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안식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레위기 23장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레23:3 “그러나 일곱째 날은 완전히 안식하는 안식일이며 거룩한 모임을 소집하는 날이다.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이날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여호와에게 안식일이다.”
레위기 23장은 명절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명절을 얘기하면서 먼저 안식일을 언급하는 것은 왜인가? 이것은 안식일이 명절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명절은 믿는 이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믿는 이들 서로 간에 단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명절인 안식일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백성 서로 간에 누리는 안식을 상징한다. 매 칠일마다 안식과 누림을 위한 하루가 있었다. 그날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안식일에 함께 모여야 했음을 가리킨다.
만일 모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 간에 단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안식일의 원칙은 어떤 날을 안식일로 지키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안식일의 원칙은 주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인식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의 의미가 단순히 일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 2절은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완성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그분께서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라고 말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는 안식일이 일곱째 날이지만 사람에게는 안식일이 첫째 날이다. 6일동안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이 생존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후인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에서부터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하나님께는 일곱째 날이었지만, 사람에게는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먼저 육일 동안 일하셨고, 그런 다음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의 첫째 날에 안식했고, 그런 다음 일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보셨을 때 안식하고 신선하게 되실 수 있었다. 사람은 시원한 음료처럼 하나님의 갈증을 풀어 드리고 그분을 만족하시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끝내시고 인식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에게는 동반자인 사람이 있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 안식과 신선함을 주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동반자인 사람에게는 바로 첫째 날이 안식과 신선함을 주는 날이었다. 사람의 첫째 날은 누림의 날이었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림을 갖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일할 것을 요구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누림을 주신다. 하나님과 함께 그분 자신을 충만이 누린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누림을 갖고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모른다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모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바에 따르면 단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될 필요가 있다. 그럴러면 우리는 그분을 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분의 일 안에서 어떻게 그분과 하나가 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일에 대한 의무는 이미 하나님께서 감당하셨다. 하나님의 몫은 일하고 누리는 것이지만, 사람의 몫은 단순히 누리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후 그의 첫째 날인 안식일 안으로 들어가 안식하고 누렸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는 일하기 시작했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는 일이 첫째이고 누림은 둘째이지만 사람에게는 누님이 첫째이고 일은 둘째이다. 이것은 은혜 원칙에 관한 이상이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나서 누리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누리고 나서 일한다. 이 원칙은 창조에서뿐 아니라 구속에서도 동일하다. 주님은 구석을 위해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구속을 성취하신 후 주님은 그 결과를 누리셨다. 주님은 먼저 일하시고 나중에 누리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누리고 나중에 일한다. 구속과 은혜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모든 것이 끝마쳐졌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성취하신 것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얻는다.
매주 있는 안식일은 완전하고 엄숙한 안식이었다. 그것은 가볍거나 평범한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누림을 위한 거룩하고 신성하며 중요한 안식이었다. 이 완전한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도 철저한 안식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백성 서로 간에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의미한다. 안식일는 여호와에게 안식일이었다.(레23:3) 이 안식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안식이라는 것과 그분께 구속받은 백성도 안식에 참여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거룩한 모임, 곧 모든 명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와 함께 인식하고 있다.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자.
출애굽기 31장 13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반드시 너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시이기 때문이다,” 14절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누구든지 이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여햐 한다. 누구든지 이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끊어지게 된다.”
15절 “육일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완전히 안식하는 안식일이며, 여호와에게 거룩한 날이니,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햐 한다.
1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고,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절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우는 영원한 표지이다. 이는 여호와가 육일 동안 하늘들과 땅을 맏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해졌기 때문이다.”
민수기 15장 32절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있을 때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나무하는 사람을 본 사람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에게 데리고 왔다. 그들은 그를 가두어 두었다. 왜냐하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36절 “그래서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서 죽였다.”
이상을 볼 때 구약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엄격한 날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어기는 것이다. 십계명에서도 제 4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면 그렇게 엄격하게 다루셨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 이것은 주일날이 신약에서 안식일이 된 것을 의미한다. 안식교를 비롯하여 지금도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고 있는 단체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안식일을 지키고 있지 않지만, 그 원칙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한 날로 고정시키고, 마치 유대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안식일을 범한다 해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영적으로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멘
마1:21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3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여호와 구원자’ 혹은 ‘여호와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이실 뿐 아니라 여호와이시며, 또한 여호와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여호수아 곧 우리를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이란 우리에게 좋은 땅이 되는 그분 자신이십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었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임마누엘은 사람이 부른 이름이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육신 되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와 함께 계셨을 분 아니라 승천하신 후에도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으로 모일 때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더욱이 그분은 시대가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실 것입니다.
아침에 아래 베드로전서 1장 10-12절 말씀을 먹으면서, “은혜”라는 단어가 더 새롭게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습니다”(갈2:21).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5:4)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거나,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얻을 은혜에 대하여 예언한 신언자들이 이 구원에 관하여 부지런히 찾고 살펴보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을 미리 증언하신 것이 어느 때 어떠한 시기를 가리키는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신언자들은 자신들이 전파한 이러한 것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
천사들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보기를 갈망합니다.”
위 말씀에는 네 부류가 등장합니다. 즉 구약의 신언자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신약 사도들, 천사들, 그리고 은혜 혹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우리 신약의 믿는 이들입니다.
또한 구약의 신언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살펴본 것”, 신약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 천사들도 자세히 보기를 갈망했던 “이러한 것들”은 다 같은 내용입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거쳐 신약의 믿는 이인 우리에게 도달한 ”여러분이 얻을 은혜” 곧 “이 구원”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통과해야 했고, 천사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신언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는지를 묵상해 볼 때, 우리가 소위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매일 매일 족한 은혜를 누리고 있음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위 본문은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메시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에 관하여, 먼저 구약의 신언자들이 예언했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장차 고난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22편 1절, 6-8,절 12-18절, 이사야 53장 2-10절, 12절, 다니엘서 9장 26절, 스가랴 12장 10절, 13장 6-7절 등에서 묘사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16편8-10절, 22편 21-22절, 118편 22-24절, 110편 1, 4절, 118편 26절, 스가랴 14장4-5절, 시편24편 7-10절, 72편 8-11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신언자들은 위와 같은 내용을 자신들의 입으로 예언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또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신약의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을 뿐”입니다(벧전1:12).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된다는 것”(마16:21)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너무나 엉뚱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며 주님을 책망했고, 세베대의 아내는 곧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께 자신의 두 아들의 출세를 청탁했고, 다른 열 제자는 그런 두 형제에게 분개했습니다.
한편 우리에게 은혜로 오시기까지 거치셔야만 했던 이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문제는 부활 후에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잠시 더 머무시던 때에 아래와 같이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심으로 조금 더 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에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한 것, 곧 모세의 율법과 신언서와 시편에 나에 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생각을 열어 주시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일의 증인들입니다(눅24:44-48).
그 결과 신약의 초기 증인들이었던 사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실재를 체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능력이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즉 생명 주는 영 안에 녹아 있음을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또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신 주 예수님을 우리 존재 안으로 영접하는 것이요, 완전한 구원은 이 은혜가 우리의 영으로부터 혼으로 또 몸으로까지 적셔지고 확대되는 것임을 알기까지는 제게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오,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몸을 내밀고 목을 길게 빼고” “자세히 보기를 갈망”한 그 실재를 우리는 지금 직접 체험하고 누리고 있다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벧전1:5).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매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다만 이 은혜를 얻고 누리는 것뿐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 되신 그분을 버리는 것이요,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렘2:13)!
묵상이 이 대목에 이를 때 제 안에 다음과 같은 찬송가 가사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은혜에 대한 참된 정의는/ 아들 안에 주신 하나님 자신/ 은혜는 어떤 사물 아니요/ 내 분깃 되신 하나님 자신(376) 주님과 함께 죽고 사니/ 내가 할 일이 무엇이랴/ 허공을 치듯 분투 않고/ 새 생명 좇아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364).
오 주 예수님,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던 그 은혜”(딤후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