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 10절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판단합니까?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0절의 「하나님의 심판대」는 고린도 후서 5장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천년 왕국 전에 있을 것이며, 그때에 믿는 이들의 생활과 일이 심판 받을 것이다. 이 심판은 믿는 이들의 구원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이 심판은 믿는 이들의 구원받은 후의 생활과 일에 관계 된다. 이 심판은 믿는 이들의 천년 왕국 안에서의 상(賞)과 벌(罰)을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대에 대한 진리는 성도들에게 거의 감춰져왔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받은 후의 생활과 일에 대해 주님과 계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칼빈주의의 예정론과 알미니안(Armenian)의 자유 선택론의 두 학파가 생겨났다. 칼빈주의 학파에 의하면,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으므로 장래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한다. 알미니안(Armenian) 학파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 생활이나 일이 그릇되면 구원을 다시 잃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두 학파는 두 극단을 대표한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이을 수 있는 다리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이다. 우리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았고, 결코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함을 선포한다(요 10:28-29). 우리는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심판대의 빛 가운데서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신자가 우리에게 올 때마다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의 분별력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형제 앞에 걸리게 하는 것이나 넘어지게 하는 것을 놓지 않았는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14:13).
기도: 오늘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살게 하시고,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는 육체의 일은 꾀하지도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4절은 매우 중요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정욕을 채우려는 육체의 일은 꾀하지도 마십시오.“ 14절에 있는 전쟁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와 같이 정욕과 그 영 사이의 전쟁이다. 우리는 정욕과 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우리는 빛의 무기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음으로 그것과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야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육에 대해 싸우는 우리의 무기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살면 살수록 그분은 육신의 정욕에 대항하는 우리의 병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육신에 어떤 것을 공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일지라도 육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육체의 일을 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영화 광고는 육에게 양식을 공급한다. TV도 배고픈 육에게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대적에 의해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TV를 보는 것을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TV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아주 강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TV는 대적이 육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는 능력 있는 수단이며 그 영향의 결과로 많은 악한 것들이 나타났다.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을 대항하고, 육의 양식을 끊어서 굶겨 죽게 하옵소서!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위자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권위가 없으며, 이미 있는 권위자들은 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성격은 거스르는 성격이지만 변화된 성격은 복종하는 성격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에 복종하는 데에는 상당한 변화가 요구된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에 복종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은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스르는 성격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권위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인 반응은, 『싫다(No)!』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위에 복종하려면 생명 안에서의 성장으로 인해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2절). 그러므로 권위를 거스르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심판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여러분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권위를 주시어, 하나님의 대표 권위자로서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하게 하셨다(창 9:6).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분께서 사람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을 확산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며 교회를 건축할 시간과 기회를 갖기 위한 것이다. 변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양심을 인하여 권위에 복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받아야 할 자들에게 두려움과 존경함으로 세금을 내는 것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세상의 범주에서는...어떻게든 자꾸 노출되고 대중에게 각인되어야 여러 가지 기회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눈 도장'이라는 말도 생겨 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든 '튀어야 ' 살아 남는다 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인 교회의 범주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교회라고는 하나 세상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런 영역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 자신의 충만인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때 앞서서 봉사를 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은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 무리의 동료들이 비슷한 시기에 교회생활을 시작했는데...지금은 자기 외에 대부분은 어떤 위치에 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소외 되었거나, 자신이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예전에는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서 아무도 관심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 때...그런 외적인 상황이 자신의 내면의 영적 실재를 악화시킬까요...
비록 인간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참기 어려운 기간일 수 있으나 영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저는 며칠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감옥에 갇힌 세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후 결례의식을 행하다 일어난 소동 이후 전개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긴장과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오고, 공회가 열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결사대가 생기고, 밤 9시에 병력이 바울을 호위하여 약 60킬로(150리)를 이동시키고, 유대인들이 변호사를 대동하여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고, 총독이 말씀을 듣고자 하니 바울은 의와 심판을 강론하고
이렇게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여, 더 자주 그를 불러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해가 지난 후에 보르기오 베스도가..."(행24:26-27).
위 구절에서 짧게 언급된 '두 해가 지난 후' 라는 부분이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신약경륜을 수행하던 바울사도에게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낭비요 큰 제약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역 성경은 27절의 각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두 해 동안 사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사도는 이 땅에서의 주님이 움직임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그가 로마에서 상소하는 동안에 썼던 그의 서신들, 즉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가장 비밀하고 깊고 풍성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서신들이 역대로 교회에 가져다 준 공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한 동역자 형제님이 주님을 오랫동안 전 시간으로 섬기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공급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리가 본 이상이 객관적인 현실을 통해 시험받을 때 ...를 잘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꿈을 꾼 후, 그가 직면한 상황 특히 감옥에 갇힌 가운데서도 요셉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는 모습...
특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40:8)의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이와 과련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스리지 못하면 나와서도 어렵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그 다음 요점은 감추인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고...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의 2년 감옥 생활, 요셉의 감옥 생활,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20년 감옥생활은...하나로 엮어져 제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생활은 영광의 때만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지체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잊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따로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기회가 아닌 땅에 묻혀 썩어 자신의 생명의 성숙과 다른 지체들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