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햅시바 2018. 9. 4. 10:24

말씀

3:1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서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이 표적들을 아무도 행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니,

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수없습니다.``

4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수 있겠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수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그영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6 육체로 난것은 육체이고 그 영으로 난것은 영입니다.

누림

3장에 있는 사례는 거듭나게 하는 생명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기적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위한책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다. 그것은 들어가야 할 신성한 영역, 즉 신성한 생명이 필요한 영역이다. 오직 신성한 생명만이 신성한 것들을 깨달을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을 보거나 혹은 그안으로 들어가려면,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posted by 샬롬1 2018. 9. 4. 08:42

바울은 하늘에 속한 경주에서 멈추지 않았음


바울은 주님께서 그를 소유하신 후에 하늘에 속한 경주를 하기 시작했으며 경주를 마칠 수 있도록 계속 달렸다 [고전 9;24ㅡ27. 빌 3;12ㅡ14. 행 20;24]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라
그의 온 생애를 통해서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고 뒤로 물러가지 않았고 항상 달렸다
그는 끝 무렵에도 ``나는 지금도 달리고 있다``고 했다

빌립보서에서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좇아 달려간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계속해서 달리는 이의 영이다

그의 삶의 마지막에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한 것은 너무나도 좋은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에 장로들에게 그들의 청지기 직분 안에서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라고 권면했고 ``나는 내가 이 경주를 다 달리고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다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이 경주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출발점이다
둘째  골인 지점이 있다
셋째  달리는 과정이 있다
넷째  심판이 있다
당신이 이겼는지 졌는지를 판단하는 심판이 있다
다섯째  보상이 있다
모든 경주가 이와 같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주에도 출발점이 있다

그 출발점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때 바로 구원받은 날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 우리는 부르심받아 경주를 시작한 것이다

이 경주는 우리가 주님을 뵐 때까지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경주의 끝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노정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청지기 직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것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리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잘 달렸는지 못 달렸는지를 심판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격려하고 나 자신을 격려한다

우리 경주를 달리자
신실하게 잘 달려서 어느 날 인정받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의 공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고 거절되고 자격 없다고 가치 없다고 판단받기를 원치 않고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받을 보상은 썩지 않는 의의 면류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절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운동 선수들은 다 썩을 면류관을 위하여 달리지만 우리는 그러한 썩을 면류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면류관을 구하는 것이다


2002년 겨울 훈련 집회
미니스트리
고린도전서 결정 연구


바울은 주님께서 그를 소유하신 후에 하늘에 속한 경주를 하기 시작했으며 경주를 마칠 수 있도록 계속 달렸다 [고전 9;24ㅡ27. 빌 3;12ㅡ14. 행 20;24]

빌립보서에서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좇아 달려간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계속해서 달리는 이의 영이다

그의 삶의 마지막에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한 것은 너무나도 좋은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에 장로들에게 그들의 청지기 직분 안에서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라고 권면했고 ``나는 내가 이 경주를 다 달리고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다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이 경주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출발점이다
둘째  골인 지점이 있다
셋째  달리는 과정이 있다
넷째  심판이 있다
당신이 이겼는지 졌는지를 판단하는 심판이 있다
다섯째  보상이 있다
모든 경주가 이와 같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주에도 출발점이 있다

그 출발점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때 바로 구원받은 날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 우리는 부르심받아 경주를 시작한 것이다

이 경주는 우리가 주님을 뵐 때까지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경주의 끝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노정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청지기 직분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것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리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잘 달렸는지 못 달렸는지를 심판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격려하고 나 자신을 격려한다

우리 경주를 달리자
신실하게 잘 달려서 어느 날 인정받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의 공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고 거절되고 자격 없다고 가치 없다고 판단받기를 원치 않고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받을 보상은 썩지 않는 의의 면류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절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운동 선수들은 다 썩을 면류관을 위하여 달리지만 우리는 그러한 썩을 면류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면류관을 구하는 것이다


2002년 겨울 훈련 집회
미니스트리
고린도전서 결정 연구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4. 05:00

찬송가 242 - I Need Thee Every Hour - 지방교회 찬송가


1

I need Thee every hour,

Most gracious Lord;

No tender voice like Thine

Can peace afford.

I need Thee, oh, I need Thee;

Every hour I need Thee;

Oh, bless me now, my Savior!

I come to Thee.

2

I need Thee every hour,

Stay Thou near by;

Temptations lose their power

When Thou art nigh.

3

I need Thee every hour,

In joy or pain;

Come quickly and abide,

Or life is vain.

4

I need Thee every hour,

Teach me Thy will;

And Thy rich promises

In me fulfill.

5

I need Thee every hour,

Most Holy One;

Oh, make me Thine indeed,

Thou blessed Son.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4. 05:00

교회번식의 생명선인 가정 집회의 회복 - 지방교회 집회

1. 

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4. 05:00

생명이만나 357 - 열린 생각 - 지방교회 이만나

고후6:11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의 입은 여러분을 향하여 열려 있고, 우리의 마음은 넓어졌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4. 05:00

다음 글은 원세O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한 (지방)교회측 형제님과 원세O 님을 지지하시는 분들(양O욱, 이성O, 이인O, 홈 관리자님) 사이에 오고간 삼신론 토론 내용 중 일부입니다.

어떤 삼신론 토론

의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제 질문자체가 선명하지 않아서 그런지 제가 알고자 하는 요점에 대해서는 답변이 안되었군요.  

아래 고전8:5-6은 이것 저것 신이나 주라 칭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뿐인데 곧 아버지하나님이시다 라는 내용입니다. 저의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이 한 분뿐이고 그것이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아들이나 성령님은 어찌되는가 이 두위격은 하나님도 아니라는 말이냐"하는 취지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O욱 님은 "위의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 즉 성부 하나님만을 즉 성부의 단일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셨지요. 이 말은 아버지는 아들이나 성령이 아니시고, 또 아버지는 두 분 세분 네 분이 아닌 한 분뿐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위 문맥의 취지는 그런 방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문맥은 '이런 저런 신이 있다고 하지만 참신은 하나뿐인데 그것이 아버지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터툴리안이나 힐라리우스 같은 정통교부들도 바로 위 구절을 해석하면서 '아버지 안에 아들도 포함된다'는 의미라고 주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단일성을 뜻하는 것이다'라는 양O욱 님의 답변과는 다른 이야기임을 누가 보아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저는 양O욱 님에게 아직 "답변"을 못 듣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1. 아버지만 하나님이라면,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이 아닌가요?  

2. 위 구절이 '아버지의 단일성'을 의미한다면 동일구절에 대한 터툴리안과 힐라리우스의 견해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리고 양O욱님을 포함해서 (지방)교회 신론을 비판하시는 분들은 아래에서 보듯이 여전히 (지방)교회 신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계십니다. 

양O욱님 - "지방교회의 해석은 이런 것입니까. '지방교회는 애써 개체인격의 구별을 무시하고 독립되어진 삼위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하고 '한 하나님 곧 아버지'안에 성자, 성령의 인격의 결합을 님들은 얘기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해석이 바로 지방교회식 해석입니다." 

(지방)교회 -  (지방)교회가 개체인격의 구별을 무시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방)교회측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인격과 역할을 분명히 구별한다는 점이 최삼경 목사님과의 토론에서 상세하게 소개되었습니다. 즉 에베소서 1장에 대한 라이프스타디에 보면 선택과 예정은 아버지의 전권이며, 구속은 아들, 인침과 보증은 성령의 사역으로 돌린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있습니다. 이인O님과의 토론에서도 '이인O님이 절대로 인용하지 않을 부분들'이라는 제목으로 위 구별문제가 상세하게 인용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 9:6, 고후3:17에 대해서는 별도의 상세한 토론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매우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부분이지요. 차영O님이나 이인O님처럼 가볍게 다룰 주제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지방)교회측은 이 주제에 대해서 이미 충분한 토론을 한 바 있으며 자료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개체인격의 구별을 갑돌이 갑순이 그리고 갑돌이 아들처럼 세 사람같이 분리된 실존체로 보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구별에서 지나쳐 "분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퍼슨, 링컨, 아담스처럼 세 사람인데 개나 소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본질에 있어서 같은(하나)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분리"와 "구별"의 개념에 대해 더 연구가 필요하십니다. 개혁신학자들 말만 듣거나 문법만 가지고 따질 일이 아닙니다. 

아래 한 미국의 장로교신학자가 주님의 기도 등에서 언급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는 단지 제1 격만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을 포함한 'three persons'인 온전한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킨다. 삼위를 갑, 을, 병 같은 세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 라는 지적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으십니다.


제가 질문 드린 것이지만 답변이 없으셔서 다시 가져 왔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면 양O욱님이 대표해서 각 항목별로 답변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1. 사람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누구(몇 격의 하나님)입니까?  

2. 각 위가 온전한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3. 요한복음 14:23에서 우리(아버지, 아들)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를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4. 딤전3:15의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는 어떤 위격의 하나님이 계십니까?
  

5.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고후13:5, 골3:4) 안에는 아버지, 성령의 실존체는 안 계십니까?
  

6. "우리가 영접한 주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사람"이십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아버지, 어머니, 아이처럼 각각 떨어진(분리된) 세 인격체들로 보는 분들은 삼위일체의 셋을 말할 때는 강점을 가지십니다. 그러나 한 분 또는 하나를 말 할 때는 궁지에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균형 잡힌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세O, 양O욱, 이인O님 그리고 이성O님들과 다음 사항들을 검토해 보기 원합니다. 

가장 쉬운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1. 성경에서
 

고전8:4-6을 보면,....'우상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을 아노라(there is none other God but one)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일 위 말씀에서 "아버지"를 원세O님이나 차영O님처럼 아들과 성령 인격은 제외된 제1격 하나님만으로 본다면 아들과 성령의 하나님 되심은 즉각 부인되거나 여호와증인들 주장처럼 열등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세 위격들을 사람 가족에서의 아빠, 엄마, 아이처럼 이해하면 당장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즉 "아빠만 사람이다" 라고 하면 "한 가족이긴 하나 엄마나 아이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통교부들은 아래에서 보겠지만 이런 식으로 삼신론적으로 삼위일체 또는 아버지하나님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어느 분이 소개 드렸던 장로교 신학자의 글 (영어자료)도 이인O님, 원세O, 양O욱님들과 다릅니다. 보는 기준이 분리된 셋임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이 양태론처럼 보이는 이 모순이 매우 안타깝기만 합니다.  

2. 정통교부들의 주장에서 

1) 터툴리안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제일 먼저 사용한 정통교부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한 분으로가 아니라 삼위의 이름으로 받았다. 그러면 신이 세분인가? 아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한국교계는 '세분하나님이 정통교리'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성부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자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의례히 아버지와 함께 포함되기 때문이다...나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할 때 아들은 제하고, 나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할 필요는 없다'(차영배, 신론120쪽). 

위 말에 대해 '그것은 동일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라느니, '이단이 정통교회 신학자의 주장으로 자신들을 위장한다'느니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핵심에서 빗나간 유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성부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자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의례히 아버지와 함께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양태론이라고 정죄한다는 자체가 말만 정통 정통하지 실제로 교회역사상 정통교리도 모르고 또 성경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요일2:22-24가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힐라리우스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저자는 힐라리우스가 서방교회의 아타나시우스라고 불리워진다고 말함으로 그가 정통교부임을 한마디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보듯이 힐라리우스도 터툴리안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신약에서 언급한 유일신은 곧 성부인데 고독한 아버지가 아니다. ...요17:3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도 성부이시다. 성부만이 유일신이라는 말과 유일신이 성부라는 말은 서로 다르다. 후자(유일신이 성부)의 경우 성자가 제외되지 않는다... 

사벨리안 이단처럼 성부와 성자를 한 위격 되게 함으로 유일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리안 이단처럼 성부만이 유일신이라고 하여 성자를 이에서 제외시켜서도 안 된다. 성부의 품속에 계신 독생 하신 하나님은 성부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유일신이다'(위 차영배님 책, 154-155쪽).  

위에서 보았듯이 아버지, 아들은 "성부의 품속에 계신 독생 하신 하나님"이란 성경말씀처럼 서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유일신이지 아빠, 엄마, 아이처럼 각각 떨어져 있으나 한 가족이기 때문에 유일신이 아닙니다. 

"한가족 유일신" 개념으로는 고전8:6, 요17:3을 성경진리에 맞게 해석할 길이 전무합니다. 원세O, 양O욱, 이인O, 이성O 님들을 '아버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성경을 한 번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 님들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관계이해에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으십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님을 마치 사람인 아버지, 어머니, 아이와 같은 각각 분리된 세 인격체들로 보시고 그들이 한가족이라는 관계에 있어서 하나 또는 한 분이라는 주장은 매우 특이한 주장이십니다. 

교회역사상 님들처럼 삼위일체를 이해한 정통 신학자들이나 교부들이 있었습니까? 만일 있었다면 누가 어디서 그렇게 주장했는지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참고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대목의 단 복수 구별을 참고는 할 수 있으되 문법을 절대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서 빌 2:13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할 때 하나님은 단수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세 인격들 중 두 인격은 제외되고 나머지 한 인격만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는 세 인격들 모두가 사람 안에 계시다는 증거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들인 주예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사람 안에 계신 것은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문법이 성경본문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한 예입니다. 히브리어 단 복수 문제는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원칙은 그것이 삼위일체의 비밀을 푸는 절대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양O욱님이 언급하신 창1:1은 복수가 아닌 삼중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