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0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소유하기 위해 그분의 체험 안에서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며 그분을 따르고 배우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는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완전히 외적으로 그분을 모방할 것을 가르친다. 15세기 토마스 아 캠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외적인 삶을 모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의 신학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모방하고, 그분께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약의 어떤 구절들은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서들 안에서 주 예수님은 종종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고했다(고전 11:1). 그러한 구절들은 외견상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성경 교사들이 믿고 있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그분을 외적인 본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갈 2:20).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를 그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가르침 받았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결심했어도, 그들은 결국 성질을 내고야 만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실패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강한 의지로 성공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가르침의 실행일 뿐이다.
그런데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신서들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권하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한다. 위에 언급한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고백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도 그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라고 간증했다.
우리가 결혼 생활에서 주의할 것은 다투려는 유혹이 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을 때는 부부싸움을 하려는 유혹이 온다 해도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다투지 않을 것이다. 배우자와 다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대신,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
새 신자들이 외적인 방식으로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흉내를 내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단지 그리스도를 사는 것만을 알 뿐이라고 간증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오 주 예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과 대화하기 시작하며, 그분과 교통하기 시작하며 그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먹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살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다면, 마귀의 어떠한 유혹을 받는다 할지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귀와 모든 귀신들을 패배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으로 사는 생활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종교와 다르며 공자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것과도 다르다.
내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학교에 다니는 나의 누님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어느 날 누님은 나에게 어떤 성경 교사에 대해 알려 주었는데 그는 매우 인내가 있었고, 항상 손에 성경을 가지고 천천히 걸으며, 종종 멈추어 하늘을 보거나 성경을 보곤 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을 때 그렇게 해 보려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흉내를 내는 「원숭이」와 같았다. 나는 빠른 사람으로서 느리고 인내하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는 포기했다. 그러다가 나는 속 생명 무리들과 접촉했고, 그들의 어떤 가르침을 통하여 빛 비춤을 받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밖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대신 우리는 그분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살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이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누릴 필요가 있다. 이것이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또 한 번 승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아멘
한 해의 시작에 있는 유월절과 한 해의 끝에 있는 장막절에서 우리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본다. 인생의 시작에서 우리는 기대로 가득하지만 또한 배고프기도 하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배부르지만 목마르게 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일곱 중 절기 중 처음 절기이며 장막절은 마지막 절기이다(레 23:5, 34). 일 년의 처음 절기인 유월절은 사람의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며(출 12:2-3, 6) 사람의 생명은 그의 만족을 추구함과 그의 배고픔으로 끝남을 포함한다.
일 년의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은 어떤 노동이나 일이 다 끝나고, 안식과 누림의 명절이요 사람의 생명의 완성과 성공을 의미한다(출 23:16 참조).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그의 목마름으로 끝나고 결론지어질 것이다. 유월절의 광경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는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셨다. 장막절의 광경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7:37). 그러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을 약속하셨다(뇨7:38).
유월절은 일 년 중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는 연초에 행해졌다.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일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만족하기 위해 뭔가를 수고하고 추구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반대로 장막절은 추수가 끝났을 때에 있다. 사람들은 곡물과 포도를 수확했다(신 16:13-14). 추수의 모든 것이 수확됐으며 사람들은 장막절에 함께 와서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심지어 그들의 종들과 함께 모든 것을 누렸다. 일은 끝났고 곡식은 거두어 졌으며 곡물과 포도주는 수확되었기 때문에 장막절 동안에는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안식하고 누렸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누림 안에서 기뻐할 시간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목말랐다! 이것은 그들이 성공을 해도 그들의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계시한다.
요한복음 6장에는 배고픔으로 끝나는 인생의 시작이 있으며, 요한복음 7장에는 목마름으로 끝나는 인생의 성공과 완성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한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수고하고 일하고 일생동안 분투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함을 설명한다. 후자의 경우에서 사람들은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이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함을 설명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얻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두 경우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쉬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하고 있든 쉬고 있든 우리의 배고픔이나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식이시며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수를 주실 것이다. 사실상 사람은 오직 둘 중 하나 안에서 존재한다. 한 부류는 그들이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구하고 일하고 분투하고 수고해야 한다. 다른 부류는 그들이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부유함을 기뻐하고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수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대학교 1학년이라면 우리는 공부에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이것은 유월절과 같다. 졸업한 후 학위를 받고 좋은 직업을 갖고 부자가 될 때, 일과 수고가 끝났기 때문에 이것은 장막절과 같다. 이제 우리는 쉬며 우리의 수고의 대가를 기뻐하고 누리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자이든, 빈곤하든 풍족하든 우리는 배고프거나 목마름을 깨달을 것이다. 청년으로서 우리는 아마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아내와 돕는 배필과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배고픔을 나타낸다. 우리가 가장 좋은 아내와 결혼하고 가장 좋은 아이들을 갖고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70세나 80세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처음 결혼했을 때 우리는 배고프지만 결혼한 후인 지금 여전히 우리는 목마름을 느낀다.
그리스도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실 뿐 아니라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수가 되신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졌을 때에도 속의 목마름이 여전히 지속됨을 깨닫는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생수를 갖고 계신다. 아무 것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먹이시는 생명의 떡이 필요하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생수의 샘이신 주 예수님이 필요하다. 아멘
오늘은 안식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레위기 23장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레23:3 “그러나 일곱째 날은 완전히 안식하는 안식일이며 거룩한 모임을 소집하는 날이다.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이날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여호와에게 안식일이다.”
레위기 23장은 명절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명절을 얘기하면서 먼저 안식일을 언급하는 것은 왜인가? 이것은 안식일이 명절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명절은 믿는 이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믿는 이들 서로 간에 단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명절인 안식일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백성 서로 간에 누리는 안식을 상징한다. 매 칠일마다 안식과 누림을 위한 하루가 있었다. 그날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안식일에 함께 모여야 했음을 가리킨다.
만일 모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 간에 단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안식일의 원칙은 어떤 날을 안식일로 지키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안식일의 원칙은 주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인식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의 의미가 단순히 일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 2절은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완성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그분께서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라고 말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는 안식일이 일곱째 날이지만 사람에게는 안식일이 첫째 날이다. 6일동안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이 생존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후인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에서부터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하나님께는 일곱째 날이었지만, 사람에게는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먼저 육일 동안 일하셨고, 그런 다음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의 첫째 날에 안식했고, 그런 다음 일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보셨을 때 안식하고 신선하게 되실 수 있었다. 사람은 시원한 음료처럼 하나님의 갈증을 풀어 드리고 그분을 만족하시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끝내시고 인식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에게는 동반자인 사람이 있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 안식과 신선함을 주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동반자인 사람에게는 바로 첫째 날이 안식과 신선함을 주는 날이었다. 사람의 첫째 날은 누림의 날이었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림을 갖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일할 것을 요구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누림을 주신다. 하나님과 함께 그분 자신을 충만이 누린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누림을 갖고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모른다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모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바에 따르면 단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될 필요가 있다. 그럴러면 우리는 그분을 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분의 일 안에서 어떻게 그분과 하나가 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일에 대한 의무는 이미 하나님께서 감당하셨다. 하나님의 몫은 일하고 누리는 것이지만, 사람의 몫은 단순히 누리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후 그의 첫째 날인 안식일 안으로 들어가 안식하고 누렸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는 일하기 시작했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는 일이 첫째이고 누림은 둘째이지만 사람에게는 누님이 첫째이고 일은 둘째이다. 이것은 은혜 원칙에 관한 이상이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나서 누리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누리고 나서 일한다. 이 원칙은 창조에서뿐 아니라 구속에서도 동일하다. 주님은 구석을 위해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구속을 성취하신 후 주님은 그 결과를 누리셨다. 주님은 먼저 일하시고 나중에 누리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누리고 나중에 일한다. 구속과 은혜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모든 것이 끝마쳐졌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성취하신 것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얻는다.
매주 있는 안식일은 완전하고 엄숙한 안식이었다. 그것은 가볍거나 평범한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누림을 위한 거룩하고 신성하며 중요한 안식이었다. 이 완전한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도 철저한 안식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백성 서로 간에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의미한다. 안식일는 여호와에게 안식일이었다.(레23:3) 이 안식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안식이라는 것과 그분께 구속받은 백성도 안식에 참여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거룩한 모임, 곧 모든 명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와 함께 인식하고 있다.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자.
출애굽기 31장 13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반드시 너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시이기 때문이다,” 14절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누구든지 이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여햐 한다. 누구든지 이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끊어지게 된다.”
15절 “육일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완전히 안식하는 안식일이며, 여호와에게 거룩한 날이니,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햐 한다.
1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고,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절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우는 영원한 표지이다. 이는 여호와가 육일 동안 하늘들과 땅을 맏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해졌기 때문이다.”
민수기 15장 32절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있을 때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나무하는 사람을 본 사람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에게 데리고 왔다. 그들은 그를 가두어 두었다. 왜냐하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36절 “그래서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서 죽였다.”
이상을 볼 때 구약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엄격한 날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어기는 것이다. 십계명에서도 제 4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면 그렇게 엄격하게 다루셨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 이것은 주일날이 신약에서 안식일이 된 것을 의미한다. 안식교를 비롯하여 지금도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고 있는 단체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안식일을 지키고 있지 않지만, 그 원칙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한 날로 고정시키고, 마치 유대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안식일을 범한다 해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영적으로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멘
중국에서 유입된 사교(邪敎) 집단인 전능신교의 실체 해부 및 대응 전략을 위해 종교문제대책전략연구소(소장 심우영 목사)가 9월 11일 오후 2시 서울 롯데시티호텔 구로점에서 ‘동방번개(전능신교) 정체와 대응 전략 세미나’를 개최했다. 3부로 나눠 진행된 이번 세미나에선 심우영 소장의 인사말과 더불어 한국교회 주요 사이비 이단 집단과 동방번개의 유사성을 발표했다. 이어서 하지진 원장은 동방번개의 정체와 특징에 대해서 PPT를 사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전능신교의 배경, 전능신교의 교리와 위해성과 대처법을 발표했다. 제 3부에서는 중국 가정교회 목사인 유서해 목사가 피해사례를 발표했다. 유목사는 직접 오지 않고 인편으로 동영상을 찍은 USB를 보내왔다.
전능신교는 지방교회와 연관성이 없다
15년간 전능신교를 연구해온 美 아시아 리서치 연구 센터 하지진 원장은 “전능신교의 전체 교세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하남성 이단대책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하남성에만 전능신교 신도 수가 80만명에 달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가정교회를 주로 공략했던 이들은 해외로 확산되어 한국과 동남아 쪽, 그리고 미국에도 파고들고 있는 실정”이라며 전능신교의 배경과 교리의 위해성, 대처법 등을 강론했다.
특히 하 원장은 그간 한국교회에서 발간된 전능신교 자료의 오류를 언급하며 “한국교회에서 발간한 자료들 중 전능신교의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이란 책자를 무작위로 인용해 일부 인물과 교회가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발표했지만 사실은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용된 관계자들과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단적인 예로 하 원장은 중국책 ‘Understanding False Religion’ 55-56쪽을 인용한 ‘위트니스 리는 1978년 중국에 돌아와서 호함(呼喊)파를 세웠다’는 부분에 대해 “조사 결과 ‘Understanding False Religion’ 55-56쪽엔 이런 글이 없는데다 위트니스 리는 1949년 이후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밝혔다.
더불어 ‘조유산(전능신교 교주)은 지방 교회의 일원으로 위트니스 리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전능신교의 가르침과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완전히 반대된다. 또 지방교회들(위트니스 리)은 적극적으로 전능신교를 반대하며, 조유산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2017년 9월 중국 반이단 협회 홈페이지에서는 위트니스 리(이상수)의 이름을 호함파 명단에서 삭제했고, 현재 호함파의 교주 명단은 비어 있다. 이 점에 있어 하 원장은 “중국 정부가 문화혁명 때 삼자교회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함파라고 누명을 씌우고 우두머리가 위트니스 리라고 했다”며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선 장기간을 두고 정확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했었다.”고 말했다.
전능신교의 가르침과 실행, 사회에 주는 피해
1999년 10월 ‘파룬궁 사건’에 대응하여 중국 정부는 최초로 ‘이단 종교’에 대한 정의를 제정했다. 그리고 2017년 2월 1일에는 ‘사이비 종교, 조직’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종교나 기공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혹은 다른 명의로 세워진 교주를 신격화하고, 미신과 사이비를 날조, 전파하는 등의 수단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혼란하게 하고 속이도록 핵심 구성원을 충돌질하여 발전함으로 구성원을 통제하고 사회를 위협하는 불법조직이다.”라고 했다.
위 내용과 함께 하 원장은 전능신교와 창시자 조유산(본명 조곤:赵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전능신교’는 기독교를 도용하지만 성경을 멸시하며 성경 대신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이라는 책을 대체해 사용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전능신교’는 교주를 신격화 하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종말론을 이용해 공포심을 조성, 미신을 전파해 신도들을 속인다. 또 위협과 공포, 저주의 방식으로 추종자를 통제해 조직과 교주를 보호하고, 포교에 실패할 경우 가족관계를 단절할 것을 선포한다.
‘전능신교’의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하 원장에 따르면 현재 이들은 많은 돈을 들여 영상과 드라마를 제작해 포교 중이다. 유심 카드 하나가 중국 돈으로 30위안이며, 그 안에 각종 자료가 포함돼 있다.
하 원장은 “전능신교는 가족 구성원과 친구들을 대상으로 개인적이고 비밀하게 한 가정 한 가정에게 전파하고 있다”며 “전능신교를 거절하면 폭력을 사용해 구타하거나 납치하고, 저주를 퍼부어 위협한다. 또 여자 회원을 이용해 남자들을 덧에 빠뜨리는 사례도 많다. 일단 전능신교에 가입하면 보증서를 쓰게 해서 공포심을 조장하고, 떠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녀를 버리고 격리시켜 가정을 파괴하고 헌금을 강요해 돈세탁을 해서 해외로 보낸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피해로 중국 내에는 피해자 대책 모임이 있고, 공안에는 피해자 신고처가 따로 있을 정도다. 여러 피해 중 가족 해체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2013년 3월 8일 대만기독교회들은 ‘전능신교’와 관련해 연합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이 조직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분별하여 잘못된 시스템에 빠지지 않고, 전능신교가 가져다주는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끝으로 하 원장은 “전능신교를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잘 아는 것”이라며 2002년 쫑푸 사람들 34명을 납치해 계획적으로 세뇌시키려 했지만 2명을 제외하고 영향 받지 않았던 사건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제 3부에서는 중국의 가정교회 유서해 목사의 영상자료를 보여주었다. 유목사는 전능신교에 대한 14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으로 만들었다.
2. 그리스도가 두 번 육신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3. 여그리스도가 재림했다고 가르쳤다.
4. 천국을 부인하고 영생을 부인했다.
5. 이미 왕국시대(국도시대)가 도래했다.
6. 여그리스도가 이미 와서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7. 전능신교 안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많으면 이익도 크고 공도 크다.
8. 성경의 본뜻을 왜곡하고 성경 단편을 인용해 성경을 반대했다.
9. 주님 보혈의 영구적 효능과 성령을 부정했다.
10. 욕정주의로 일관하며 많은 죄를 범하는데도 성결하다고 했다.
11. 기성교회를 분열시키고 교란시키고 있다.
12. 육체적 정욕으로 사람을 조직 안으로 유혹하고 거절하면 협박했다.
13. 중국 전통문화를 이용해 대중을 끌여들여 전능신교를 믿게 한다.
14. 어린 자를 때려 상처를 내고 불구가 되게 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서해 목사는 전능신교 회원들로부터 자신이 폭행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상처를 보여 주면서 영상을 통해서 증언했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어려움을 당할까봐 영상자료만 보냈던 것 같다.
한편 심우영 소장은 ‘한국교회 주요 이단 사이비 집단과 동방번개의 유사성“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사교(邪敎)단체와 ‘동반번개 전능신교’의 유사성에 대해 발표했다.
심 소장은 먼저 한국 교회 안에 이단에 대한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 혹은 그 단체가 왜 이단이냐는 물으면 애매모호한 답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그만큼 이단 연구가 주먹구구식이란 것이다. 나와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고, 교단 간의 다툼을 벌이는 등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며 “결국 성경적, 교리적, 현상적으로 어떠한가를 정확히 검토하고 조사하고 연구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이비와 이단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의했다. “종교학적으로 교주, 교리, 조직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갖추지 않아도 사이비”라면서 한국교회 주요 이단들의 교주, 조직 및 교세, 연혁과 변천을 살폈다. “동방번개 전능신교는 이단이라기보다 전형적인 사교(邪敎)집단으로 거기에다 폭력성이 더해졌고, 반사회적이고 패륜적인 악”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매주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접촉하는 실행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친척, 친구들, 이웃들, 동료들, 급우들 등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매주 두세 명의 개인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시간표를 짤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접촉할 때 주님으로부터 합당한 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문 두드리기를 하는 것이 시간 낭비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수고해야 할 사람들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소비하는 시간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 혼자서 출발해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와 함께 수고할 동반자를 얻어야 한다. 반 년 뒤에는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수고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산출할 수 있다. 반드시 우리가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매주 우리는 두세 시간을 들여서 개인들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사업처럼 수행해야 한다.(장로 직분과 하나님의 정하신 길 188-196쪽)
우리들의 가정에서 교회가 건축되면 그 가정들을 통해 복음을 확산할 수 있음
가정들을 잘 세우는 교회들은 대복음 집회를 가질 필요가 없다. 복음이 자연스럽게 확산될 것이다. 가정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혼, 사람의 영까지도 관통하며 깊이 파고 들어간다. 대복음 집회의 주된 강조점은 심는데 있지 않고 거두는데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가정들 안에 건축하는 것이고, 그런 가정들을 통해 복음을 확산하는 것이다. (사역지, 3권 5호, 영문판 9쪽)
가정집회(家庭集會)의 여섯 가지 위임(委任)
새 신자가 매주 가정 집회에 올 수 있다면 매우 좋은 것이다.
첫째로, 가정 집회를 통하여 새 사람들에게 기초를 놓으라.
둘째로, 가정 집회에서는 오랫동안 집회 생활하지 않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셋째로, 가정 집회가 튼튼해야 복음이 전파된다. 캠퍼스 사역도, 어린이 사역도 가정에서 해야 한다. 한 국가가 튼튼하기 위해서는 가정들이 튼튼해야 한다. 교회가 튼튼하기 위해서는 가정 집회가 건축되어야 한다.
넷째로, 가정 집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유지하고 지켜야 한다.
다섯째로, 가정 집회에서 그 풍성을 강화시켜야 한다.
여섯째로, 가정 집회가 풍성할 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올라가기 쉽지 않은 크고 높은 산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표-그리스도를 표현함-에 도달할 것이다. (가정 집회에 관하여, 22-24쪽)
가정집회(家庭集會)는 교회건축(敎會建築)의 시금석(試金石)이 됨
우리는 교회의 건축이 가정 집회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가정 집회를 건축하는가?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다. 가정 집회는 교회 건축의 시금석(품질이나 진품을 판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교회는 이 기초 위에 건축된다.
가정 집회에서 다섯 가지 중요한 일
첫 번째 일은 오랫동안 집회에 나오지 않았던 이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주소록에 의거하여 오랫동안 집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회복시켜야 한다.
두 번째 일은 모든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나이가 많든 적든 집을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2주마다 한 번씩은 가정을 열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격주로 가정에서 복음 집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가정 집회에서 사람들을 교육시켜 빛 비춰 주고, 복음 자료들을 제공해 줌으로 가정을 열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들을 유지하는 책임은 장로들이나 동역자들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지 않다. 사람들을 유지하는 책임은 가정에서 모이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있다.
네 번째 일은 가정 집회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풍성한 집회를 가지려면, 풍성한 말씀과 간증이 있어야 한다.
다섯번째 일은 가정집회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 위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살아있는 몸을 얻기 원하신다. (가정 집회에 관하여, 76-77쪽)
이집 저집에서 모이는 가정집회가 교회의 기초이다. 대집회는 일종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것과 강다. 사실상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가정집회이다. 큰 집회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만일 가정집회가 없다면 교회의 번식과 돌봄은 없을 것이다. 가정집회는 교회 번식의 생명선이다. 사도행전 2장은 성전에서 모이는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스케이트장에서 나가 이집 저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일단 어떤 사람이 가정집회에 들어가면 그는 보호되었다. 오늘날 웅장한 건물은 세상의 허영과 육체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집회장소의 기능은 교육과 섞임과 훈련이다. 대집회는 사람들을 경직되게 하고 수동적이 되게 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특별한 집회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초기 교회 사도들도 이런 습관 때문에 건물을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건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주후 70년에 통곡의 벽만 남겨놓고 다 무너졌다.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건물을 짓기 위해서 헌금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가기 위해서 가정집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새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생아임을 앎
우리는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다룸같이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유치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다룬다.
우리가 대학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대학 졸업생들이라는 것을 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로 생각해야 된다.
새로운 사람이 "성경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린 아기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하고, 태도나 어조도 합당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많은 질문을 할 때 이러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들은 매우 관심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16-217쪽)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새 신자들을 양육함
우리는 어린 아기를 돌보고 있다는 것과 아기를 위한 음식으로 갓난아이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을 먹일 때 너무 많이 먹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너무 많이 먹이면 그들은 소화불량에 걸려 입맛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향기가 좋은 것이나 달콤한 것으로 먹여야 한다. 주 음식의 맛이 달콤하다면 그들은 잘 먹을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가이다.
새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최선의 길은 찬송이다.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찬송하기를 좋아한다. 찬송하는 것은 정말 달콤하다.
우리는 짧고 간단하며 부르기 쉬운 찬송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는 찬송을 부르면 귀 기울여 듣고 나서 그것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세 번째 우리가 그 찬송을 부르면 그들이 함께 부를 것이다.
우리가 갓난아기를 도우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항상 기쁘게 해야 하고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 그 후에야 그들은 우리가 주는 것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47-248쪽)
새 신자와 '놀기'를 배움
아기를 양육하는 어머니는 어린 아이들을 먹일 뿐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으로 소중히 품는다. 그들과 노는 것이 그들을 소중히 품는 것이다. 아기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기쁨을 느끼고 나면 어머니는 그들을 먹인다. 우리는 반드시 새 신자들과 함께 '어떻게 노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과 함께 놀면서 우리의 손은 그들을 먹인다. 새 신자가 크리스마스라는 질문을 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크리스마스 주제에 점유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크리스마스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님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가져야 합니다. "라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크리스마스에 관한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라는 실제로 돌이키게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교통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어서 기뻐할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 신자들에게 자양분인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57-258 쪽)
가정 집회에 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을 만지고,
열게 하고, 소생시켜야 한다
새로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의 영을 만져야 한다. 우리는 생명 공과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어떤 중점이나 구절이 새로운 사람의 영을 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영이 만져진바 되면 우리는 좀 더 전진된 빛 비춤이나 계시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속에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영 안에 사시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영이 이제 한 영이 되기 위하여 연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 신자가 생각 안에서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영을 만지도록 이끌려 질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접촉한 체험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가 설명해준 후에 그는 즉시 이해할 것이다. 가정 집회에 갈 때에, 체험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을 만져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열려지게 하고 그들의 영을 소생시켜야 한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예비, 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