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에 간행된 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시집에 수록된 낙엽[落葉]이라는 시에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문구와 함께 시몬이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낙엽’ 혹은 ‘가을’이라는 개념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베드로후서 1장 1절을 읽다가 발견한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라는 말과 함께 놓임으로써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우리와 함께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할당받은 이들에게 편지합니다.
신약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는 ‘시몬 베드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옛 이름인 시몬은 출생으로 말미암은 옛사람을 가리키고, 주님께서 주신 새 이름인 베드로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합해져 있는데, 이것은 옛사람 시몬이 새사람 베드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말씀에서 “시몬 베드로”라는 부분을 소리내어 읽었을 때, 그동안 알아왔던 베드로와 관련된 구절들이 전해주는 명암이 있던 베드로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제 안에 떠올랐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일생(밝은 면) : 베드로의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절대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사람을 얻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성경은 그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변화 산’에 가셨을 때나 겟세마네에 가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 외 2명을 특별히 챙기셨습니다. 그 이후의 베드로의 생생한 활동기록은 다음에서 보듯이 사도행전 전반부(1-12장)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설교하던 장면에서 그는 매우 돋보였습니다(행 2:14-41).
그 후 그는 “모태로부터 서지 못하게 된 어떤 이”를 벌떡 일어나 걷게 했고, 공회에 붙잡혀가 심문을 당할 때도 당당했고, 거짓말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베드로의 말에 그 자리에서 죽어 나갔으며, 중풍병으로 팔 년 동안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쳤고, 심지어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보자기 환상 사건’이후,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 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던 기존의 실행에 비춰볼 때 파격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헤롯 왕 때에 “네 패의 군인들”(모두 16명)의 감시하에 옥에 갇혀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사건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 이후로는 사도행전이라는 주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대신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행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의 일생(어두운 면) : 그는 자주 덤벙댔습니다.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하다가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빠져들지를 않나, 위 변화 산 위에서는 뜬금없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다가 “아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마 17:5), 타의에 의해 제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모두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라던 그의 맹세는 결국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그대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입니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처참하게 결말이 났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그가 “붙잡고 한쪽으로 가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님을 책망”한 사건은 믿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그의 이러한 무모함과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한편 그는 위선을 행하다가 사역의 ‘후배’일 수도 있는 사도 바울에게 면전에서 책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관련 각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믿음에 있어서 매우 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통에 관해 매우 분명한 이상을 하늘에서 받았고, 앞장서서 그것을 실행했다. 그러나 이방인 믿는 이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떠난 것은 얼마나 약한 것이며 퇴보한 것인가! 그가 사도들 가운데서 인도 직분을 잃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목양: 위에서 살펴본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하나로서 특별한 분깃이 있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공존하는 믿는 이들인 우리 각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부침이 극심했던 베드로가 어떤 계기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아름다운 마감을 하게 된 것인가를 묵상할 때, 주님은 문득 다음 두 가지 사건을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그에 대한 중보기도입니다.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베드로를 요구할 때 주님은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간구하셨고”, “그대가 다시 돌아오거든, 그대의 형제들을 견고하게 하십시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전히 주님을 믿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뒤로 물러나 디베랴 바닷가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를 주님께서 목양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때 주님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도 잡게 해 주셨고(6절), 생선과 떡으로 아침도 차려 주셨고(9, 13절), 여전히 믿고 목양을 부탁하셨습니다(15-17절).
한국 사회는 소위 ‘승자독식’ 사회인 것 같습니다. 한 번 경쟁에서 밀리거나 어떤 일로 실패를 맛본 사람은 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노정에는 위 시몬 베드로처럼 주님의 주권 아래 안배된 성공과 실패가 있으며, 그 자체가 생명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읽은 <부흥의 법칙>이라는 책을 보면, 아가서에는 최소한 여섯 번의 <시작과 과정과 끝과 멈춤(pause)>이 있습니다. 특히 이 ‘멈춤’의 시기에 위 베드로가 맛보았던 주님의 목양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깊이 느낍니다.
그러나 이 희년 개념을 신약에서 적용할 때는 더 이상 '물질적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 우리의 유업이라고 한, 우리가 믿을 때 우리 영 안에 모셔 들인 하나님자신 또는 '약속의 성령'(엡1:13)이십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 믿고 주님을 자기 영 안에 모셔 들인 사람들은 혼의 방황을 끝내고 깊은 영 안의 음성에 순종하고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 자기 유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유업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보다는 '재산(유업) 불리는 것'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체험상 이 유업이 증가하면 희년의 실재가 증가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레드 메첼이라는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순절 배경을 가진 분인데 워치만 니 당시에 상해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왜 자기 주변에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은 그토록 실망스러운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누구에게 섣불리 묻지도 못하고 혼자만 괴로워하다가 1943년 2월에 워치만 니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해답을 얻게되었습니다.
어떤 능력이 아니라 지금 그 영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을 인격으로 삼아 사는 문제를 본 것입니다. (금세기의 선견자 워치만니, 한국복음서원, 153쪽 참조).
이와 다른 경우인데, 영적 서적도 많이 읽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으나 정작 그 삶의 간증은 그렇게 '재산 많은 모습' 또는 '참 희년의 누림' 안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1994년 무렵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전보다 더 많은 영적지식을 가진 그 자체가 '재산을 불린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로부터 '유산 많이 가진 사람'의 넉넉함과 여유가 배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영적 지식 많은 것이 참 유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소위 영적인 은사가 많은 것, 그리고 영적 지식이 많은 자체가 우리가 지금 희년과 관련하여 말하는 그 '소유'는 아닙니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는 읽었지만 그것을 참되게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3. 어느 날 눈이 열려서 보니 제 안에 축적된 유산인 그리스도가 너무나 부족한 것을 보았습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게 했던 그런 것들이 제 존재를 통과한 저의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머릿 속에만 있는 지식인 것을 보고 주님 앞에 낮아지는 체험을 가졌습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그후 '참된 재산 불리기'는 내주하시는 주님자신(골1:27)이 제 안에서 증가되시거나, 성경 본문 말씀 자체가 제 안에서 세력을 얻으시는 것임을 빛가운데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에 큰 도움을 준 말씀은 엡5:26, 눅8:15입니다.
쉽게 말해서 진짜 재산이 불려진 것은 아침에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여 얻은 그 말씀, 그 말씀을 굳게 붙잡고 이런 저런 환경을 통과할 때 내 자아가 부인되는 체험과 말씀의 요소가 안에서 제 존재 안에서 증가되는 체험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동안 메시지 읽어서 알게 된 지식 자체가 재산 불어난 것인 줄로 착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이 왔을 때 이길 힘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런 메시지는 성경본문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보조도구일 뿐, 결국 그런 도움을 통해 이해된 성경본문을 굳게 붙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역의 메시지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그 구체적인 문맥에 따른 건강한 해석을 제공함으로 제가 자신의 관념을 따라 성경을 읽는 덫에 걸리지 않게 해 주었고, 말씀을 더 깊은 인식을 가지고 먹고 묵상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4.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저의 마음중심을 빼앗지는 못합니다. 오직,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 한 구절의 말씀이라도 제대로 붙들고 그 안에서 빛과 생명을 얻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다른 것에 시간을 낭비할 만큼 그렇게 많은 날들이 남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침에 그렇게 집중하여 읽고 누리고 외운 말씀을 하루를 살면서 되씹어 먹고 또 그 말씀으로 인하여 환경의 어려움과 유혹을 이기는 삶을 충실히 하루하루 사는 것...
이것이 제가 알고 지금 실행하고 재산 불리는 비법입니다.
밖의 세상만 불경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현실도 점점 더 팍팍 해지고 있어서 '(영적) 재산 불리기'도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실히 고수하는 것이 후회없이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1.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사막길을 여행 중 빌립의 방문을 받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 53:7-8 을 읽던 중이었는데, 빌립이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행8:30-31)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 집회에 가서 다른 이의 공급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경우도 그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냥 나는 성경을 매일 읽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때도 많습니다. 성경의 ‘형성사‘를 쓴 박창환님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같이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5쪽).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성경 지식만으로써는 신자의 생활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되, 때로는 "우리를 지도해 주는" 좀 더 노련한 성경교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가까이 없다면 그런 분들이 쓴 책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2. 어제 오늘 제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필요가 있어서 어제 아침에 몇분 지체들과 함께 시편 45편을 읽었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구절 읽었는데, 예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왕비가 우리고 두 개의 옷이 갖는 의미가 깊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그런지 그 대목은 눈에 쏙 들어오는데 다른 부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PDA 에 있는 영어회복역 각주 도움을 받으며 한번 더 읽자 시편 45편의 골격이 딱 잡히는 희한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즉 시편 45편 1-8은 왕(king)에 대하여 9-15는 왕비(Queen)에 대하여, 16-17은 왕의 아들들(Sons)에 대한 언급을 한다는 간략한 문단 나누기 조언이 그런 도움을 준 것입니다.
더구나 왕은 신약 사복음서에서 계시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왕비는 서신서의 교회를, 왕들은 계시록의 이기는자의 예표라는 설명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시편기자는 1-8절에서 왕을 네 개의 중요 단어로 노래했는데 그것들은 (왕의) 아름다움(2절), 승리(3-5절), 왕국(6-7절), 미덕들(8절)입니다.
3. 위와 같은 기본 이해를 가지고 지체들과 다시 시편 45편을 읽고 1절을 PSRP 했는데 너무나 풍성했습니다.
특히 좀더 공을 들여 읽고 기도하고 외운 구절은 참으로 감칠맛이 났습니다.
"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흐르니, 내가 왕에 관해 노래를 지어 바치겠네.."
오 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 흐르니.. 주여 오늘도 저의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 흐르게 하소서!.
주여 저로 왕에 대하여 더 알게 하소서! 당신을 노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읽고 또 기도하면서 시편은 생명의 책 기도의 책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거기다가 또 시편 45편 관련 교회찬송은 또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에도 1절 만을 되풀이해서 읽고 그것으로 기도했습니다.
"왕후는 오빌의 금을 꾸미고 우편에서/내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들있네/
영광스러운 교회가 왕후요 배필이되/모든 성도여 이 모두 우리의 영화로다(782).
이처럼 그동안 주님이 역사적 교회 안에 믿음의 선진들에게 열어 보여주신 모든 풍성들을 마음을 열고 겸손히 받고, 그것에 더하여 매일 성경말씀을 직접 수고함으로 경작할 때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은 부요하며 견고한 믿음 위에 설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안에는 누구도 독불 장군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읽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냥 표면적인 내용이 다가오고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때 이 단계에서는 말씀 자체가 전달하는 것 외에 자신의 관념과 선입관이 덧 칠해져 들어와 본문이 전달하는 내용을 순수하게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을 여러번 천천히 읽다 보면 그 본문의 내용이 말하는 요점이 눈에 들어오고 그것이 의미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그치지 말고 조금 더 전진된 방식으로 성경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라는 시45:2 말씀 중에서 전반부인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만을 깊이 먹었던 저의 체험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저는 우선 "사람이 낳은 아들가운데 왕은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는 새 번역 성경 본문을 통해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아름다움'을 예표한다는 인식이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낳은 아들 중 한 사람'을 노래한 것임으로 개역 본문보다 그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하!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구나...그런데 '아름답다' 라는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선 영어성경이 쓴 단어를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미국 표준역, 킹 제임스 역, 다아비 역, 회복 역이 모두 'beautiful'이 아닌 'fair '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보다 가장 아름답다는 그분의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을 가리킬까 하고 묵상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회복역 관주'를 통해 아가서 5:10-16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도구가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어 더 풍성하게 말씀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케 합니다.
3. 저는 아가서 5장을 펴고 사람인 그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같고, 머리털은 ...눈은...뺨은...입술은...손은...다리는...형상은...입은...
한 단어 한 말씀이 다 주옥같고 풍성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 사랑은 '눈부시게 희고'라는 단어 하나만 제대로 추구하고 누려도 너무나 풍성합니다. '희고 붉다'는 말은 그분이 순수하시고 생명과 능력이 충만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천만인 중에 뛰어난 분이신데..
요 12:32에 의하면 주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12:32에 가면 또 이 구절을 깊이 누릴 수 있는 풍성한 각주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가서 5장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에 관한 각 방면을 그것도 신구약을 넘나 들며 깊이 추구하고 누리려면 하루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저는 <왕이신 그분의 아름다움> 즉 'fair' 라는 한 단어를 파고 들어 누리는 법을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4. 저는 예전에 에베소서를 읽다가 사도 바울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고...글쎄 그리스도가 풍성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측량할 수 없는' 이라는 말 씩이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왜냐하면
제가 그 당시 아는 그리스도는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저의 성경을 읽고 추구하는 방법과 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충대충, 자기 취향따라, 임의로 단정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고..마치 칡뿌리를 입에 넣고 씹긴 씹는데...쓴맛이 날 때쯤 다 먹었다고 퉤~ 하고 뱉어 버리고 또 다른 부분을 찢어 입어 넣고 씹고..버리고 했을 뿐 참된 칡맛을 느낄 때
까지 씹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칡뿌리 맛에 대한 저의 기억은 그저 '쓴 맛' 뿐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진리를 추구할 때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듯 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어제는 그 동안 사도행전을 쭈욱 읽어 온 터라 19장을 그것도 '소란' 이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은으로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먹고 사는 지방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라고 말함으로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며..." 그 도시를 온통 소란스럽게" 하는 전후 사정을 적은 대목입니다.
우리는 19장 끝부분인 "이렇게 말하고, 그는 그 집회를 해산시켰다" 라는 구절까지 읽었지만 처음엔 마땅히 기도에 도움이 될만한 요절이 잡혀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란의 극치를 이룬 대목들 중 한 곳인 32절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쳐대니,모인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으며, 대부분은 자기들이 무엇때문에 모였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위 구절을 먹을 때 여기서 무슨 빛을 얻겠나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체들과 함께 반복해서 먹을 때 조금씩 만져지는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하며 외쳐 대지만 선악지식이나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 많은 때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고, 모임의 근본 목적을 망각할 때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믿는 이들 간에도 부부 간의 대화에서, 봉사 집회로 모일 때, 심지어 기도하러 모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명의 흐름을 벗어날 때 그 모든 주장들 말들은 다 무엇인가...한참 무엇인가를 고집하며 말하다 보면 깊은속에서 너(너희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음성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입으로는 한 마디 안 해도 생각 속에서 '외쳐대는' 경우도 있고 그 현장에 안 가더라도 그 모임에서 결정된 소식을 듣고 이러니 저러니 '외쳐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침들은...그것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기여하지 않는 것이라면...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면...듣는 사람을 어둠에서 돌이켜 빛가운데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면...
군중심리에 이끌려 몰려나와 이렇게 저렇게 외쳐대나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고 모르는 저 군중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빛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먹되, 그 안에서 생명과 빛(요1:4)과 씻는 물(엡5:26)과 젖(벧전2:2)을 얻기까지 계속 그 말씀 안에 머문다면...내용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먹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손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범주에서는...어떻게든 자꾸 노출되고 대중에게 각인되어야 여러 가지 기회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눈 도장'이라는 말도 생겨 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든 '튀어야 ' 살아 남는다 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인 교회의 범주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교회라고는 하나 세상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런 영역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 자신의 충만인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때 앞서서 봉사를 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은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 무리의 동료들이 비슷한 시기에 교회생활을 시작했는데...지금은 자기 외에 대부분은 어떤 위치에 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소외 되었거나, 자신이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예전에는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서 아무도 관심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 때...그런 외적인 상황이 자신의 내면의 영적 실재를 악화시킬까요...
비록 인간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참기 어려운 기간일 수 있으나 영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저는 며칠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감옥에 갇힌 세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후 결례의식을 행하다 일어난 소동 이후 전개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긴장과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오고, 공회가 열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결사대가 생기고, 밤 9시에 병력이 바울을 호위하여 약 60킬로(150리)를 이동시키고, 유대인들이 변호사를 대동하여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고, 총독이 말씀을 듣고자 하니 바울은 의와 심판을 강론하고
이렇게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여, 더 자주 그를 불러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해가 지난 후에 보르기오 베스도가..."(행24:26-27).
위 구절에서 짧게 언급된 '두 해가 지난 후' 라는 부분이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신약경륜을 수행하던 바울사도에게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낭비요 큰 제약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역 성경은 27절의 각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두 해 동안 사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사도는 이 땅에서의 주님이 움직임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그가 로마에서 상소하는 동안에 썼던 그의 서신들, 즉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가장 비밀하고 깊고 풍성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서신들이 역대로 교회에 가져다 준 공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한 동역자 형제님이 주님을 오랫동안 전 시간으로 섬기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공급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리가 본 이상이 객관적인 현실을 통해 시험받을 때 ...를 잘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꿈을 꾼 후, 그가 직면한 상황 특히 감옥에 갇힌 가운데서도 요셉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는 모습...
특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40:8)의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이와 과련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스리지 못하면 나와서도 어렵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그 다음 요점은 감추인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고...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의 2년 감옥 생활, 요셉의 감옥 생활,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20년 감옥생활은...하나로 엮어져 제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생활은 영광의 때만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지체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잊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따로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기회가 아닌 땅에 묻혀 썩어 자신의 생명의 성숙과 다른 지체들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마지막 때까지 “두 남자가 밭에 있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다가”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밭을 갈고, 맷돌질하는 등 여전히 주어진 생업에 충실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위 본문을 묵상하면서 깊이 다가온 말씀은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두고 우리에게 명령문 형태로 요구하는 한 가지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앞으로 어떤 환경이 닥쳐오든 “그분 안에 거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느 때 우리 앞에 나타나셔도 여전히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영, 즉 연합된 영 안에서 늘 그분 안에 거합니다(고전 6:17).
또한, 이 연합된 영이 우리의 혼을 통과하여 우리의 삶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의가 표현된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보고 그가 거듭난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요일 2:29).
그러나 우리 안의 기름 바름의 가르침(요구)을 거절하고, 대신에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과 자신의 감정대로 살아갈 때, 주님과 우리의 혼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과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제게는 위 ‘그분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가능하면 이러한 불일치를 만들지 말며, 부득이하게 그런 상황이 생겼다면 빨리 주님께 돌이켜 죄들을 자백함으로써 그분과의 교통을 회복하고 또 계속 유지하라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3) 그분 안에 거하지 못한 채 그분이 오시면 어떻게 되나요?
추구하면서 바로 이 부분이 본문에서 가장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개역 성경은 언뜻 읽으면, 주님 재림 때에 당연히 담대함과 부끄럽지 않음을 얻을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회복역은 해당 부분을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번역해서, 본문에서의 부끄러움(혹은 수치 당함)이 재림하신 주님(의 임재)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임을 더 선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 ‘아포’를 일부 번역처럼 ‘before’(앞에)가 아니라 ‘from (Him)’(로부터) 혹은 ‘away from (Him)’(로부터 멀리)라는 원래의 뜻을 살려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몰래 어떤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갑자기 불이 켜지자, 스스로 빛을 피해 다른 곳으로 숨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지금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능하면 늦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든 그 날은 올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재림이 어떤 이들에게는 아래 말씀처럼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서 떠나가십시오(마 7:23).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24:51). (이것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과 그분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져, 신실한 노예들이 누리게 될 왕국의 출현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각주 1).
-그러자 왕이 종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22:13).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은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기는 생명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천년왕국 동안 왕국의 누림에 참여할 자격을 얻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다룸을 받는 것이다.-각주 2, 오는 왕국 시대에 바깥 어둠 속에 던져지는 것은 천년왕국 후에 영원토록 불 못에 던져지는 것과 다르다.
어떤 분들은 위와 같은 말씀을 불신자를 가리킨다고 오해하나, 전후 문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다른 부류에게 돌려서 억지 평안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타조가 다급히 쫓기다가 모래 속에 자기 머리를 파묻고 상황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