 아들 안에는 안 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제외된 '아들 하나님만' 이시다(이인규님 주장)

라는 1) 2) 3) 중 님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만일 님의 주장이 위 셋과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지금 자신의 잘못된 잣대를 가지고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성부고난설'을 믿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고,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등 삼신론적인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위 2)항이 지방교회측 주장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신격의 삼일성이 분리된 세 위격들로 나뉘어 질 수 있다는 관념을 붙잡지 말라. 이것은 누룩이다. ...그 셋(아버지, 아들, 성령)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 한다. 한 분이 이곳(지상)에 있을 때 셋 모두가 이곳(지상)에 있다. 한 분이 하늘에 계실 때 모두가 하늘에 계신다. 그 셋은 항상 하나이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288쪽).

님은 오직은혜님이 이 문제에 대해 관찰 방에서 질문 하자 '지방교회측의 아버지가 예수 안에 계시는 것은 맞지만,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라고 슬쩍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지방교회측이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까? 또한 님의 이단사상인 '인격 안에 인격은 없다'는 말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이 두가지 점들을 위 질문에 대한 님의 답변에서 상세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볼 때 님의 이러한 이단적인 관점은 성육신, 인생, 부활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분이 누구신가 에 대하여 님이 가지고 계신 총체적인 혼동의 한 단면 즉 빙산의 일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정통 신학자들과 성경말씀 자체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인규 님의 주장이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폭로시켜 주고 있습니다.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삼위의 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가 다 들어 있다. 각 위격 상호간에 또 위격과 실체간에 '공동내재성' 또는 상호상통성이 있다.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수많은 이단들을 모두 다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이 이론의 성경적인 근거는 요한 복음 14:10의 말씀이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박사학위 논문), 29쪽). 

요한 복음 1:18은 이 땅 위에 내려오신 독생하신 아들이 동시에 여전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속에 계시다(현재시제)고 하고, 요3:13 (영어 킹제임스 본문)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사실임과 동시에 여전히 하늘에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님의 '상호관계적인 표현으로 볼 때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주장은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치명적인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의 극심한 피해는 추후 구원론 토론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될 것입니다. 

  2. 성경본문 자체가 소위 정통 삼위일체교리와 충돌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저는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며 신구약 66권이 다 무오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외견상 불합리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자기 생각을 따라 함부로 불신하거나 무리하게 체계화 하려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을 포함한 지방교회 모든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교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성경본문 자체가 '아버지=아들', '아들=성령'이라고 말함으로 외견상 삼위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본문 자체를 불신하거나 함부로 왜곡시켜 해석합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이제 이인규님께 질문 드립니다.  

1) 이사야 9:6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은 누구이며 '영존 하시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2) 고전15:45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살려주는 영)이 되셨나니' 에서 마지막 아담은 누구(몇 격)이며, 생명 주는 영은 누구(몇 격)입니까? 그리고 '되었나니'는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3) 고후3:17의 '주는 영이시니'에서 앞의 '주'는 누구이며 뒤의 '영이시니'는 누구입니까?  

4) 계5:6 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어린양이 섰는데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누구이며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일곱 영은 누구입니까? 

위 질문들 각각에 대해 이인규님의 해석관점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 성경본문 내용들은 그 자체가 '삼위의 독립된 인격'이라는 교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눈엔 양태론 이단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 그대로 믿고 말함으로 이인규님 같은 교리지상주의자들에게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든지 아니면 그러한 비난을 피하도록 성경본문을 왜곡되게 해석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이인규님의 두 번째 부딪치는 부분입니다. 소위 님의 요14장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보혜사 성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여기에 해당 되는 문제들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인규 님처럼 소위 정통교리에 따른다면 이단이 되기 싫어서 성경 본문을 엉뚱하게 왜곡시켜 해석해 버리면 그 구절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져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날 많은 참된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과연 누구 신지-성령인지, 예수님인지, 둘 다인지, 아버지는 아닌지....-에 대해 혼란이 있는 것은 이처럼 성경본문을 성경대로 해석하기를 꺼려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위 말씀들을 문맥대로 깊이 연구한 정통 신학자들이 예를 들어 고후3:17의 본문대로 '예수 그리스도=성령'이라고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아래 내용들은 풀러신학교 교수인 루이스 스미디즈가 쓰고 현재 월간 교회와 신앙에 고정 글을 쓰고 있는 현 장신신학원 교수인 오광만 님이 번역하여 국내 기독교계에 소개하신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여수룬, 1991년)의 내용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바울)의 말은 극적이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고린도후서3:17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은 삼위일체의 삼위이시다. 바울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이라고 표현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64-65쪽).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은 지상에서 그의 구속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2.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체험되는 그리스도이시다.
  3. 성령은 지금 여기 존재하시는, 그러나 장차 완전히 실현될 새로운 창조를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그의 세상적인 기능들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4. 성령은 새로운 창조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을 위한 객관적인, 그러나 역동적인 규범이시다.
  5. 따라서, 새 언약 안에서의 삶에 관한 한, 성령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다(위 책87-88쪽)'.

저자는 계속해서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교리적인 강설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령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움직임'-이것이 바로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경륜적인 방면의 삼위일체라는 것임-필자 주-배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아래 글은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 동근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인 http://new-jerusalem.org/mean.htm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 어거스틴은 '영(성령)을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는 위배이다. 신학이 삼위일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 전혀 훼손하지 않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또는 '예수는 영이시고(고후3:17) 예수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해도 삼위일체를 훼손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와 '예수님의 영은 성령이다'(또는 '주의 영은 성령이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해석상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똑같은 말이다.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 라는 성서적 표현만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함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안에 성부는 성령이시며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하늘나라인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함께 한 작용으로 역사 되고 있다.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까지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성령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첫째, 성경의 위배이며 두 번째, 어거스틴의 20여 년 간의 노작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파괴 행위인 것이다.  

신학을 향한 충고:'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지극히 성경적인 해석은 이외에도 앤드류 머레이, 존 넬슨 다아비, 헨리 알포드, MR 빈센트, 제이 오스왈드 샌더스 같은 신실한 정통 신학자들도 주장하는 것입니다(신약의 결론-하나님 331-332쪽). 성경을 섣불리 알고 자신의 교리만을 중시하는 일부 사람들이 함부로 '양태론'이라고 경솔한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성경대로 믿는 것이 곧 삼위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어떤 비평가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요(사9:6), 그 영(고후3:17)이라고 가르칠 때, 그는 신격의 세 위격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부인하고 삼위양식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비평가들이 ...마 3:16-17을 믿는지를 물어 본다면, 나는 마 3:16-17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계된 모든 구절들(계1:4-5, 고후13:13, 엡3:14-17)을 다 믿는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양태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한다.'(윗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305-306쪽). 

3.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완결된 영)에 대한 이해 부족 

이인규 님은 지난 글에서 '첫 번째 영은 생명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친 하나님 자신이다. 이 영은 최종 완성된 삼일 하나님이다'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내재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 중 하나로 님이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인규님이 분리된 셋을 주장하는 증거입니다.  

이인규 님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한 고전15:45에서 '생명주는 영'이 아래 넷 중 무엇이라고 해석하십니까? 생명주는 영은,  

1) 예수님의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2) 1격과 2격은 제외된 3격 성령하나님(보혜사 성령)이시다. 

3) 1격과 2격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 내재하시는 3격 성령님 이시되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은 인성은 절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4) 생명주는 영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고 상호 내재하시는 아들하나님(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다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 + 예수님의 영화롭게 된 인성(육신) 즉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복합적인 영이시다. 

물론 4)이 저와 지방교회 측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성경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진리입니다. 앤드류 머레이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님도 위 본문 말씀에 대해 저처럼 빛비춤을 위트니스 리 책자를 보는 눈의 비늘이 한 꺼풀 벗겨지는 체험을 하시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요한 복음 7:39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님은 2)번 또는 3)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저와 이인규님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차이가 위트니스 리의 가장 균형 잡히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련 언급들이 님의 눈엔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핵심원인인 것입니다. 이제 이 구절에 대한 님의 해석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주실 차례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기준들에 대한 쌍방의 이견들이 풀리면 이인규님이 지난 글에서 이것저것 문제점이라고 갖다가 제시한 내용들은 다 풀려나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4. 그 외에 몇 가지 추가적인 문제들  

 1) 소위 10가지 질문들에 대하여 

위의 님의 질문들은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와 인격적으로 구별된 삼위가 각기 다른 삼위라는 전제가 정당해야 답변의 가치가 있는 질문들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시는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각기 다른 분이라는 님의 삼신론 이단사상이 맞다고 볼 때 성립되는 질문입니다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저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가 다른 분이라고 보는 님의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셨고(요8:16, 29), 부활 승천 후 하늘 보좌 우편에 게신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지금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십니다(롬8:10, 34). 그리고 이 분은 각기 다른 두 분이 아니고 동일한 한 분이십니다. 이 점이 해결되면 모든 의문이 해결되실 것입니다. 

 2) 분리와 독립의 차이 

 이인규님은 분리와 독립을 왜 상호내재와 연관 짓느냐고 항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 인격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이 곡 상호내재의 부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님은 지금 계속해서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되심을 잃지 않은 상태로 상호 내재하신다는 지방교회측 주장을 양태론 이라고 정죄하고 계시고, 삼위의 관계 안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고 고집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님이 삼위의 구별에서 지나쳐 분리를 주장하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님이 이단적인 신관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할 사항이지 누가 사과할 문제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3)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에 대하여 

님은 엉뚱하게 로마서 1:4의 아들 하나님이 부활 후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을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님의 억지 정죄와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님은 이런 말을 하실 때 잘 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님의 말과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성을 분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통상 '예수님이 하나님 사람이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을 님처럼 예수님의 양성을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이다 라고 꼬아서 들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골1:15-18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우리도 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추후 더 상세히 말할 필요가 있다면 그 때 하기로 하겠습니다. 

진리의변호와확증

님의 이런 엉뚱한 정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방교회의 다양한 이단성'이기는커녕 이미 그 모든 항목들에 대한 반박자료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케케묵은 거짓 정죄들일 뿐입니다. 그 한가지 증거만 제시한다면 님의 피조물 운운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한 반박의 글은 지금부터 20년 전에 이미 쓰여졌고 '진리변호와 확증'(한국복음서원) 122-128쪽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님은 자기 생각만이 항상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일을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신학교리는 성경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소위 정통교리라고 알려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본문을 왜곡시키거나 부인케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본문을 기준으로 그 교리를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성경은 다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진리에 교리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다만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를 주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교리나 혹은 성경을 남을 부당하게 정죄 하는 도구로 가볍게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를 보존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9. 05:00

찬송가 555 - 시대를 전환할 나실인 돼 - shulammite son - 지방교회들 찬송가

찬송가 555 - 시대를 전환할 나실인 돼 - shulammite son - 지방교회들 찬송가


*출처:Hymnal.net / 번안:Praisenote*

1. 시대를 전환할 나실인 돼 마음 감동한 사람 헌신케 해
이기적인 추구에서 돌이켜 모든 묶임 깨뜨리사 해방해
주님은 날 필요로 해 주 원하심 성취해 내 사랑 다시 불 붙이사
자원해 헌신할 사람 필요로 하네

2. 시대를 전환할 나실인 돼 우릴 강화시키어 끝날까지
거역함과 타고난 애정 죽음과 땅의 기쁨 육체의 소욕 이기리
주님은 날 필요로 해 주 원하심 성취해 내 사랑 다시 불 붙이사 
자원해 헌신할 사람 필요로 하네

3. 완전하게 분별되어 그의 길을 얻으사 항상 이기고 승리함으로 이 시대를 완결해
주님은 날 필요로 해 주 원하심 성취해 내 사랑 다시 불 붙이사 자원해 헌신할 사람 필요로 하네

 http://www.localchurch.kr/hymn/25502 (악보 가사 출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9. 05:00

말씀과각주 326 - 로마서 8장 30절 - 지방교회들 말씀

로마서 8:30 또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죄인들을 율법의 유죄 판결에서 해방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이끌어 주는 다리이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9. 05:00

신성한 삼일성 (또는 삼위 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계시는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 (인격) 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a living soul)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그 영 (the Spirit)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여기에서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그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성경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하고,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으므로 이제 영이시라고 불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임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해석들이 그 모든 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의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monarchia) 곧 유일성(unity)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영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그 영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2 나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1] 10-11쪽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되는데, 그 구절은 아버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한다. 또한 아들도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해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도 그분을 두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욱이 그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한다. 따라서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하시다… 요약하면,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7-38, 42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 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성경이 어떻게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 (相互內在) 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절, 23절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이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은 아버지의 운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삼일성 안에는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 상호 왕래 (inter­communion) 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 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장로훈련3권-이상을 실행하는 길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는 아들께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 (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우리는 삼일성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 확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신성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알기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 바랍니다.


[1]  본 고에서 인용된 LSM자료들의 대부분은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역자 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8. 05:00

찬송가 554 - 꿈도 꾸지 못했네 - 지방교회들 찬송가

Never did I dream before

1. Never did I dream before, Such a place could e’er be found,
Where the tears of sorrow cease, Songs of endless joy abound.
One who seldom ever sang, Now delights his voice to raise;
Singing hymns with all the saints, Echoing the ceaseless praise.

2. Day by day the world goes on, Just as it has gone before.
Millions grasp and clutch at life, Wond’ring if there could be more;
Such was I and would be, yet Mercy found me out somehow;
With what gratefulness I say, I’m in God’s own family now.

3. How delightful ’tis to know; How subjective, real, and sweet
Is this inward joy of grace We experience when we meet;
Life abundant Jesus gives As my full reality;
Praise You, Lord, it’s really true, I’m in Your own family.

4. At the closing of this age, Just before Your kingdom’s dawn,
May You gain a people, Lord, For Your dwelling place, Your home.
Since for me You gave Your all, Everything I lay aside;
For Your church my all I’d give, That You would be satisfied.

꿈도 꾸지 못했네

꿈도 꾸지 못했네 이런 곳을 찾을 줄 슬픈 눈물 그치고 기쁜 노래 넘치네

노래 없던 사람도 소리높여 찬양해 성도들과 노래해 찬송 울려퍼지네

세상은 늘 똑같이 흘러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헤매네 뭔가 있는 줄 알고

나역시 헤매다가 주풍성 체험하여 하나님의 가족 돼 주께 감사드리네

은혜의 기쁨 알때 즐거움이 넘치네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실제인지

우리가 모일때에 주풍성 체험하네

왕국새벽 오기전 이시대 마칠때에 주의 거처 위하여 주의 백성 얻도록

주께 모두 바치네 주가 다 주셨으니 주의 만족 위하여 교회위해 드리네.

posted by 샬롬1 2018. 7. 7. 08:19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의를 추구함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하나님의 통치권임을 보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같이 올바르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미워한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당신 역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나 당신은 신실하지 못하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므로 당신 또한 신실해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올바른 것이다

하나님은 정직하시다
그러나 당신은 정직하지 않다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같이 올바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의 관념의 따라 올바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같이 올바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조화되는 것이다

젋은 사람들은 오늘날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즉 그분의 다스림을 회복하기를 추구하고 있어야 한다

날마다 당신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굴복해야 한다
더욱이 당신은 하나님의 왕국을 추구하면서 또한 그분의 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과 완전히 조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먼저 왕국을 추구해야하며 그럴때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의가 있게 된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의는 바로 하나님을 따라 올바른 것 즉 라나님과 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과 같이 온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그분의 통치권 아래 머무는 사람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통치권 곧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한 모든 것은 당신의 통치권 곧 당신의 권위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대표하려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어야 한다


높은 복음 전파를
위한 생활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7. 05:00

찬송가 553 - Lord Jesus, You are Lovely - 지방교회들 찬송가


*출처:Hymnal.net / 번안:Praisenote*

1. Lord Jesus, You're lovely. You're more to be desired,

Than any earthly pleasure. You're fine, beyond compare.

Lord Jesus, Your beauty Does far exceed all others.

You're comely and You're tender. You're radiant and You're fair.


2. When I behold You Jesus, You draw my heart completely.

I cannot turn away Lord, I rest in Your embrace;

And time is gone there's only Your holy, matchless presence

Abiding in You, gazing Upon Your glorious face.

3. I give my life to You Lord, For You alone are worthy.

There's nothing and there's no one That I desire but You.

May all my days be Yours, Lord, My heart be given to love You,

To treasure and to serve You By Your sufficient grace.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7. 05:00


지방교회들 - 복음 캠페인

1만5천여 성도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서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컨퍼스를 하고 있다. 26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컨퍼런스 2007,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주제 하에 약 1만 5천명(해외 성도 500여 명 포함)이 모여 대규모 복음 전파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 행사는 한국복음서원, 로고스코리아, 성경진리사역원(이하 ‘주최 측’이라 표기함)이 주최하는 것이다. 

주최 측 관계자에 따르면, 실내 체육관 복음집회 후에 약 만 여명이 가두 행진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행진코스는 실내 체육관에서부터 코엑스까지 약 2km이며, 한국전력 앞 광장에서 해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부분 가두 행진은 불만이나 요구조건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 가두 행진은 아주 평화적이고 특별하게 진행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가두 행진은 복음의 영을 회복하는 의미를 담고 진행되며 행렬 중간 중간에서 크고 작은 북을 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도덕을 사랑하자”는 표어를 통해 복음전파를 선포한다. 뿐만 아니라 복음 행진 기간 동안 이번 행사의 주제인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표어도 반복해서 선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제 아래서 다음의 일곱 가지 항목으로 세분화 된 선언문 내용을 보면 이번 행사의 주된 의도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실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말이 이번에 처음 나온 구호는 아니다. 멀리는 종교 개혁자들도 ‘오직 성경'을 외치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했었다. 주최 측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이번 행사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오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런 가운데 성경의 절대 권위에 대한 불신이 우리의 근본 신앙을 손상시키는 심각한 요소들 중 하나임을 지적하는 성경학자들이 있다. 따라서 성경을 참되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정도까지 성경을 신뢰해야 한다.


26일, 서울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컨퍼런스

선언문 발표하고 복음전파 거리행진


둘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자는 제안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면 왜 이런 제안이 나올 수밖에없었는지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미국의 경우 성별된 근본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성도들 중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5% 미만이라는 통계가 있다.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운동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실천에 옮기고 또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함께 운동할 친구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같은 원칙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은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그룹을 만들어서 읽자는 것이다.  

셋째, 성경은 연구의 대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영적 양식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한다(마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의 대상으로만 대하기 때문에, 성경 지식은 많은데 실제 삶 속에서 말씀의 힘으로 사는 체험이 부족하다. 따라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섭취하고 소화하여 성경의 말씀에 따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사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주최 측은 대회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일년에 일독하는 성경읽기표를 나눠주고,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이 담긴 포켓 성경을 선물로 준다고 한다. 모든 믿는 이들은 누구나 각지에서 적절한 숫자의 그룹을 형성하여 규칙적으로 함께 성경을 읽도록 도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경공부 모임'의 주된 초점은 그 모임의 구성원들과 그들의 믿지 않는 가족들, 친구와 친지들, 직장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다고 한다.  

한편 이번 행사를 주최하는 한국복음서원은 미국 ECPA(복음주의 기독교 출판 연합회)의 정회원이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자만을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의 출판물을 한글로 번역 소개하는 곳이다. 로고스코리아는 지난 20세기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성경 진리 중에서 엄선된 소중한 진리들을 담은 책자를 무료로 배포하는 문서선교기관이다. 성경진리사역원은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에게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성격을 훈련하여 유용한 복음전파자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행사 후반부 큰 거리서 

복음 캠페인

코엑스 한국전력앞까지 2km

이번 행사 후반부에는 복음 대행진이 예정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큰 거리에서 행진 한 번 한다고 해서 과연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현재 한국의 복음화율은 25%를 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교인수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선교학적으로 ‘사회 복음화 비율이 20%를 넘게 되면 불신자들과 관계를 형성한 다음에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이론이 있다. 오이코스 코리아 대표 이상만 목사는 “현재는 완전한 하나님처럼 사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전도의 효과가 없는 시대”라고 말한 바 있다. 주최 측도 이런 행사를 통해 당장 복음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 행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복음의 영을 분발시킴으로 복음 전파에 대한 담대함을 갖고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통계상으로는 한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생활 가운데서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목표는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여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별히 주최 측은 이번 행사의 주된 목표가 일부 성직자들이나 직분이 있는 사람들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들이 일어나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또한 온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25%의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75%의 사람들임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복음 전파를 강조하지만,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전파보다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끌어오는 ‘교회 바꾸기’ 또는 ‘수평이동’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목표는 건전하며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선 언 문- 

 1.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임을 선언한다.

 2.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서 호흡해 내신 것임을 선언한다.

 3. 우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이해할 영이 있음을 선언한다.

 4.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일들의 해답임을 선언한다.

 5. 우리는 사람이 매일 성경을 읽도록 부름 받았음을 선언한다.

 6. 우리는 모든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고 온전하게 되도록 정해졌음을 선언한다.

 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축복할 것임을 선언한다.


목회자신문 551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 첨부파일 클릭)

지방교회_목회자_551호_070825.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7. 03:00

생명이만나 334 - 기도가 아닌 기도를 방지함 - 지방교회들 이만나

생명이만나 334 - 기도가 아닌 기도를 방지함 - 지방교회들 이만나

(마6:7)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